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맥락
정약용은 ‘기예론’이라는 제목으로 모두 세 편의 글을 썼다. 아래의 고전 본문은 그 중 세 번째 글의 전문이다. 정약용이 이 글을 쓸 즈음의 조선에서는 한족의 명나라를 멸하고 세워진 만주족의 청나라를 낮잡아 보는 풍조가 만연해 있었다. 이른바 ‘오랑캐’가 물리적 힘만 강해 중국을 강점한 것이니 이를 인정할 수 없다는 목소리가 지배층인 유학자 사이에서 강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여기에는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가 대군을 파견하여 조선을 도왔으니 그에 대하여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관념과 명나라가 멸망한 만큼 중화는 우리 조선에게로 옮겨 왔다는 ‘소중화’ 의식 등이 결합되어 있었다. 청나라를 낮잡아보는 풍조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당시 오랑캐라며 멸시했던 청나라의 문물 발달 수준은 조선의 수준을 많이 넘어서 있었다. 이를 알고 있었던 정약용이었던지라 우리보다 나은 문명이라면 설령 그들이 오랑캐라고 할지라도 기꺼이 배우고 익힐 줄 알아야 한다며 배움에서의 열린 정신과 자세를 강조했다.
고전본문
옛날에 중국 송나라 사람 소식이 서적을 고려에게 하사하지도 말고 또한 구입하는 것도 금할 것을 청하면서 “오랑캐가 책을 읽어 지혜와 사고를 키울 것입니다”라고 말했으니, 어찌 그리도 마음이 좁고 은혜가 각박했던가! 다만 그렇게 좁고 각박했음에도 이 논의는 당시 중국에서 시행되었다. 경전 관련 서적도 또한 보여주지 않으려 하였는데 하물며 고려가 기예와 제반 기능을 배워 자기 나라를 강하게 하도록 했겠는가?
옛날에는 중국 바깥의 오랑캐들이 자제들을 중국에 보내어 학교에 입학시킨 경우가 무척 많았다. 근자에는 유구국 사람이 중국의 태학에 10년 동안이나 있으면서 그 문물과 기능을 배우기에 전념하였다. 『지봉집』지봉집(芝峯集)에 의하면, 일본 사람 역시 중국의 강소성과 절강성을 왕래하면서 뭇 장인의 섬세하고 정교한 기술을 배워오는 데 오로지 힘썼다. 그래서 유구국과 일본은 바다 가운데 멀리 떨어진 지역임에도 그 기능은 중국과 대등하게 되었고, 그 백성들은 부유하고 군대는 강력하여 이웃 나라에서 감히 침략하는 자들이 없었으니, 진작부터 그렇게 한 효과가 이와 같았다.
마침 지금은 중국의 규칙이 트여 있어 속 좁거나 비루하지 않다. 이 시기를 버려두고 도모하지 않다가 만일 하루아침에 소식 같은 자가 나와 의견을 상주하여 중국과 주변 오랑캐 사이의 경계를 엄격하게 하여 오가는 것을 금지하는 명령을 시행한다면, 아무리 예물을 받들고 가져가서 아주 하찮은 것이라도 얻기를 바란다고 해도 어찌 그 뜻을 이룰 수 있겠는가.
무릇 효도와 우애는 천성에 뿌리를 두었고 성현의 글에 밝혀졌으니, 진실로 이를 넓혀서 충실하게 하고 닦아서 밝힌다면 곧 예의에 합당한 풍속을 이루게 될 것이다. 이는 진실로 바깥 세계에 기댈 필요가 없는 것이요, 또한 후세에 생겨나는 것에 힘입을 필요도 없다. 그러나 저 생활을 편리하게 하고 윤택하게 하는 데 필요한 것들과 장인들의 온갖 기예의 기능은 후세에 출현한 방법을 가서 배우지 않는다면 그 몽매하고 고루함을 타파하여 이로움과 혜택을 흥성케 할 수 없게 된다. 이는 국가를 경영하는 사람들이라면 마땅히 강구해야 할 바이다.
昔蘇軾請勿以經籍賜高麗, 竝禁其購求, 謂夷狄讀書, 長其智慮也, 何其狹隘而少恩哉. 雖然此論則以時得行於中國也. 經籍且不欲相示, 況使之學技藝諸能, 以彊其國哉. 古者外夷遣子弟入學者甚多. 近世琉球人處太學十年, 專學其文物技能. 芝峰集日本往來江浙, 唯務移百工纖巧. 故琉球日本在海中絶域, 而其技能與中國抗, 民裕而兵強, 鄰國莫敢侵擾, 其已然之效如是也. 適今規模疏豁不狹陋. 捨此不圖, 若一朝有如蘇軾者建言, 嚴華夷之界, 申禁遏之令, 則雖欲執贄奉幣, 冀得其咳唾之餘, 尙安能遂其志哉. 夫孝弟根於天性, 明於聖賢之書, 苟擴而充之, 修而明之, 斯禮義成俗. 此固無待乎外, 亦無藉乎後出者. 若夫利用厚生之所須, 百工技藝之能不往求其後出之制, 則未有能破蒙陋而興利澤者也. 此謀國者所宜講也.
[출전] 정약용,『기예론』
토론하기
(1) 정약용은 고전 본문에서 송나라의 소식이 고려에 대하여 지니고 있었던 태도와 당시 조선의 기능 학습 풍토에 대하여 비판하였다. 그 비판 내용을 정리해보고 그러한 비판이 왜 타당한지에 대하여 의견을 교환해보자.
(2) 중국은 왜 자신의 문물이 주변에 전파되는 것을 막고자 했던 것일까? 그 이유를 고전 본문에서 찾아보고, 그러한 이유가 현대 세계에서도 여전히 유효한지를 따져보자.
(3) 앎을 증진시키기 위해 꼭 지식이 진보된 곳으로 유학을 가야 할까? 만약 유학을 가지 않고서도 앎을 증진시킬 수 있다면 어떤 방법이 가능할까?
해설읽기
1644년 한족의 왕조인 명나라가 망하고 만주 일대를 근거지로 삼고 있던 만주족이 수도 북경을 점령하고는 청나라를 세웠다. 그러자 조선에서는 오랑캐인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를 황제의 나라로 섬길 수 없다는 의식이 팽배해졌다. 조선은 성리학의 나라였는데, 성리학은 유학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중화주의적 성향을 띠고 있었다. 곧 중국 문명만이 세계 유일의 표준적 문명이고 가장 수준 높은 문명이며, 중국 주변은 문명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거나, 있다고 하더라도 그 수준이 중국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낮다고 믿었다. 한마디로 중국만이 유일한 문명세계이고 최고의 문명을 누리고 있다는 관념이었다.
선비라고 불리던 조선의 지식인들은 이러한 중화주의를 내면화하고 있었다. 그들은 조선은 중국문명의 정화를 온전히 익힌 중국에 버금가는 ‘작은 중화’, 곧 소중화의 나라이므로, 만주 일대의 유목민이나 일본, 유구 등과는 질적으로 다르다고 여겼다. 그래서 중국을 황제의 나라로 섬기면서 주변 나라나 민족들을 오랑캐로 낮잡아보았다. 그러던 참에 만주 일대의 유목민이었던 여진족이 세력을 키우고는 이름을 만주족으로 바꾼 후 중국마저 점령하는 일이 벌어지자 조선의 선비들은 발칵 뒤집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더니 오랑캐 출신인 청나라를 인정할 수 없다고 하면서 그들을 멸시했고, 멸망한 명나라를 이어 중화가 조선으로 옮겨졌다며 조선이 중화임을 자처하였다. 한편 청나라는 중국을 점령한 후 강희제, 건륭제와 같은 뛰어난 황제가 거듭 나오면서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정치가 안정되었고 경제가 크게 발달하였으며 영토가 대대적으로 확장되었다. 이러한 발달에 힘입어 문화와 문물도 전에 없이 크게 발달하였다. 한자권뿐 아니라 당시 지구상의 어느 지역, 나라와 견주어도 못할 것 없는, 아니 더욱 선진적인 문화와 문물을 구현하고 있었다.
정약용 등의 실학자들은 이러한 청나라의 실상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실학자들은 실용주의적 성향을 띠고 있었다. 이에 ‘북학파’라고 불렸던 박지원, 박제가와 같은 학자에 의해 청나라에 대한 멸시의 눈길을 거두고 그들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적극적으로 배우자는 목소리가 제기되었다. 정약용은 북학파에 속하는 실학자는 아니었지만, 그 또한 실용주의적 성향을 띠고 있었기에 조선이 발전하는 데 필요하다면 청나라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배워야 한다는 입장에 서 있었다. 고전 본문은 정약용이 자신의 이러한 입장을 체계적으로 제시한 글 가운데 하나이다.
정약용은 먼저 선진 지식과 기예를 익히는 일이 우리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역사의 사례를 들어 강조한다. 고려시대 당시 세상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지식과 기예를 보유하고 있던 나라는 송나라였는데, 이들이 자신의 선진 문물이 고려로 흘러들어가고, 고려가 이를 익혀 강하게 되는 것을 우려하여 자신들의 문물이 외부로 유출되지 못하도록 통제하였다. 지금으로 치면 첨단 과학기술 같은 것이 외국으로 유출되지 못하도록 통제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조치를 취했던 것이다. 정약용은 이러한 역사에서 볼 수 있듯이 선진 문물을 배우고 익힌다는 것은 우리가 뜻한다고 하여 다 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런데 정약용 당시의 중국, 그러니까 청나라는 송나라처럼 속 좁지 않아서 자신들의 선진 문물을 외국이 배우고 익히는 것을 금지하지 않았다. 그래서 일본이나 유구국은 일찍부터 청나라에 가서 그들의 선진 문물을 열심히 익히고 배웠다. 그 결과 유구국과 일본은 기예 수준이 중국과 대등하게 되었고 그 백성들은 부유하고 군대는 강력하여 이웃 나라에서 감히 침략하는 자들이 없는 경지에 이를 수 있었다. 조선의 선비들이 청나라를 오랑캐로 여겼듯이 오랑캐로 여기며 멸시했던 일본과 유구국의 문물 수준이 조선보다 나아졌다는 것이다.
결국 정약용이 보기에 조선은 중화주의라는 교조적 관념에 입각하여 청나라나 일본, 유구국을 오랑캐라 무시하고 자신을 높게 평가하는 정신적 승리를 거둘 수는 있었지만, 현실에서는 또 실질적으로는 그렇게 무시하는 오랑캐들이 자신들보다 훨씬 나은 수준을 구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정약용의 이러한 이야기를 뒤집으면 조선은 중화주의라는 교조적 관념에 매몰되어 자신들이 오랑캐라고 무시하던 나라들보다 퇴보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정약용은 일본이나 유구국처럼 청나라에 가서 선진 문물을 열심히 배우고 익힘으로써 퇴보되었고, 앞으로 더 퇴보될 수밖에 없는 조선의 문물 수준을 일신시키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기예나 기술 같은 문물만 선진적인 것을 접하면서 열심히 배우고 익혀야 하는 것이 아니다. 앎도 마찬가지다. 끊임없이 일신시켜 가야 비로소 앎이 퇴보하지 않게 된다. 자신이 지닌 앎이 아무리 확실하고 정확하며 참되다고 해도, 자신을 둘러싼 사회가, 세상이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앎도 지속적으로 업그레이드 해야만 한다. 고전 본문에서 정약용이 설파한 바는 국가 차원에서만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개인 차원에서도 크게 의미 있는 바이다.
키워드
기술, 기예, 선진 문물, 앎, 앎의 진보, 유학
전후맥락
정약용은 ‘기예론’이라는 제목으로 모두 세 편의 글을 썼다. 아래의 고전 본문은 그 중 세 번째 글의 전문이다. 정약용이 이 글을 쓸 즈음의 조선에서는 한족의 명나라를 멸하고 세워진 만주족의 청나라를 낮잡아 보는 풍조가 만연해 있었다. 이른바 ‘오랑캐’가 물리적 힘만 강해 중국을 강점한 것이니 이를 인정할 수 없다는 목소리가 지배층인 유학자 사이에서 강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여기에는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가 대군을 파견하여 조선을 도왔으니 그에 대하여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관념과 명나라가 멸망한 만큼 중화는 우리 조선에게로 옮겨 왔다는 ‘소중화’ 의식 등이 결합되어 있었다. 청나라를 낮잡아보는 풍조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당시 오랑캐라며 멸시했던 청나라의 문물 발달 수준은 조선의 수준을 많이 넘어서 있었다. 이를 알고 있었던 정약용이었던지라 우리보다 나은 문명이라면 설령 그들이 오랑캐라고 할지라도 기꺼이 배우고 익힐 줄 알아야 한다며 배움에서의 열린 정신과 자세를 강조했다.
고전본문
옛날에 중국 송나라 사람 소식이 서적을 고려에게 하사하지도 말고 또한 구입하는 것도 금할 것을 청하면서 “오랑캐가 책을 읽어 지혜와 사고를 키울 것입니다”라고 말했으니, 어찌 그리도 마음이 좁고 은혜가 각박했던가! 다만 그렇게 좁고 각박했음에도 이 논의는 당시 중국에서 시행되었다. 경전 관련 서적도 또한 보여주지 않으려 하였는데 하물며 고려가 기예와 제반 기능을 배워 자기 나라를 강하게 하도록 했겠는가?
옛날에는 중국 바깥의 오랑캐들이 자제들을 중국에 보내어 학교에 입학시킨 경우가 무척 많았다. 근자에는 유구국 사람이 중국의 태학에 10년 동안이나 있으면서 그 문물과 기능을 배우기에 전념하였다. 『지봉집』지봉집(芝峯集)에 의하면, 일본 사람 역시 중국의 강소성과 절강성을 왕래하면서 뭇 장인의 섬세하고 정교한 기술을 배워오는 데 오로지 힘썼다. 그래서 유구국과 일본은 바다 가운데 멀리 떨어진 지역임에도 그 기능은 중국과 대등하게 되었고, 그 백성들은 부유하고 군대는 강력하여 이웃 나라에서 감히 침략하는 자들이 없었으니, 진작부터 그렇게 한 효과가 이와 같았다.
마침 지금은 중국의 규칙이 트여 있어 속 좁거나 비루하지 않다. 이 시기를 버려두고 도모하지 않다가 만일 하루아침에 소식 같은 자가 나와 의견을 상주하여 중국과 주변 오랑캐 사이의 경계를 엄격하게 하여 오가는 것을 금지하는 명령을 시행한다면, 아무리 예물을 받들고 가져가서 아주 하찮은 것이라도 얻기를 바란다고 해도 어찌 그 뜻을 이룰 수 있겠는가.
무릇 효도와 우애는 천성에 뿌리를 두었고 성현의 글에 밝혀졌으니, 진실로 이를 넓혀서 충실하게 하고 닦아서 밝힌다면 곧 예의에 합당한 풍속을 이루게 될 것이다. 이는 진실로 바깥 세계에 기댈 필요가 없는 것이요, 또한 후세에 생겨나는 것에 힘입을 필요도 없다. 그러나 저 생활을 편리하게 하고 윤택하게 하는 데 필요한 것들과 장인들의 온갖 기예의 기능은 후세에 출현한 방법을 가서 배우지 않는다면 그 몽매하고 고루함을 타파하여 이로움과 혜택을 흥성케 할 수 없게 된다. 이는 국가를 경영하는 사람들이라면 마땅히 강구해야 할 바이다.
昔蘇軾請勿以經籍賜高麗, 竝禁其購求, 謂夷狄讀書, 長其智慮也, 何其狹隘而少恩哉. 雖然此論則以時得行於中國也. 經籍且不欲相示, 況使之學技藝諸能, 以彊其國哉. 古者外夷遣子弟入學者甚多. 近世琉球人處太學十年, 專學其文物技能. 芝峰集日本往來江浙, 唯務移百工纖巧. 故琉球日本在海中絶域, 而其技能與中國抗, 民裕而兵強, 鄰國莫敢侵擾, 其已然之效如是也. 適今規模疏豁不狹陋. 捨此不圖, 若一朝有如蘇軾者建言, 嚴華夷之界, 申禁遏之令, 則雖欲執贄奉幣, 冀得其咳唾之餘, 尙安能遂其志哉. 夫孝弟根於天性, 明於聖賢之書, 苟擴而充之, 修而明之, 斯禮義成俗. 此固無待乎外, 亦無藉乎後出者. 若夫利用厚生之所須, 百工技藝之能不往求其後出之制, 則未有能破蒙陋而興利澤者也. 此謀國者所宜講也.
[출전] 정약용,『기예론』
토론하기
(1) 정약용은 고전 본문에서 송나라의 소식이 고려에 대하여 지니고 있었던 태도와 당시 조선의 기능 학습 풍토에 대하여 비판하였다. 그 비판 내용을 정리해보고 그러한 비판이 왜 타당한지에 대하여 의견을 교환해보자.
(2) 중국은 왜 자신의 문물이 주변에 전파되는 것을 막고자 했던 것일까? 그 이유를 고전 본문에서 찾아보고, 그러한 이유가 현대 세계에서도 여전히 유효한지를 따져보자.
(3) 앎을 증진시키기 위해 꼭 지식이 진보된 곳으로 유학을 가야 할까? 만약 유학을 가지 않고서도 앎을 증진시킬 수 있다면 어떤 방법이 가능할까?
해설읽기
1644년 한족의 왕조인 명나라가 망하고 만주 일대를 근거지로 삼고 있던 만주족이 수도 북경을 점령하고는 청나라를 세웠다. 그러자 조선에서는 오랑캐인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를 황제의 나라로 섬길 수 없다는 의식이 팽배해졌다. 조선은 성리학의 나라였는데, 성리학은 유학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중화주의적 성향을 띠고 있었다. 곧 중국 문명만이 세계 유일의 표준적 문명이고 가장 수준 높은 문명이며, 중국 주변은 문명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거나, 있다고 하더라도 그 수준이 중국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낮다고 믿었다. 한마디로 중국만이 유일한 문명세계이고 최고의 문명을 누리고 있다는 관념이었다.
선비라고 불리던 조선의 지식인들은 이러한 중화주의를 내면화하고 있었다. 그들은 조선은 중국문명의 정화를 온전히 익힌 중국에 버금가는 ‘작은 중화’, 곧 소중화의 나라이므로, 만주 일대의 유목민이나 일본, 유구 등과는 질적으로 다르다고 여겼다. 그래서 중국을 황제의 나라로 섬기면서 주변 나라나 민족들을 오랑캐로 낮잡아보았다. 그러던 참에 만주 일대의 유목민이었던 여진족이 세력을 키우고는 이름을 만주족으로 바꾼 후 중국마저 점령하는 일이 벌어지자 조선의 선비들은 발칵 뒤집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더니 오랑캐 출신인 청나라를 인정할 수 없다고 하면서 그들을 멸시했고, 멸망한 명나라를 이어 중화가 조선으로 옮겨졌다며 조선이 중화임을 자처하였다. 한편 청나라는 중국을 점령한 후 강희제, 건륭제와 같은 뛰어난 황제가 거듭 나오면서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정치가 안정되었고 경제가 크게 발달하였으며 영토가 대대적으로 확장되었다. 이러한 발달에 힘입어 문화와 문물도 전에 없이 크게 발달하였다. 한자권뿐 아니라 당시 지구상의 어느 지역, 나라와 견주어도 못할 것 없는, 아니 더욱 선진적인 문화와 문물을 구현하고 있었다.
정약용 등의 실학자들은 이러한 청나라의 실상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실학자들은 실용주의적 성향을 띠고 있었다. 이에 ‘북학파’라고 불렸던 박지원, 박제가와 같은 학자에 의해 청나라에 대한 멸시의 눈길을 거두고 그들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적극적으로 배우자는 목소리가 제기되었다. 정약용은 북학파에 속하는 실학자는 아니었지만, 그 또한 실용주의적 성향을 띠고 있었기에 조선이 발전하는 데 필요하다면 청나라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배워야 한다는 입장에 서 있었다. 고전 본문은 정약용이 자신의 이러한 입장을 체계적으로 제시한 글 가운데 하나이다.
정약용은 먼저 선진 지식과 기예를 익히는 일이 우리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역사의 사례를 들어 강조한다. 고려시대 당시 세상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지식과 기예를 보유하고 있던 나라는 송나라였는데, 이들이 자신의 선진 문물이 고려로 흘러들어가고, 고려가 이를 익혀 강하게 되는 것을 우려하여 자신들의 문물이 외부로 유출되지 못하도록 통제하였다. 지금으로 치면 첨단 과학기술 같은 것이 외국으로 유출되지 못하도록 통제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조치를 취했던 것이다. 정약용은 이러한 역사에서 볼 수 있듯이 선진 문물을 배우고 익힌다는 것은 우리가 뜻한다고 하여 다 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런데 정약용 당시의 중국, 그러니까 청나라는 송나라처럼 속 좁지 않아서 자신들의 선진 문물을 외국이 배우고 익히는 것을 금지하지 않았다. 그래서 일본이나 유구국은 일찍부터 청나라에 가서 그들의 선진 문물을 열심히 익히고 배웠다. 그 결과 유구국과 일본은 기예 수준이 중국과 대등하게 되었고 그 백성들은 부유하고 군대는 강력하여 이웃 나라에서 감히 침략하는 자들이 없는 경지에 이를 수 있었다. 조선의 선비들이 청나라를 오랑캐로 여겼듯이 오랑캐로 여기며 멸시했던 일본과 유구국의 문물 수준이 조선보다 나아졌다는 것이다.
결국 정약용이 보기에 조선은 중화주의라는 교조적 관념에 입각하여 청나라나 일본, 유구국을 오랑캐라 무시하고 자신을 높게 평가하는 정신적 승리를 거둘 수는 있었지만, 현실에서는 또 실질적으로는 그렇게 무시하는 오랑캐들이 자신들보다 훨씬 나은 수준을 구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정약용의 이러한 이야기를 뒤집으면 조선은 중화주의라는 교조적 관념에 매몰되어 자신들이 오랑캐라고 무시하던 나라들보다 퇴보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정약용은 일본이나 유구국처럼 청나라에 가서 선진 문물을 열심히 배우고 익힘으로써 퇴보되었고, 앞으로 더 퇴보될 수밖에 없는 조선의 문물 수준을 일신시키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기예나 기술 같은 문물만 선진적인 것을 접하면서 열심히 배우고 익혀야 하는 것이 아니다. 앎도 마찬가지다. 끊임없이 일신시켜 가야 비로소 앎이 퇴보하지 않게 된다. 자신이 지닌 앎이 아무리 확실하고 정확하며 참되다고 해도, 자신을 둘러싼 사회가, 세상이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앎도 지속적으로 업그레이드 해야만 한다. 고전 본문에서 정약용이 설파한 바는 국가 차원에서만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개인 차원에서도 크게 의미 있는 바이다.
키워드
기술, 기예, 선진 문물, 앎, 앎의 진보, 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