전후맥락
「力命」 편은 천명과 인력의 모순관계를 제재로 한 글들로 구성되어 있다. 천명 자체에는 시비 판단이나 공의(公義) 실현 같은 의지가 없음에도, 사람들은 대대로 장수와 요절, 부유함과 빈곤함, 사회적 지위의 높고 낮음, 잘삶과 못삶 등은 천명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믿어왔다. 역사적으로 또 현실적으로 늘 있어 왔던, 가령 악한 이는 부유하고 높은 자리에 오르며 천수를 누리는 반면 선한 이는 빈곤하고 미관말직을 전전하다가 요절하는 현상을 그 근거로 든다. 「力命」 편에는 이러한 인식이 드러나 있는 고사들이 실려 있으며, 이들을 통해 천명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가 설파되어 있다. 고전 본문은 그 가운데 한 편으로 제나라 군주인 경공이 향락을 즐기다가 죽을 운명을 피해가지 못함을 한탄하자, 현명한 재상이었던 안영이 그러한 관점의 오류를 지적하는 내용이다.
고전 본문 [나]는 묵자 「비명하(非命下)」 편에 실려 있는 글이다. 「비명하」 편은 ‘운명을 부정한다’는 뜻의 「비명」 편 상, 중, 하 중의 하나로 내용은 「비명」 상, 중 편과 대동소이하다. 운명론 내지 숙명론을 반대하는 입장이 피력되어 있다. 묵자는 기본적으로 성실한 노동과 근검절약을 통해 누구나 잘살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운명론, 숙명론 등을 부정했고, 인간의 노력을 강조했다.
고전본문
[가] 제나라 경공이 우산으로 놀러갔다가 북쪽으로 도성을 내려다보고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훌륭하구나, 도성이여! 이리도 번영하고 흥성했는데 이 도성을 떠나 죽을까봐 어찌나 불안하던지. 예부터 죽음이 없었다면 과인이 이곳을 떠나 어딘가로 갈 이유가 있었겠는가?” 이때 경공을 모시던 신하 사공과 양구거가 나아가 울면서 아뢨다. “신들은 군주의 은사에 힘입어 채소로만 만든 음식이나 나쁜 고기라도 먹을 수 있었고, 노둔한 말이 끄는 작은 수레라도 탈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저희도 죽지 않았으면 하는데 하물며 군주께서야 오죽하시겠습니까?” 이때 안영에 옆에서 홀로 웃었다. 경공이 눈물을 훔치고는 안영을 돌아보며 말했다. “오늘 유람 길은 너무나 슬퍼서 사공과 양귀비도 모두 나와 함께 울고 있는데 왜 혼자만 웃고 있소이까?” 안영이 대답하였다. “만약 현명한 분들로 늘 이 나라를 수호케 했다면 저 옛적의 강태공이나 환공께서 항상 이 나라를 지키셨을 것입니다. 만일 용감한 분들로 늘 이 나라를 수호케 했다면 옛적의 장공이나 영공께서 항상 이 나라를 지키셨을 것입니다. 만약 이런 분들께서 영원히 이 나라를 수호하셨다면 주군께서는 지금 도롱이 입고 삿갓 쓴 채로 논밭에서 그저 일만 하고 계실 터인데 어찌 죽음을 애석히 여길 틈이 있겠습니까? 아니 우리 군주께서 어찌 임금이 되실 수나 있었겠습니까? 그 분들이 차례차례 왕이 되고 또 차례차례 죽었기 때문에 군주의 차례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군주께서는 이 때문에 도리어 눈물을 흘리시는 이는 어질지도 의롭지도 않은 겁입니다. 오늘 저는 문득 어질지도 않고 의롭지도 않은 군주를 보게 되었고, 또 아첨하고 아양 떠는 대신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문득 이 두 부류의 사람을 보게 되자 외람되게도 혼자 웃게 되었던 것입니다.” 경공은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자 술잔을 들어 스스로에게 벌주를 내렸고 사공과 양구거에게도 벌주 두 잔씩을 내렸다.
[나] 옛날 하나라, 상나라, 주나라의 성왕인 우, 탕, 문, 무 같은 임금들은 천하를 대상으로 정치할 적에 반드시 힘써 효자를 표창하여 백성들에게 부모를 섬길 것을 권하였고, 현명하고 훌륭한 사람을 높여 주어 백성들에게 착한 일을 하라고 가르쳤다. 그래서 정사를 펼쳐내고 교화를 폄에 착한 사람은 상주고 포악한 자들은 처벌하였다. 장차 이와 같이 하면 천하의 혼란은 틀림없이 다스려지고, 사직의 위태로움은 반드시 안정시키게 될 것이다. 그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가? 옛날 폭군 걸왕이 어지럽혀 놓은 것을 성군 탕왕이 다스렸고, 폭군 주왕이 어지럽혀 놓은 것을 성군 무왕이 다스렸다. 걸왕과 탕왕은 세상도 그대로이고 백성도 바뀌지 않았지만 군주가 정사를 바꾸자 백성들도 습속을 바꾸었던 것이다. 주왕과 문왕 또한 마찬가지다. 폭군인 걸왕과 주왕에게 맡겨져 있을 적에는 천하가 어지러웠지만 성군인 탕왕과 무왕에게 맡겨지니 같은 천하임에도 천하가 다스려졌던 것이다. 천하가 다스려진 것은 성군인 탕왕과 무왕의 능력이었고, 천하가 어지러웠던 것은 폭군인 걸왕과 주왕의 죄였던 것이다. 그대가 이로써 본다면 천하의 안녕과 위태로움, 다스려짐과 혼란해짐은 군주가 정사를 펼침에 달려 있는 것이니, 어찌 운명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옛적의 성군 우, 탕, 문, 무 같은 임금들이 천하를 대상으로 정치할 적에는 반드시 굶주리는 사람들은 먹을 수 있게 해주고, 헐벗은 자들은 입을 수 있게 해주었으며, 수고로운 사람들은 쉬게 해주고 어지러운 자들은 다스려줌으로써 마침내 온 천하에서 영예와 칭송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어찌 그것을 운명이라 할 수가 있겠는가? 본시 그 임금들의 능력 덕분이었음이다. 지금 현명하고 훌륭한 사람들은 현명한 사람을 높여주고 실적을 내고 학문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므로 위로는 그의 임금이나 고위 관리의 상을 받고 아래로는 만백성들의 칭송을 받아, 마침내 온 천하에서 영예와 칭송을 받는다. 그런데 또 어찌 그것을 운명이라 하겠는가? 역시 그분들의 능력 덕분이었음이다.
[가] 齊景公游於牛山, 北臨其國城而流涕曰, “美哉國乎. 鬱鬱芊芊, 若何滴滴去此國而死乎. 使古無死者, 寡人將去斯而之何.” 史孔梁丘據皆從而泣曰, “臣賴君之賜, 疏食惡肉可得而食, 駑馬稜車可得而乘也, 且猶不欲死, 而況吾君乎.” 晏子獨笑於旁. 公雪涕而顧晏子曰, “寡人今日之游悲, 孔與據皆從寡人而泣, 子之獨笑, 何也.” 晏子對曰, “使賢者常守之, 則太公桓公將常守之矣. 使有勇者而常守之, 則莊公靈公將常守之矣. 數君者將守之, 吾君方將被蓑笠而立乎畎畝之中, 唯事之恤, 行假今死乎. 則吾君又安得此位而立焉. 以其迭處之迭去之, 至於君也, 而獨爲之流涕, 是不仁也. 見不仁之君, 見諂諛之臣. 臣見此二者, 臣之所爲獨竊笑也.” 景公慚焉, 擧觴自罰. 罰二臣者各二觴焉.
[나] 故昔者三代聖王禹湯文武方爲政乎天下之時, 曰必務擧孝子而勸之事親, 尊賢良之人而敎之爲善. 是故出政施敎, 賞善罰暴. 且以爲若此, 則天下之亂也, 將屬可得而治也, 社稷之危也, 將屬可得而定也. 若以爲不然, 昔桀之所亂, 湯治之, 紂之所亂, 武王治之. 當此之時, 世不渝而民不易, 上變政而民改俗. 存乎桀紂而天下亂, 存乎湯武而天下治. 天下之治也, 湯武之力也, 天下之亂也, 桀紂之罪也. 若以此觀之, 夫安危治亂存乎上之爲政也, 則夫豈可謂有命哉. 故昔者禹湯文武方爲政乎天下之時, 曰必使飢者得食, 寒者得衣, 勞者得息, 亂者得治, 遂得光譽令問於天下. 夫豈可以爲命哉. 故以爲其力也. 今賢良之人, 尊賢而好功道術, 故上得其王公大人之賞, 下得其萬民之譽, 遂得光譽令問於天下. 亦豈以爲其命哉. 又以爲力也.
[출전]『열자, 묵자』
토론하기
(1) 고전 본문 [가]에서 안영은 운명이 어떠한 역할을 한다고 보았는가? 이를 토대로 안영이 운명에 대해 어떠한 관점을 지녔는지에 대하여 이야기해보자.
(2) 고전 본문 [나]에서 운명론을 비판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리고 이러한 관점의 장점과 단점에 대해 논의해보고, 이러한 관점에 기초하여 고전 본문 [가]의 제나라 경공과 안영의 운명에 대한 관점을 비판적으로 검토해보자.
(3) 운명론에 대한 본인의 생각을 이야기해보고 21세기 첨단 디지털 문명 사회에서 운명이 지날 수 있는 의미에 대하여 토의해보자.
해설읽기
고전 본문 [가]는 우리에게 운명이 이로운 것인지 아니면 해로운 것인지라는 물음을 던진다. 제나라 군주인 경공은 좋은 시절에 신하들과 좋은 곳으로 나들이를 나가 즐겁고 기꺼운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연로하였음을 느끼고는 서글퍼한다.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운명만 없었더라면 이 즐거움을 영원히 지속할 수 있을 텐데 하며 크게 아쉬워한다. 주변의, 언제 어디서든 있게 마련인 함량 미달의 신하들이 맞장구를 쳐대며, 보잘 것 없는 자신들도 닥쳐오는 죽을 운명이 야속한데 군주께서는 얼마나 더 야속하겠냐며 경공을 위로한다.
그때 안영이라는 신하가 빙긋이 웃었다. 그는 800여 년 동안 지속된 제나라 역사 속 수없이 많았던 재상 중에 관중이라는 재상과 함께 ‘top 2’로 꼽히는 명재상이었다. 평소에도 군주인 경공은 그를 늘 경계하고 있었다. 워낙 뛰어난 인품과 지혜의 소유자였기에 신하라고 하여 함부로 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경공은 아양 떠는 신하들에 싸여 있다가 문득 안영의 반응을 살폈다. 그랬더니 같이 나들이 간 신하들 모두가 나라가 망하기라도 한 듯이 슬퍼하고 있는 통에 유독 안영만 미소 짓고 있었다. 경공이 그 까닭을 안 물을 수 없었다. 그러자 안영은 경공이 야속하다고 탓한 그 운명을 다시 소환해냈다. 그러고는 바로 그 운명이 경공의 선대 군주 중 무척 탁월했던 군주들조차도 다 죽음을 맞이하게 해준 덕분에 경공 당신이 군주가 될 수 있었고, 오늘과 같은 호사도 즐길 수 있었음을 환기했다. 만약 운명이 그러한 훌륭한 군주들을 비껴갔다면, 그래서 그 뛰어난 군주들이 죽지 않고 살아 있다면 지금 경공 당신은 군주는커녕 뙤약볕을 맡으며 논밭에서 노동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일깨웠다. 은연중에 경공의 함량 부족함을 풍자한 것이다.
경공과 안영 사이의 이 일화는 운명의 양면성을 환기해준다. 운명은 결코 단일하지 않은 복합적 존재라는 뜻이다. 운명은 누군가를 부귀한 환경에서 태어나게 해주었다고 하여, 또 생애 내내 별다른 노력 없이도 잘살게 해주었다고 하여 그를 늙음이나 죽음 등으로부터 제외하지 않는다. 누구나 맞이할 수밖에 없는 늙음, 죽음이라고 해도 그에 대한 불안이나 공포 등이 가진 자와 없는 자에게 동일하게 작동되는 것은 아니다. 없는 자보다는 가진 자가 죽음에 대해 지니는 불안, 공포가 상대적으로 더욱 크고 깊을 수 있다. 이런 가능성을 감안하면 운명은 적어도 양면성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 물론 가진 자이든 없는 자이든 누구에게나 늙음, 죽음은 동일하게 일어나는 것이니 만큼 늙음, 죽음을 제외한 나머지 측면에서만 운명에 대하여 고찰한다면 얘기가 달라질 수도 있다. 다시 말해 늙음과 죽음을 제외하고 보면 누군가에게는 살아생전 운명이 이롭기만 할 수도 있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반대로 해롭기만 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고전 본문 [나]에 개진된 운명론에 기초하면 “운명이 이로운가, 해로운가?”라는 물음은 무의미해진다. 저 옛날 하나라, 상나라, 주나라가 교체되던 시절을 보면, 하나라의 마지막 천자인 걸왕이 폭정을 자행하고 있을 때나 그를 축출하고 상나라를 건국한 성군 탕왕이 치세를 일궈냈을 때는 기본적으로 같은 시절이었다. 상나라의 마지막 천자인 주왕이 폭정을 자행하고 있을 때나 그를 축출하고 주나라를 천자의 나라로 거듭나게 한 무왕이 치세를 일궈냈을 때도 기본적으로 같은 시절이었다. 한 사람은 폭정을 행하고 한 사람은 인정(人政, 어진 정치)을 베풀었는데, 이 둘이 그렇게 행했던 시대 환경은 기본적으로 동일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한 사람은 폭정을 자행하고, 다른 한 사람은 인정을 베풀 수 있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사람이 어떻게 행위 하는지에 달려 있지, 운명이 그렇게 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 아니라는 얘기다. 따라서 이러한 관점에 서면 내 삶을 이롭게 하는 것도, 해롭게 하는 것도 다 내 노력 여하에 달려 있는 문제이지 운명이 그렇게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게 된다.
그런데 과연 내 삶의 잘삶과 못삶, 부유함과 빈곤함, 출세함과 그렇지 않음, 장수함과 그렇지 않음 등이 내 노력의 결과이기만 할까? 사람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 사회를 이루고 사는 한, 나 한 사람의 힘으로 성취할 수 있는 바가 있고 그렇지 못한 바도 있게 마련이다. 나아가 나는 열심히 노력하였음에도 사회 차원의 여러 요인으로 인하여 들인 노력의 대가를 제대로 돌려받지 못하는 일도 다반사다. [나]에 표방된 관점으로는 온전히 답변할 수 없는 바들이다.
키워드
노력, 숙명,안념, 운명, 운명 개척론,운명 부정론,인력, 천명
전후맥락
「力命」 편은 천명과 인력의 모순관계를 제재로 한 글들로 구성되어 있다. 천명 자체에는 시비 판단이나 공의(公義) 실현 같은 의지가 없음에도, 사람들은 대대로 장수와 요절, 부유함과 빈곤함, 사회적 지위의 높고 낮음, 잘삶과 못삶 등은 천명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믿어왔다. 역사적으로 또 현실적으로 늘 있어 왔던, 가령 악한 이는 부유하고 높은 자리에 오르며 천수를 누리는 반면 선한 이는 빈곤하고 미관말직을 전전하다가 요절하는 현상을 그 근거로 든다. 「力命」 편에는 이러한 인식이 드러나 있는 고사들이 실려 있으며, 이들을 통해 천명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가 설파되어 있다. 고전 본문은 그 가운데 한 편으로 제나라 군주인 경공이 향락을 즐기다가 죽을 운명을 피해가지 못함을 한탄하자, 현명한 재상이었던 안영이 그러한 관점의 오류를 지적하는 내용이다.
고전 본문 [나]는 묵자 「비명하(非命下)」 편에 실려 있는 글이다. 「비명하」 편은 ‘운명을 부정한다’는 뜻의 「비명」 편 상, 중, 하 중의 하나로 내용은 「비명」 상, 중 편과 대동소이하다. 운명론 내지 숙명론을 반대하는 입장이 피력되어 있다. 묵자는 기본적으로 성실한 노동과 근검절약을 통해 누구나 잘살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운명론, 숙명론 등을 부정했고, 인간의 노력을 강조했다.
고전본문
[가] 제나라 경공이 우산으로 놀러갔다가 북쪽으로 도성을 내려다보고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훌륭하구나, 도성이여! 이리도 번영하고 흥성했는데 이 도성을 떠나 죽을까봐 어찌나 불안하던지. 예부터 죽음이 없었다면 과인이 이곳을 떠나 어딘가로 갈 이유가 있었겠는가?” 이때 경공을 모시던 신하 사공과 양구거가 나아가 울면서 아뢨다. “신들은 군주의 은사에 힘입어 채소로만 만든 음식이나 나쁜 고기라도 먹을 수 있었고, 노둔한 말이 끄는 작은 수레라도 탈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저희도 죽지 않았으면 하는데 하물며 군주께서야 오죽하시겠습니까?” 이때 안영에 옆에서 홀로 웃었다. 경공이 눈물을 훔치고는 안영을 돌아보며 말했다. “오늘 유람 길은 너무나 슬퍼서 사공과 양귀비도 모두 나와 함께 울고 있는데 왜 혼자만 웃고 있소이까?” 안영이 대답하였다. “만약 현명한 분들로 늘 이 나라를 수호케 했다면 저 옛적의 강태공이나 환공께서 항상 이 나라를 지키셨을 것입니다. 만일 용감한 분들로 늘 이 나라를 수호케 했다면 옛적의 장공이나 영공께서 항상 이 나라를 지키셨을 것입니다. 만약 이런 분들께서 영원히 이 나라를 수호하셨다면 주군께서는 지금 도롱이 입고 삿갓 쓴 채로 논밭에서 그저 일만 하고 계실 터인데 어찌 죽음을 애석히 여길 틈이 있겠습니까? 아니 우리 군주께서 어찌 임금이 되실 수나 있었겠습니까? 그 분들이 차례차례 왕이 되고 또 차례차례 죽었기 때문에 군주의 차례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군주께서는 이 때문에 도리어 눈물을 흘리시는 이는 어질지도 의롭지도 않은 겁입니다. 오늘 저는 문득 어질지도 않고 의롭지도 않은 군주를 보게 되었고, 또 아첨하고 아양 떠는 대신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문득 이 두 부류의 사람을 보게 되자 외람되게도 혼자 웃게 되었던 것입니다.” 경공은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자 술잔을 들어 스스로에게 벌주를 내렸고 사공과 양구거에게도 벌주 두 잔씩을 내렸다.
[나] 옛날 하나라, 상나라, 주나라의 성왕인 우, 탕, 문, 무 같은 임금들은 천하를 대상으로 정치할 적에 반드시 힘써 효자를 표창하여 백성들에게 부모를 섬길 것을 권하였고, 현명하고 훌륭한 사람을 높여 주어 백성들에게 착한 일을 하라고 가르쳤다. 그래서 정사를 펼쳐내고 교화를 폄에 착한 사람은 상주고 포악한 자들은 처벌하였다. 장차 이와 같이 하면 천하의 혼란은 틀림없이 다스려지고, 사직의 위태로움은 반드시 안정시키게 될 것이다. 그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가? 옛날 폭군 걸왕이 어지럽혀 놓은 것을 성군 탕왕이 다스렸고, 폭군 주왕이 어지럽혀 놓은 것을 성군 무왕이 다스렸다. 걸왕과 탕왕은 세상도 그대로이고 백성도 바뀌지 않았지만 군주가 정사를 바꾸자 백성들도 습속을 바꾸었던 것이다. 주왕과 문왕 또한 마찬가지다. 폭군인 걸왕과 주왕에게 맡겨져 있을 적에는 천하가 어지러웠지만 성군인 탕왕과 무왕에게 맡겨지니 같은 천하임에도 천하가 다스려졌던 것이다. 천하가 다스려진 것은 성군인 탕왕과 무왕의 능력이었고, 천하가 어지러웠던 것은 폭군인 걸왕과 주왕의 죄였던 것이다. 그대가 이로써 본다면 천하의 안녕과 위태로움, 다스려짐과 혼란해짐은 군주가 정사를 펼침에 달려 있는 것이니, 어찌 운명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옛적의 성군 우, 탕, 문, 무 같은 임금들이 천하를 대상으로 정치할 적에는 반드시 굶주리는 사람들은 먹을 수 있게 해주고, 헐벗은 자들은 입을 수 있게 해주었으며, 수고로운 사람들은 쉬게 해주고 어지러운 자들은 다스려줌으로써 마침내 온 천하에서 영예와 칭송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어찌 그것을 운명이라 할 수가 있겠는가? 본시 그 임금들의 능력 덕분이었음이다. 지금 현명하고 훌륭한 사람들은 현명한 사람을 높여주고 실적을 내고 학문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므로 위로는 그의 임금이나 고위 관리의 상을 받고 아래로는 만백성들의 칭송을 받아, 마침내 온 천하에서 영예와 칭송을 받는다. 그런데 또 어찌 그것을 운명이라 하겠는가? 역시 그분들의 능력 덕분이었음이다.
[가] 齊景公游於牛山, 北臨其國城而流涕曰, “美哉國乎. 鬱鬱芊芊, 若何滴滴去此國而死乎. 使古無死者, 寡人將去斯而之何.” 史孔梁丘據皆從而泣曰, “臣賴君之賜, 疏食惡肉可得而食, 駑馬稜車可得而乘也, 且猶不欲死, 而況吾君乎.” 晏子獨笑於旁. 公雪涕而顧晏子曰, “寡人今日之游悲, 孔與據皆從寡人而泣, 子之獨笑, 何也.” 晏子對曰, “使賢者常守之, 則太公桓公將常守之矣. 使有勇者而常守之, 則莊公靈公將常守之矣. 數君者將守之, 吾君方將被蓑笠而立乎畎畝之中, 唯事之恤, 行假今死乎. 則吾君又安得此位而立焉. 以其迭處之迭去之, 至於君也, 而獨爲之流涕, 是不仁也. 見不仁之君, 見諂諛之臣. 臣見此二者, 臣之所爲獨竊笑也.” 景公慚焉, 擧觴自罰. 罰二臣者各二觴焉.
[나] 故昔者三代聖王禹湯文武方爲政乎天下之時, 曰必務擧孝子而勸之事親, 尊賢良之人而敎之爲善. 是故出政施敎, 賞善罰暴. 且以爲若此, 則天下之亂也, 將屬可得而治也, 社稷之危也, 將屬可得而定也. 若以爲不然, 昔桀之所亂, 湯治之, 紂之所亂, 武王治之. 當此之時, 世不渝而民不易, 上變政而民改俗. 存乎桀紂而天下亂, 存乎湯武而天下治. 天下之治也, 湯武之力也, 天下之亂也, 桀紂之罪也. 若以此觀之, 夫安危治亂存乎上之爲政也, 則夫豈可謂有命哉. 故昔者禹湯文武方爲政乎天下之時, 曰必使飢者得食, 寒者得衣, 勞者得息, 亂者得治, 遂得光譽令問於天下. 夫豈可以爲命哉. 故以爲其力也. 今賢良之人, 尊賢而好功道術, 故上得其王公大人之賞, 下得其萬民之譽, 遂得光譽令問於天下. 亦豈以爲其命哉. 又以爲力也.
[출전]『열자, 묵자』
토론하기
(1) 고전 본문 [가]에서 안영은 운명이 어떠한 역할을 한다고 보았는가? 이를 토대로 안영이 운명에 대해 어떠한 관점을 지녔는지에 대하여 이야기해보자.
(2) 고전 본문 [나]에서 운명론을 비판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리고 이러한 관점의 장점과 단점에 대해 논의해보고, 이러한 관점에 기초하여 고전 본문 [가]의 제나라 경공과 안영의 운명에 대한 관점을 비판적으로 검토해보자.
(3) 운명론에 대한 본인의 생각을 이야기해보고 21세기 첨단 디지털 문명 사회에서 운명이 지날 수 있는 의미에 대하여 토의해보자.
해설읽기
고전 본문 [가]는 우리에게 운명이 이로운 것인지 아니면 해로운 것인지라는 물음을 던진다. 제나라 군주인 경공은 좋은 시절에 신하들과 좋은 곳으로 나들이를 나가 즐겁고 기꺼운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연로하였음을 느끼고는 서글퍼한다.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운명만 없었더라면 이 즐거움을 영원히 지속할 수 있을 텐데 하며 크게 아쉬워한다. 주변의, 언제 어디서든 있게 마련인 함량 미달의 신하들이 맞장구를 쳐대며, 보잘 것 없는 자신들도 닥쳐오는 죽을 운명이 야속한데 군주께서는 얼마나 더 야속하겠냐며 경공을 위로한다.
그때 안영이라는 신하가 빙긋이 웃었다. 그는 800여 년 동안 지속된 제나라 역사 속 수없이 많았던 재상 중에 관중이라는 재상과 함께 ‘top 2’로 꼽히는 명재상이었다. 평소에도 군주인 경공은 그를 늘 경계하고 있었다. 워낙 뛰어난 인품과 지혜의 소유자였기에 신하라고 하여 함부로 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경공은 아양 떠는 신하들에 싸여 있다가 문득 안영의 반응을 살폈다. 그랬더니 같이 나들이 간 신하들 모두가 나라가 망하기라도 한 듯이 슬퍼하고 있는 통에 유독 안영만 미소 짓고 있었다. 경공이 그 까닭을 안 물을 수 없었다. 그러자 안영은 경공이 야속하다고 탓한 그 운명을 다시 소환해냈다. 그러고는 바로 그 운명이 경공의 선대 군주 중 무척 탁월했던 군주들조차도 다 죽음을 맞이하게 해준 덕분에 경공 당신이 군주가 될 수 있었고, 오늘과 같은 호사도 즐길 수 있었음을 환기했다. 만약 운명이 그러한 훌륭한 군주들을 비껴갔다면, 그래서 그 뛰어난 군주들이 죽지 않고 살아 있다면 지금 경공 당신은 군주는커녕 뙤약볕을 맡으며 논밭에서 노동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일깨웠다. 은연중에 경공의 함량 부족함을 풍자한 것이다.
경공과 안영 사이의 이 일화는 운명의 양면성을 환기해준다. 운명은 결코 단일하지 않은 복합적 존재라는 뜻이다. 운명은 누군가를 부귀한 환경에서 태어나게 해주었다고 하여, 또 생애 내내 별다른 노력 없이도 잘살게 해주었다고 하여 그를 늙음이나 죽음 등으로부터 제외하지 않는다. 누구나 맞이할 수밖에 없는 늙음, 죽음이라고 해도 그에 대한 불안이나 공포 등이 가진 자와 없는 자에게 동일하게 작동되는 것은 아니다. 없는 자보다는 가진 자가 죽음에 대해 지니는 불안, 공포가 상대적으로 더욱 크고 깊을 수 있다. 이런 가능성을 감안하면 운명은 적어도 양면성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 물론 가진 자이든 없는 자이든 누구에게나 늙음, 죽음은 동일하게 일어나는 것이니 만큼 늙음, 죽음을 제외한 나머지 측면에서만 운명에 대하여 고찰한다면 얘기가 달라질 수도 있다. 다시 말해 늙음과 죽음을 제외하고 보면 누군가에게는 살아생전 운명이 이롭기만 할 수도 있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반대로 해롭기만 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고전 본문 [나]에 개진된 운명론에 기초하면 “운명이 이로운가, 해로운가?”라는 물음은 무의미해진다. 저 옛날 하나라, 상나라, 주나라가 교체되던 시절을 보면, 하나라의 마지막 천자인 걸왕이 폭정을 자행하고 있을 때나 그를 축출하고 상나라를 건국한 성군 탕왕이 치세를 일궈냈을 때는 기본적으로 같은 시절이었다. 상나라의 마지막 천자인 주왕이 폭정을 자행하고 있을 때나 그를 축출하고 주나라를 천자의 나라로 거듭나게 한 무왕이 치세를 일궈냈을 때도 기본적으로 같은 시절이었다. 한 사람은 폭정을 행하고 한 사람은 인정(人政, 어진 정치)을 베풀었는데, 이 둘이 그렇게 행했던 시대 환경은 기본적으로 동일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한 사람은 폭정을 자행하고, 다른 한 사람은 인정을 베풀 수 있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사람이 어떻게 행위 하는지에 달려 있지, 운명이 그렇게 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 아니라는 얘기다. 따라서 이러한 관점에 서면 내 삶을 이롭게 하는 것도, 해롭게 하는 것도 다 내 노력 여하에 달려 있는 문제이지 운명이 그렇게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게 된다.
그런데 과연 내 삶의 잘삶과 못삶, 부유함과 빈곤함, 출세함과 그렇지 않음, 장수함과 그렇지 않음 등이 내 노력의 결과이기만 할까? 사람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 사회를 이루고 사는 한, 나 한 사람의 힘으로 성취할 수 있는 바가 있고 그렇지 못한 바도 있게 마련이다. 나아가 나는 열심히 노력하였음에도 사회 차원의 여러 요인으로 인하여 들인 노력의 대가를 제대로 돌려받지 못하는 일도 다반사다. [나]에 표방된 관점으로는 온전히 답변할 수 없는 바들이다.
키워드
노력, 숙명,안념, 운명, 운명 개척론,운명 부정론,인력, 천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