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맥락
고전 본문 [가]와 [나]는 모두 「우언」 편에 수록되어 있다. 우언은 ‘기탁한 말’이라는 뜻으로, 말하고 하는 바를 직설적으로 밝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건이나 현상, 이야기 등에 빗대어 말하는 유형의 글이다. 우리에게는 ‘우화’라는 말로 더 널리 알려진 글의 유형이다. 「우언」 편에는 모두 6가지의 우언이 실려 있는데 [가]는 그중 두 번째 우언으로 전문을 인용하였고, [나]는 네 번째 우언의 전반부이다. 후반부에서는 죽음에 대한 장자의 관점이 서술되어 있는데, 이 셀의 주제와 거리가 멀어 여기서는 전반부만 실었다.
고전본문
[가] 장자가 혜자에게 말하였다. “공자는 나이 예순 살에 이르기까지 예순 번이나 사고방식이 변화하였다네. 처음에 옳다고 하던 것을 끝에 가서는 부정한 것일세. 오늘 옳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오십 구 년 동안 부정하던 일이 아닌 것이 거의 없네.” 혜자가 말하였다. “공자는 그의 뜻을 성실히 하고 지혜로써 일하였기 때문이지.” 장자가 말하였다. “공자는 뜻이나 지혜를 버렸네. 그는 시비를 논한 일이 없었네. 공자는 말하기를, ‘자연의 위대한 근본으로부터 재질을 물려받고, 자연의 신령한 기운을 품고 살아가면, 울어대도 법도에 들어맞고 말하여도 법칙에 들어맞는다. 이익과 정의를 자기 앞에 늘어놓고서 좋으니 나쁘니, 옳으니 그르니 하며 따지는 것은 오직 사람의 입을 수고롭게 하는 것일 따름이다. 사람들로 마음으로 자연의 섭리에 복종하게끔 하여 감히 거슬러 맞서지 않도록 하고, 천하의 편안한 쉼 속에서 같이 쉬게 한다’고 하였네. 되었네, 되었네! 나는 아직 공자에게 미칠 수가 없을 것만 같네.”
[나] 안성자유가 스승인 동곽자기에게 말했다. “제가 선생님의 말씀을 들은 뒤로 1년 만에 인위적으로 꾸미지 않게 되었고 2년 만에 만물의 이치를 따르게 되었으며, 3년 만에 만물의 이치를 깨닫게 되었고 4년 만에 만물과 함께할 수 있었으며, 5년 만에 만물이 제게로 와서 함께하였고 6년 만에 신령처럼 만사만물의 이치를 깨달은 경지에 이르렀으며, 7년 만에는 천지자연과 합치되었고 8년 만에는 죽음도 모르고 삶도 모르게 되었으며, 9년 만에는 위대한 오묘함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가] 莊子謂惠子曰, “孔子行年六十而六十化, 始時所是, 卒而非之, 未知今之所謂是之非五十九非也.” 惠子曰, “孔子勤志服知也.” 莊子曰, “孔子謝之矣, 而其未之嘗言. 孔子云, ‘夫受才乎大本, 復靈以生, 鳴而當律, 言而當法, 利義陳乎前, 而好惡是非直服人之口而已矣. 使人乃以心服, 而不敢蘁立, 定天下之定.’ 已乎已乎, 吾且不得及彼乎.”
[나] 顔成子游謂東郭子綦曰, “自吾聞子之言, 一年而野, 二年而從, 三年而通, 四年而物, 五年而來, 六年而鬼入, 七年而天成, 八年而不知死不知生, 九年而大妙.”
[출전]『장자』
토론하기
(1) 60년 동안 60번 생각을 바꾼 공자에 대하여 혜자와 장자는 각기 다른 이유로 긍정한다. 또한 [나]의 안성자유가 스승에게 자신의 앎이 매년 진보했다고 한 말도 그러한 공자에 대한 긍정의 근거가 될 수 있다. 이 세 명이 그러한 공자를 긍정한 근거가 무엇이었는지를 짚어보자.
(2) 60년 동안 60번 생각을 바꾼 공자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긍정이든 부정이든 각각 근거를 대면서 서로의 견해를 교환해보자.
(3) 자신의 앎을 진보시켜 간 경험이 있다면 어떤 방식으로 지식을 진보시켜 갔는지에 대하여 이야기해보자. 또한 자신이 경험해보지 않았어도 앎을 진보시켜 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의논해보자.
해설읽기
고전 본문 [가]는 『장자』, 「칙양」 편에는 거백옥(蘧伯玉)이라는 현자의 이야기로 나온다. 등장인물만 다르고 내용은 동일하다. 공자와 장자는 각각 유가와 도가를 대표하는 학자이다. 그럼에도『장자』에는 공자를 주인공으로 하는 이야기가 제법 실려 있다.
이는 장자가 자신의 학설과 가장 반대되는 학설을 펼친 공자를 등장시킨 다음, 공자로 하여금 도가의 학설을 펼쳐내게 함으로써 도가의 학설이 옳고 유가의 학설이 그름을 환기하고자 한 고도의 수사법을 구사한 결과이다. 예컨대 이러한 식이다. [가]를 보면 장자가 공자로부터 들었다는 공자의 말을 인용한 후 자신은 공자보다 한참 못하다고 탄식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장자가 자신이 공자보다 한 수 아래임을 인정하는 근거는 공자가 한 말인데, 그 말의 내용은 전혀 유가적이지 않고 철저하게 도가적이다. 결국 공자로 도가 학설을 말하게 하고 그러한 공자가 자신보다 훨씬 낫다고 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도가의 학설이 유가의 학설보다 훨씬 우월하다고 주장한 것이다.
공자의 입을 통해 펼쳐낸 도가 학설의 내용은 이러하다. 공자는 예순이 될 때까지 예순 번이나 자신의 사고를 바꿨다. 그 모두 처음에는 옳다고 생각하던 것들이 끝에 가서는 잘못됐음을 인정하고 바꾼 것이다. 이를 두고 혜자는 “공자는 그의 뜻을 성실히 하고 지혜로써 일하였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분석했다. 그런데 장자의 생각은 달랐다. 장자가 보기에 공자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까닭은 이러했다. 첫째는 공자는 자신의 뜻과 지혜를 버렸다는 점이다. 여기서 ‘자신의 뜻과 지혜’라는 것은 인간으로서 지니게 된 인간의 것, 그러니까 인위적인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자신의 뜻과 지혜를 버린 덕분에 공자는 시비를 따질 일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혜자의 분석은 잘못됐다는 것이다. 둘째, 공자는 ‘자연의 위대한 근본’을 자신의 근본으로 삼았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자연의 섭리를 자기 삶의, 일상의 근본으로 삼았다는 얘기다. 또한 공자는 ‘자연의 신령한 기운’을 품고 살아갔다. 모든 인위적인 것을 다 내려놓고 오로지 자연의 섭리와 기운에 의지하여 살았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울 일이 있어 울어도 그 소리가 자연의 법도에 절로 들어맞게 된다. 새는 어떤 법칙에 의거하여 울어대는 것이 아님에도 새 소리를 들으면 아름다움을 느끼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또한 말을 하면 허튼 내용이 없어 언제 어디서 말하든 늘 자연의 법칙에 딱 들어맞는다. 견리사의(見利思義), 그러니까 “이익을 보면 정의를 생각하라”는 윤리처럼 유가는 이익과 정의를 대립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나이 예순에 생각을 예순 번 바꾼 공자는 이익과 정의에 대하여 ‘좋다-나쁘다’라든지 ‘옳다-그르다’의 구도에 입각하여 판단하지 않는다. 그러한 판단의 근거는 어디까지나 인위적인 기준에 의거한 것일 뿐 위대한 자연의 근본과는 무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공자는 자신만 그렇게 생각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자신처럼 살아가게 하고자 한다. 자연의 섭리에 진정으로 따르게 하고 그것에 맞서지 않게 하며, 인위적 욕망 따위를 좇느라 수고하고 지친 삶이 아니라 자연을 닮은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살게 하고자 한다.
장자가 보기에 공자가 나이 예순에 예순 번 생각을 바꾼 것은 바로 이러한 경지로 나아가기 위한 과정의 연속이었다. 인위적 기준에 의하여 ‘옳다-그르다’, ‘좋다-나쁘다’는 판단을 내린 후 옳고 좋은 쪽에 의거하여 살았는데,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것이 반드시 옳고 좋은 것만이 아님을 깨닫고는 기존의 자기 생각을 부정한다. 그런 후 또 다른 인위적인 판단 기준에 의거하여 옳고 좋다고 판단하는 생각을 품고 살다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또 다시 이를 부정하게 된다. 이러한 일이 반복되면서 공자는 결국 문제는 인위적 판단 기준에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럼으로써 자연의 섭리와 기운에 의거한 삶의 경지에 접어들 수 있었다. 고전 본문 [나]의 안성자유 이야기는 그렇게 자연의 섭리와 기운에 의거한 삶을 살아가면서 자신의 앎이 어떻게 진보하여 갔는지에 대한 증언이다.
[가]의 공자처럼, [나]의 안성자유처럼 사는 것이 참되다는 얘기를 함이 아니다. 이상적인 삶에 대한 생각은 저마다 다르고, 그 중 어느 하나만이 정답인 것은 결코 아니다. 유가 학설에 근거한 삶도 나름의 의미 있고 또 좋음이 있을 수 있고, 도가 학설에 근거한 삶도 나름의 의미와 좋음이 있을 수 있다. 절대적으로 옳고 좋은 삶이라는 것은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가]와 [나]에서 주목할 것은 어떠한 삶이 좋고 옳으냐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옳고 좋다는 것을 향해 나아가는 지적 여정이다. 지금 내가 옳다고, 좋다고 판단하는 앎을 평생 지속해가는 것이 답이 아니라, 그것이 지니는 장점과 단점을 늘 다면적, 입체적으로 따져봄으로써 장점은 늘려가고 단점은 줄여나가거나 소거해가는 지적 여정에 주목해보자는 것이다. 공자나 장자가 살았던 당시 예순 살이면 엄청나게 장수한 축에 낀다. 그렇게 긴 세월을 사는 동안 공자는 끊임없이 자신의 사고를 문제 삼아 자신의 앎을 지속적으로 진보시켜 갔다. 앎은 물과 같아서 아무리 옳고 좋은 것일지라도 정지해 있으면, 다시 말해 고여 있으면 썩게 마련이다. 앎을 끊임없이 움직여 진보시켜 가야 하는 까닭이다.
키워드
도가적 앎, 앎, 예순 살, 지식의 진보, 진리,
전후맥락
고전 본문 [가]와 [나]는 모두 「우언」 편에 수록되어 있다. 우언은 ‘기탁한 말’이라는 뜻으로, 말하고 하는 바를 직설적으로 밝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건이나 현상, 이야기 등에 빗대어 말하는 유형의 글이다. 우리에게는 ‘우화’라는 말로 더 널리 알려진 글의 유형이다. 「우언」 편에는 모두 6가지의 우언이 실려 있는데 [가]는 그중 두 번째 우언으로 전문을 인용하였고, [나]는 네 번째 우언의 전반부이다. 후반부에서는 죽음에 대한 장자의 관점이 서술되어 있는데, 이 셀의 주제와 거리가 멀어 여기서는 전반부만 실었다.
고전본문
[가] 장자가 혜자에게 말하였다. “공자는 나이 예순 살에 이르기까지 예순 번이나 사고방식이 변화하였다네. 처음에 옳다고 하던 것을 끝에 가서는 부정한 것일세. 오늘 옳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오십 구 년 동안 부정하던 일이 아닌 것이 거의 없네.” 혜자가 말하였다. “공자는 그의 뜻을 성실히 하고 지혜로써 일하였기 때문이지.” 장자가 말하였다. “공자는 뜻이나 지혜를 버렸네. 그는 시비를 논한 일이 없었네. 공자는 말하기를, ‘자연의 위대한 근본으로부터 재질을 물려받고, 자연의 신령한 기운을 품고 살아가면, 울어대도 법도에 들어맞고 말하여도 법칙에 들어맞는다. 이익과 정의를 자기 앞에 늘어놓고서 좋으니 나쁘니, 옳으니 그르니 하며 따지는 것은 오직 사람의 입을 수고롭게 하는 것일 따름이다. 사람들로 마음으로 자연의 섭리에 복종하게끔 하여 감히 거슬러 맞서지 않도록 하고, 천하의 편안한 쉼 속에서 같이 쉬게 한다’고 하였네. 되었네, 되었네! 나는 아직 공자에게 미칠 수가 없을 것만 같네.”
[나] 안성자유가 스승인 동곽자기에게 말했다. “제가 선생님의 말씀을 들은 뒤로 1년 만에 인위적으로 꾸미지 않게 되었고 2년 만에 만물의 이치를 따르게 되었으며, 3년 만에 만물의 이치를 깨닫게 되었고 4년 만에 만물과 함께할 수 있었으며, 5년 만에 만물이 제게로 와서 함께하였고 6년 만에 신령처럼 만사만물의 이치를 깨달은 경지에 이르렀으며, 7년 만에는 천지자연과 합치되었고 8년 만에는 죽음도 모르고 삶도 모르게 되었으며, 9년 만에는 위대한 오묘함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가] 莊子謂惠子曰, “孔子行年六十而六十化, 始時所是, 卒而非之, 未知今之所謂是之非五十九非也.” 惠子曰, “孔子勤志服知也.” 莊子曰, “孔子謝之矣, 而其未之嘗言. 孔子云, ‘夫受才乎大本, 復靈以生, 鳴而當律, 言而當法, 利義陳乎前, 而好惡是非直服人之口而已矣. 使人乃以心服, 而不敢蘁立, 定天下之定.’ 已乎已乎, 吾且不得及彼乎.”
[나] 顔成子游謂東郭子綦曰, “自吾聞子之言, 一年而野, 二年而從, 三年而通, 四年而物, 五年而來, 六年而鬼入, 七年而天成, 八年而不知死不知生, 九年而大妙.”
[출전]『장자』
토론하기
(1) 60년 동안 60번 생각을 바꾼 공자에 대하여 혜자와 장자는 각기 다른 이유로 긍정한다. 또한 [나]의 안성자유가 스승에게 자신의 앎이 매년 진보했다고 한 말도 그러한 공자에 대한 긍정의 근거가 될 수 있다. 이 세 명이 그러한 공자를 긍정한 근거가 무엇이었는지를 짚어보자.
(2) 60년 동안 60번 생각을 바꾼 공자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긍정이든 부정이든 각각 근거를 대면서 서로의 견해를 교환해보자.
(3) 자신의 앎을 진보시켜 간 경험이 있다면 어떤 방식으로 지식을 진보시켜 갔는지에 대하여 이야기해보자. 또한 자신이 경험해보지 않았어도 앎을 진보시켜 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의논해보자.
해설읽기
고전 본문 [가]는 『장자』, 「칙양」 편에는 거백옥(蘧伯玉)이라는 현자의 이야기로 나온다. 등장인물만 다르고 내용은 동일하다. 공자와 장자는 각각 유가와 도가를 대표하는 학자이다. 그럼에도『장자』에는 공자를 주인공으로 하는 이야기가 제법 실려 있다.
이는 장자가 자신의 학설과 가장 반대되는 학설을 펼친 공자를 등장시킨 다음, 공자로 하여금 도가의 학설을 펼쳐내게 함으로써 도가의 학설이 옳고 유가의 학설이 그름을 환기하고자 한 고도의 수사법을 구사한 결과이다. 예컨대 이러한 식이다. [가]를 보면 장자가 공자로부터 들었다는 공자의 말을 인용한 후 자신은 공자보다 한참 못하다고 탄식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장자가 자신이 공자보다 한 수 아래임을 인정하는 근거는 공자가 한 말인데, 그 말의 내용은 전혀 유가적이지 않고 철저하게 도가적이다. 결국 공자로 도가 학설을 말하게 하고 그러한 공자가 자신보다 훨씬 낫다고 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도가의 학설이 유가의 학설보다 훨씬 우월하다고 주장한 것이다.
공자의 입을 통해 펼쳐낸 도가 학설의 내용은 이러하다. 공자는 예순이 될 때까지 예순 번이나 자신의 사고를 바꿨다. 그 모두 처음에는 옳다고 생각하던 것들이 끝에 가서는 잘못됐음을 인정하고 바꾼 것이다. 이를 두고 혜자는 “공자는 그의 뜻을 성실히 하고 지혜로써 일하였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분석했다. 그런데 장자의 생각은 달랐다. 장자가 보기에 공자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까닭은 이러했다. 첫째는 공자는 자신의 뜻과 지혜를 버렸다는 점이다. 여기서 ‘자신의 뜻과 지혜’라는 것은 인간으로서 지니게 된 인간의 것, 그러니까 인위적인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자신의 뜻과 지혜를 버린 덕분에 공자는 시비를 따질 일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혜자의 분석은 잘못됐다는 것이다. 둘째, 공자는 ‘자연의 위대한 근본’을 자신의 근본으로 삼았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자연의 섭리를 자기 삶의, 일상의 근본으로 삼았다는 얘기다. 또한 공자는 ‘자연의 신령한 기운’을 품고 살아갔다. 모든 인위적인 것을 다 내려놓고 오로지 자연의 섭리와 기운에 의지하여 살았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울 일이 있어 울어도 그 소리가 자연의 법도에 절로 들어맞게 된다. 새는 어떤 법칙에 의거하여 울어대는 것이 아님에도 새 소리를 들으면 아름다움을 느끼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또한 말을 하면 허튼 내용이 없어 언제 어디서 말하든 늘 자연의 법칙에 딱 들어맞는다. 견리사의(見利思義), 그러니까 “이익을 보면 정의를 생각하라”는 윤리처럼 유가는 이익과 정의를 대립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나이 예순에 생각을 예순 번 바꾼 공자는 이익과 정의에 대하여 ‘좋다-나쁘다’라든지 ‘옳다-그르다’의 구도에 입각하여 판단하지 않는다. 그러한 판단의 근거는 어디까지나 인위적인 기준에 의거한 것일 뿐 위대한 자연의 근본과는 무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공자는 자신만 그렇게 생각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자신처럼 살아가게 하고자 한다. 자연의 섭리에 진정으로 따르게 하고 그것에 맞서지 않게 하며, 인위적 욕망 따위를 좇느라 수고하고 지친 삶이 아니라 자연을 닮은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살게 하고자 한다.
장자가 보기에 공자가 나이 예순에 예순 번 생각을 바꾼 것은 바로 이러한 경지로 나아가기 위한 과정의 연속이었다. 인위적 기준에 의하여 ‘옳다-그르다’, ‘좋다-나쁘다’는 판단을 내린 후 옳고 좋은 쪽에 의거하여 살았는데,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것이 반드시 옳고 좋은 것만이 아님을 깨닫고는 기존의 자기 생각을 부정한다. 그런 후 또 다른 인위적인 판단 기준에 의거하여 옳고 좋다고 판단하는 생각을 품고 살다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또 다시 이를 부정하게 된다. 이러한 일이 반복되면서 공자는 결국 문제는 인위적 판단 기준에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럼으로써 자연의 섭리와 기운에 의거한 삶의 경지에 접어들 수 있었다. 고전 본문 [나]의 안성자유 이야기는 그렇게 자연의 섭리와 기운에 의거한 삶을 살아가면서 자신의 앎이 어떻게 진보하여 갔는지에 대한 증언이다.
[가]의 공자처럼, [나]의 안성자유처럼 사는 것이 참되다는 얘기를 함이 아니다. 이상적인 삶에 대한 생각은 저마다 다르고, 그 중 어느 하나만이 정답인 것은 결코 아니다. 유가 학설에 근거한 삶도 나름의 의미 있고 또 좋음이 있을 수 있고, 도가 학설에 근거한 삶도 나름의 의미와 좋음이 있을 수 있다. 절대적으로 옳고 좋은 삶이라는 것은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가]와 [나]에서 주목할 것은 어떠한 삶이 좋고 옳으냐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옳고 좋다는 것을 향해 나아가는 지적 여정이다. 지금 내가 옳다고, 좋다고 판단하는 앎을 평생 지속해가는 것이 답이 아니라, 그것이 지니는 장점과 단점을 늘 다면적, 입체적으로 따져봄으로써 장점은 늘려가고 단점은 줄여나가거나 소거해가는 지적 여정에 주목해보자는 것이다. 공자나 장자가 살았던 당시 예순 살이면 엄청나게 장수한 축에 낀다. 그렇게 긴 세월을 사는 동안 공자는 끊임없이 자신의 사고를 문제 삼아 자신의 앎을 지속적으로 진보시켜 갔다. 앎은 물과 같아서 아무리 옳고 좋은 것일지라도 정지해 있으면, 다시 말해 고여 있으면 썩게 마련이다. 앎을 끊임없이 움직여 진보시켜 가야 하는 까닭이다.
키워드
도가적 앎, 앎, 예순 살, 지식의 진보, 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