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맥락
고전 본문은 『능양시집』 에 붙인 서문의 전문이다. 박지원은 「능양시집서」에서 앎의 확실성에 대하여 전적으로 논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지니고 있는 앎에 의거하여 사물이나 세상을 또 타인을 판단하는데, 박지원은 이 글에서 그러한 판단이 과연 타당한 것인지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한다. 문제를 제기하는 근거로 제일 먼저 제시한 것은 “판단 주체의 앎이 과연 충분한가?”이다. 다음으로 제시한 것은 “판단 대상에 적합한 기준에 의거하여 대상을 판단했는가?”이다. 혹 어느 하나에 적합한 판단 기준으로 그렇지 않은 다른 대상도 판단하는 잘못을 범하지는 않았는가 하는 물음이다. 박지원은 자신이 제기한 이러한 문제를 적절한 예시를 통하여 부연 설명함으로써 객관적 설득력을 갖춘 글을 써냈다.
고전본문
통달한 사람에게 괴이한 것이란 없지만 범속한 사람들에게는 의심스러운 것이 많다. 이른바 “본 것이 적으면 괴이한 것도 많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 통달한 사람이라고 해서 만물을 다 쫓아가 눈으로 직접 보았겠는가? 하나를 들으면 열을 눈에서 그려 보고 열을 보면 백을 마음에서 진열해보면, 온갖 기괴함이란 도리어 사물에 보태어져 있는 것이지 본래의 그것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이었다. 덕분에 마음이 한가롭고 여유롭게 되어 만물에 대응해감이 무궁무진해지게 된다.
본 것이 적은 자는 해오라기를 토대로 까마귀를 비웃고 오리를 토대로 학을 위태롭다고 여긴다. 사물 자체는 괴이할 것이 없는데 혼자서 화를 내고, 한 가지 일이라도 자기 생각과 같지 않으면 늘 만물을 모함한다. 아, 저 까마귀를 보라. 그 깃털보다 더 검은 것이 없건만 홀연 뽀얀 황금빛이 감돌기도 하고, 다시 진한 녹색이 반짝이기도 하며, 해가 비추면 자줏빛이 발산되어 눈앞에 어른거리다가 비췻빛으로 바뀐다. 그렇다면 내가 그 새를 푸른 까마귀라고 부른다 해도 될 것이고, 붉은 까마귀라고 불러도 또한 가능할 것이다. 그 새에게는 본래 고정된 빛깔이 없거늘, 내가 눈으로써 먼저 그 빛깔을 정해놓고 본 것이다. 어찌 단지 눈으로만 정해놓았겠는가? 보지도 않고서 먼저 그 마음으로 정해놓은 것이다.
아, 까마귀를 검은색으로 고정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거늘, 다시 까마귀를 기준으로 천하의 뭇 색을 정해놓고자 한다. 까마귀가 과연 검기는 하지만 누가 이른바 푸른빛과 붉은빛이 그 검은 빛깔 속에 들어 있는 빛인 줄 알겠는가? 그러니 검은 것을 일러 어둡다고 함은 단지 까마귀만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검은 빛깔도 모르는 것이다. 어째서인가? 곧 물은 검기 때문에 비출 수 있고 옻칠도 검기 때문에 거울처럼 비출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빛깔이 있는 것 중 빛이 있지 않은 것이 없고, 형체가 있는 것 중 자태가 있지 않은 것이 없다.
미인을 살펴보면 시를 알게 된다. 고개를 숙이고 있음은 그가 부끄러워하고 있음을 드러낸 것이다. 턱을 괴고 있음은 그가 한스러워하고 있음을 드러낸 것이다. 홀로 서 있음은 그가 그리워하고 있음을 드러낸 것이다. 눈썹을 찌푸림은 그가 시름에 잠겨 있음을 드러낸 것이다. 기다리는 바가 있으면 난간 아래 서 있는 모습을 드러내고, 바라는 바가 있으면 파초 아래 서 있는 모습을 드러낸다. 만약 그녀에게 서 있는 것은 단정하게 재계한 것만 못하다거나 앉아 있는 것은 조각상처럼 정자세가 아니라고 나무란다면, 이는 양귀비에게 이를 앓는다고 꾸짖거나 번희에게 쪽진 머리를 감싸 쥐지 말라고 금하는 것*이며, 사뿐사뿐한 걸음걸이를 요염하다고 비난하거나 손뼉을 치며 빠른 박자로 추는 춤을 경박하다고 꾸짖는 것이다.
나의 조카 종선은 자가 계지로 시에 능했다. 한 가지 시법(詩法)**에 얽매이지 않고 온갖 시체(詩體)를 두루 갖추어 우뚝이 동방의 대가가 되었다. 그의 시는 성당(盛唐)*** 시절의 시로 보였다가 어느새 한나라와 위나라 시대의 시가 되어 있고, 그러다 홀연히 송나라와 명나라 시대의 시가 된다.**** 겨우겨우 송대와 명대의 시라고 여겼는데 다시 성당의 시풍이 드러난다.
아, 세상 사람들이 까마귀를 비웃고 학을 위태롭다고 여김이 또한 너무도 심하건만 계지의 정원에 있는 까마귀만 홀연히 푸르렀다가 홀연히 붉었다 한다. 세상 사람들이 미인을 재계하는 모습이나 조각상처럼 만들려 하지만, 손뼉을 치며 빠른 박자로 추는 춤이나 사뿐거리는 걸음걸이는 날이 갈수록 경박하고 요염해지며 쪽진 머리를 감싸 쥐거나 이를 앓는 모습에도 각기 자태를 갖추고 있으니, 그네들이 날이 갈수록 화를 내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세상에 통달한 사람은 적고 범속한 이들만 많으니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럼에도 쉬지 않고 말을 하게 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아아! 연암 노인이 연상각에서 썼도다.
* 절세의 미인 양귀비가 이가 아파 손을 뺨에 대고 얼굴을 찌푸리니 그 자태가 더욱 고혹적이었다고 한다. 번희는 한나라 영현의 첩으로 미인으로 유명했는데 슬픈 이야기를 하다가 촛불을 돌아보고 손으로 쪽진 머리를 감싸 쥐며 구슬피 눈물을 흘렸는데 그 자태가 더욱 어여뻤다고 한다.
** 시법(詩法)은 시를 짓는 법식을 가리킨다.
*** 당(唐)나라 시기를 4분하여 각각 초당(初唐), 성당(盛唐), 중당(中唐), 만당(晩唐)이라고 부른다. 성당은 당나라의 전성기에 해당하고, 이때 이백과 두보 같은 대시인이 출현하여 시의 발전이 극에 달하게 된다.
**** 중국 고전시가는 시대별로 그 시대의 특징이 담겨 있다. 한나라와 그 뒤를 이은 위나라의 시, 당나라 때의 시, 송나라 때의 시, 명나라 때의 시는 각각 그 풍격이 달랐다.
達士無所恠, 俗人多所疑. 所謂少所見, 多所恠也. 夫豈達士者, 逐物而目覩哉. 聞一則形十於目, 見十則設百於心, 千恠萬奇, 還寄於物而己無與焉. 故心閒有餘, 應酬無窮. 所見少者, 以鷺嗤烏, 以鳧危鶴. 物自無恠, 己廼生嗔, 一事不同, 都誣萬物. 噫, 瞻彼烏矣. 莫黑其羽, 忽暈乳金, 復耀石綠, 日映之而騰紫, 目閃閃而轉翠. 然則吾雖謂之蒼烏可也, 復謂之赤烏亦可也. 彼旣本無定色, 而我乃以目先定. 奚特定於其目. 不覩而先定於其心. 噫, 錮烏於黑足矣, 廼復以烏錮天下之衆色. 烏果黑矣, 誰復知所謂蒼赤乃色中之光耶. 謂黑爲闇者, 非但不識烏, 並黑而不知也. 何, 則水玄故能照, 漆黑故能鑑. 是故有色者. 莫不有光, 有形者莫不有態. 觀乎美人, 可以知詩矣. 彼低頭, 見其羞也. 支頤, 見其恨也. 獨立, 見其思也. 顰眉, 見其愁也. 有所待也, 見其立欄干下, 有所望也, 見其立芭蕉下. 若復責其立不如齋, 坐不如塑, 則是罵楊妃之病齒, 而禁樊姬之擁髻也, 譏蓮步之妖妙, 而叱掌舞之輕儇也. 余侄宗善字繼之, 工於詩. 不纏一法, 百體俱該, 蔚然爲東方大家. 視爲盛唐, 則忽焉漢魏, 而忽焉宋明. 纔謂宋明, 復有盛唐. 嗚呼, 世人之嗤烏危鶴, 亦已甚矣, 而繼之之園烏忽紫忽翠. 世人之欲齋塑美人, 而掌舞蓮步, 日益輕妙. 擁髻病齒, 俱各有態, 無惑乎其嗔怒之日滋也. 世之達士少而俗人衆, 則默而不言, 可也. 然言之不休, 何也. 噫, 燕岩老人. 書于烟湘閣.
[출전] 박지원,『능양시집서』
토론하기
(1) 고전 본문에는 ‘본 것이 적은 자’가 범하는 오류가 서술되어 있다. 구체적으로 어떠어떠한 오류인지를 짚어보고, 본 것이 적으면 왜 그러한 오류를 범하게 되는지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2) 낯선 것을 접했을 때 나는 어떻게 반응했는지에 대하여 이야기해보자. 또 우리 사회에서는 낯선 것에 대하여 어떻게 반응해왔는지에 대하여 조사해보고, 왜 그렇게 반응했는지, 그 이유에 대하여 토의해보자.
(3) 단일한 기준에 의거하여 대상을 인식할 때와 다양한 기준에 의거하여 대상을 인식할 때의 장점과 단점에 대하여 토의해보자.
해설읽기
고전 본문은 박지원의 「능양시집서」의 전문이다. 담고 있는 내용이 다소 심오한 편이다. 그런데 이 글을 이해하는 데 관건이 되는 부분은 첫 단락이다. 첫 단락을 잘 이해하면 나머지 부분은 쉬이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첫 단락의 내용은 자세히 고찰해보도록 하겠다.
첫 단락에서 박지원은 익숙하지 않은 사물을 접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둘로 나눠볼 수 있다고 한다. ‘통달한’ 사람과 ‘본 것이 적은 사람’이 그것이다. 통달한 사람, 그러니까 폭 넓고 속 깊은 지식을 갖춘 사람은 낯선 것을 봐도 괴이하다는 식으로 반응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반면에 본 것이 적은 사람은 낯선 사물을 접하면 괴이하다고 규정해버린다고 한다. 이렇게 상반되는 두 경우로 나눈 후 박지원은 통달한 사람이 정말로 본 것이 많아서 그렇게 반응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에 의하면 통달한 사람이 그렇게 반응할 수 있었던 까닭은 그가 선입견이나 편견 같은 것 없이 새로이 접하는 사물을 마음에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후 마치 전시회에서 전시품을 보듯이 이모저모 살펴보았기 때문이다. “하나를 들으면 열을 눈에서 그려 보고 열을 보면 백을 마음에서 진열해본다”는 것은 그 하나를, 또 열을 폭 넓고 속 깊은 사고의 과정을 거쳐 판단하고 인식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사고 과정을 거치면 괴상하다는 것이 사물의 본 모습과 무관하게 그 사물을 보는 사람의 마음으로부터 그 사물에 사후적으로 달라붙은 것임을 깨닫게 된다. 이에 비해 본 것이 적은 사람은 통달한 사람이 행하는 이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고 바로 괴이하다고 판단하고 만다. 결국 박지원이 말하는 본 것이 적다는 것은 실제로 본 것이 적음을 말함과 동시에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자 하는 사고의 힘도 미비되어 있음을 동시에 가리켰다. 우리에게 익숙한 표현으로 바꾸자면 본 것이 적다는 것은 ‘생각이 짧음’을 말한 것이었다. 반면에 통달한 사람은 아무리 낯설고 처음 접하는 사물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아낼 수 있는 사고의 힘을 갖추고 있는 덕분에 “마음이 한가롭고 여유롭게 되어 만물에 대응해감이 무궁무진해지게 된다.” 그 결과 설령 만 가지의 낯설고 새로운 사물을 접하게 된다고 해도 그 모든 사물을 있는 그 자체대로 인식할 수 있게 된다.
이상의 서술을 통해 박지원은 만물 가운데 그 자체로 괴이한 것은 없음을 강조했다. 괴이하다고 함은 그 사물과 무관하게 그 사물을 접한 사람이 자기가 아는 것으로는 그 정체가 파악되지 않자 사후적으로 그것에 덧붙인 결과라는 얘기다. 결국 박지원은 이러한 이치를 알게 되면 마음에 여유가 한층 생겨서 어떤 사물이든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된다고 말한 셈이다. 곧 아무런 편견이나 선입견 없이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진면목을 볼 수 있게 된다고 여긴 것이다. 이러한 통찰을 두괄식으로 제시한 후 박지원은 본 것이 적음, 그러니까 생각의 짧음으로 인해 발생하는 병폐에 대하여 서술한다. 하얀 깃털의 해오라기가 정상이라고만 보는 이는 검은 깃털의 까마귀를 비정상이라고, 그래서 괴이하다고 여긴다. 다리가 짧은 오리를 기준으로 삼은 이는 다리가 긴 학을 보고는 위태롭다며 비정상으로, 기괴하다고 여긴다. 그러면서 까마귀나 학은 비정상적이지도 괴이하지도 않음에도 자기 혼자 그렇다고 여기고는 왜 그런 식으로 비정상적이고 괴이하냐며 화를 내기도 한다. 나아가 이렇게 어느 하나의 일이라도 기존에 자기가 지니고 있는 생각과 같지 않으면 사물을 헐뜯기도 한다. 가령 쓸모없다는 둥, 사람을 해친다는 둥, 있지도 않은 얘기를, 근거도 없는 모함을 늘어놓게 된다.
사정이 이러하니 본 것이 적은 이, 그러니까 생각이 짧은 자는 실제로 일어나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까마귀가 검은색임은 분명하지만, 그 검은색 위로 햇빛이 비쳐들면 검은빛과 햇빛이 만나 색채가 달라진다. 그래서 어떤 날씨 조건에서 또 언제, 어느 각도에서 바라보냐에 따라 뽀얀 황금빛으로도, 진한 녹색으로도, 또 자줏빛, 비췻빛으로도 보인다. 이들 빛깔 또한 그렇게 발현되는 그 순간에서만큼은 엄연히 실제로 존재했던 사실이다. 그럼에도 생각이 짧은 사람은 이를 인정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오로지 자기가 사실이라고 믿는 것에만, 기존에 알고 있는 것에만, 평소에 익숙한 것에만 의지하여, 사실을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니, 단지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단계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믿고 아는 것을 유일한 정상, 기준으로 삼아 사실마저도 기꺼이 오독하고 또 왜곡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실은 사실만 오독, 왜곡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앎도 비틀리고 어그러지게 된다. 아무리 많은 사물을 새로 접한다고 해도 그것을 오독하고 왜곡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새로 본 것이 없게 된다. 그 결과 본 것이 적음, 곧 생각이 짧음 상태가 지속된다. 문제는 이런 이들이 사회의 다수가 되는, 이러한 이들이 사회 주도층이 되는 경우다. 우리 사회에서 가짜뉴스마저도 자신들의 이익 구현에 도움이 된다면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정치인이나 언론인, 지식인 등이 버젓이 존재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되면 사실에 근거한 객관적 앎마저도 여지없이 흔들리게 된다. 생각의 짧음이 단지 개인 차원에서만 문제적이고 해악이 됨만은 아닌 것이다.
키워드
가짜뉴스, 까마귀, 사고, 앎, 역량, 오독, 왜곡, 진실,
전후맥락
고전 본문은 『능양시집』 에 붙인 서문의 전문이다. 박지원은 「능양시집서」에서 앎의 확실성에 대하여 전적으로 논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지니고 있는 앎에 의거하여 사물이나 세상을 또 타인을 판단하는데, 박지원은 이 글에서 그러한 판단이 과연 타당한 것인지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한다. 문제를 제기하는 근거로 제일 먼저 제시한 것은 “판단 주체의 앎이 과연 충분한가?”이다. 다음으로 제시한 것은 “판단 대상에 적합한 기준에 의거하여 대상을 판단했는가?”이다. 혹 어느 하나에 적합한 판단 기준으로 그렇지 않은 다른 대상도 판단하는 잘못을 범하지는 않았는가 하는 물음이다. 박지원은 자신이 제기한 이러한 문제를 적절한 예시를 통하여 부연 설명함으로써 객관적 설득력을 갖춘 글을 써냈다.
고전본문
통달한 사람에게 괴이한 것이란 없지만 범속한 사람들에게는 의심스러운 것이 많다. 이른바 “본 것이 적으면 괴이한 것도 많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 통달한 사람이라고 해서 만물을 다 쫓아가 눈으로 직접 보았겠는가? 하나를 들으면 열을 눈에서 그려 보고 열을 보면 백을 마음에서 진열해보면, 온갖 기괴함이란 도리어 사물에 보태어져 있는 것이지 본래의 그것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이었다. 덕분에 마음이 한가롭고 여유롭게 되어 만물에 대응해감이 무궁무진해지게 된다.
본 것이 적은 자는 해오라기를 토대로 까마귀를 비웃고 오리를 토대로 학을 위태롭다고 여긴다. 사물 자체는 괴이할 것이 없는데 혼자서 화를 내고, 한 가지 일이라도 자기 생각과 같지 않으면 늘 만물을 모함한다. 아, 저 까마귀를 보라. 그 깃털보다 더 검은 것이 없건만 홀연 뽀얀 황금빛이 감돌기도 하고, 다시 진한 녹색이 반짝이기도 하며, 해가 비추면 자줏빛이 발산되어 눈앞에 어른거리다가 비췻빛으로 바뀐다. 그렇다면 내가 그 새를 푸른 까마귀라고 부른다 해도 될 것이고, 붉은 까마귀라고 불러도 또한 가능할 것이다. 그 새에게는 본래 고정된 빛깔이 없거늘, 내가 눈으로써 먼저 그 빛깔을 정해놓고 본 것이다. 어찌 단지 눈으로만 정해놓았겠는가? 보지도 않고서 먼저 그 마음으로 정해놓은 것이다.
아, 까마귀를 검은색으로 고정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거늘, 다시 까마귀를 기준으로 천하의 뭇 색을 정해놓고자 한다. 까마귀가 과연 검기는 하지만 누가 이른바 푸른빛과 붉은빛이 그 검은 빛깔 속에 들어 있는 빛인 줄 알겠는가? 그러니 검은 것을 일러 어둡다고 함은 단지 까마귀만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검은 빛깔도 모르는 것이다. 어째서인가? 곧 물은 검기 때문에 비출 수 있고 옻칠도 검기 때문에 거울처럼 비출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빛깔이 있는 것 중 빛이 있지 않은 것이 없고, 형체가 있는 것 중 자태가 있지 않은 것이 없다.
미인을 살펴보면 시를 알게 된다. 고개를 숙이고 있음은 그가 부끄러워하고 있음을 드러낸 것이다. 턱을 괴고 있음은 그가 한스러워하고 있음을 드러낸 것이다. 홀로 서 있음은 그가 그리워하고 있음을 드러낸 것이다. 눈썹을 찌푸림은 그가 시름에 잠겨 있음을 드러낸 것이다. 기다리는 바가 있으면 난간 아래 서 있는 모습을 드러내고, 바라는 바가 있으면 파초 아래 서 있는 모습을 드러낸다. 만약 그녀에게 서 있는 것은 단정하게 재계한 것만 못하다거나 앉아 있는 것은 조각상처럼 정자세가 아니라고 나무란다면, 이는 양귀비에게 이를 앓는다고 꾸짖거나 번희에게 쪽진 머리를 감싸 쥐지 말라고 금하는 것*이며, 사뿐사뿐한 걸음걸이를 요염하다고 비난하거나 손뼉을 치며 빠른 박자로 추는 춤을 경박하다고 꾸짖는 것이다.
나의 조카 종선은 자가 계지로 시에 능했다. 한 가지 시법(詩法)**에 얽매이지 않고 온갖 시체(詩體)를 두루 갖추어 우뚝이 동방의 대가가 되었다. 그의 시는 성당(盛唐)*** 시절의 시로 보였다가 어느새 한나라와 위나라 시대의 시가 되어 있고, 그러다 홀연히 송나라와 명나라 시대의 시가 된다.**** 겨우겨우 송대와 명대의 시라고 여겼는데 다시 성당의 시풍이 드러난다.
아, 세상 사람들이 까마귀를 비웃고 학을 위태롭다고 여김이 또한 너무도 심하건만 계지의 정원에 있는 까마귀만 홀연히 푸르렀다가 홀연히 붉었다 한다. 세상 사람들이 미인을 재계하는 모습이나 조각상처럼 만들려 하지만, 손뼉을 치며 빠른 박자로 추는 춤이나 사뿐거리는 걸음걸이는 날이 갈수록 경박하고 요염해지며 쪽진 머리를 감싸 쥐거나 이를 앓는 모습에도 각기 자태를 갖추고 있으니, 그네들이 날이 갈수록 화를 내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세상에 통달한 사람은 적고 범속한 이들만 많으니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럼에도 쉬지 않고 말을 하게 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아아! 연암 노인이 연상각에서 썼도다.
* 절세의 미인 양귀비가 이가 아파 손을 뺨에 대고 얼굴을 찌푸리니 그 자태가 더욱 고혹적이었다고 한다. 번희는 한나라 영현의 첩으로 미인으로 유명했는데 슬픈 이야기를 하다가 촛불을 돌아보고 손으로 쪽진 머리를 감싸 쥐며 구슬피 눈물을 흘렸는데 그 자태가 더욱 어여뻤다고 한다.
** 시법(詩法)은 시를 짓는 법식을 가리킨다.
*** 당(唐)나라 시기를 4분하여 각각 초당(初唐), 성당(盛唐), 중당(中唐), 만당(晩唐)이라고 부른다. 성당은 당나라의 전성기에 해당하고, 이때 이백과 두보 같은 대시인이 출현하여 시의 발전이 극에 달하게 된다.
**** 중국 고전시가는 시대별로 그 시대의 특징이 담겨 있다. 한나라와 그 뒤를 이은 위나라의 시, 당나라 때의 시, 송나라 때의 시, 명나라 때의 시는 각각 그 풍격이 달랐다.
達士無所恠, 俗人多所疑. 所謂少所見, 多所恠也. 夫豈達士者, 逐物而目覩哉. 聞一則形十於目, 見十則設百於心, 千恠萬奇, 還寄於物而己無與焉. 故心閒有餘, 應酬無窮. 所見少者, 以鷺嗤烏, 以鳧危鶴. 物自無恠, 己廼生嗔, 一事不同, 都誣萬物. 噫, 瞻彼烏矣. 莫黑其羽, 忽暈乳金, 復耀石綠, 日映之而騰紫, 目閃閃而轉翠. 然則吾雖謂之蒼烏可也, 復謂之赤烏亦可也. 彼旣本無定色, 而我乃以目先定. 奚特定於其目. 不覩而先定於其心. 噫, 錮烏於黑足矣, 廼復以烏錮天下之衆色. 烏果黑矣, 誰復知所謂蒼赤乃色中之光耶. 謂黑爲闇者, 非但不識烏, 並黑而不知也. 何, 則水玄故能照, 漆黑故能鑑. 是故有色者. 莫不有光, 有形者莫不有態. 觀乎美人, 可以知詩矣. 彼低頭, 見其羞也. 支頤, 見其恨也. 獨立, 見其思也. 顰眉, 見其愁也. 有所待也, 見其立欄干下, 有所望也, 見其立芭蕉下. 若復責其立不如齋, 坐不如塑, 則是罵楊妃之病齒, 而禁樊姬之擁髻也, 譏蓮步之妖妙, 而叱掌舞之輕儇也. 余侄宗善字繼之, 工於詩. 不纏一法, 百體俱該, 蔚然爲東方大家. 視爲盛唐, 則忽焉漢魏, 而忽焉宋明. 纔謂宋明, 復有盛唐. 嗚呼, 世人之嗤烏危鶴, 亦已甚矣, 而繼之之園烏忽紫忽翠. 世人之欲齋塑美人, 而掌舞蓮步, 日益輕妙. 擁髻病齒, 俱各有態, 無惑乎其嗔怒之日滋也. 世之達士少而俗人衆, 則默而不言, 可也. 然言之不休, 何也. 噫, 燕岩老人. 書于烟湘閣.
[출전] 박지원,『능양시집서』
토론하기
(1) 고전 본문에는 ‘본 것이 적은 자’가 범하는 오류가 서술되어 있다. 구체적으로 어떠어떠한 오류인지를 짚어보고, 본 것이 적으면 왜 그러한 오류를 범하게 되는지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2) 낯선 것을 접했을 때 나는 어떻게 반응했는지에 대하여 이야기해보자. 또 우리 사회에서는 낯선 것에 대하여 어떻게 반응해왔는지에 대하여 조사해보고, 왜 그렇게 반응했는지, 그 이유에 대하여 토의해보자.
(3) 단일한 기준에 의거하여 대상을 인식할 때와 다양한 기준에 의거하여 대상을 인식할 때의 장점과 단점에 대하여 토의해보자.
해설읽기
고전 본문은 박지원의 「능양시집서」의 전문이다. 담고 있는 내용이 다소 심오한 편이다. 그런데 이 글을 이해하는 데 관건이 되는 부분은 첫 단락이다. 첫 단락을 잘 이해하면 나머지 부분은 쉬이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첫 단락의 내용은 자세히 고찰해보도록 하겠다.
첫 단락에서 박지원은 익숙하지 않은 사물을 접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둘로 나눠볼 수 있다고 한다. ‘통달한’ 사람과 ‘본 것이 적은 사람’이 그것이다. 통달한 사람, 그러니까 폭 넓고 속 깊은 지식을 갖춘 사람은 낯선 것을 봐도 괴이하다는 식으로 반응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반면에 본 것이 적은 사람은 낯선 사물을 접하면 괴이하다고 규정해버린다고 한다. 이렇게 상반되는 두 경우로 나눈 후 박지원은 통달한 사람이 정말로 본 것이 많아서 그렇게 반응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에 의하면 통달한 사람이 그렇게 반응할 수 있었던 까닭은 그가 선입견이나 편견 같은 것 없이 새로이 접하는 사물을 마음에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후 마치 전시회에서 전시품을 보듯이 이모저모 살펴보았기 때문이다. “하나를 들으면 열을 눈에서 그려 보고 열을 보면 백을 마음에서 진열해본다”는 것은 그 하나를, 또 열을 폭 넓고 속 깊은 사고의 과정을 거쳐 판단하고 인식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사고 과정을 거치면 괴상하다는 것이 사물의 본 모습과 무관하게 그 사물을 보는 사람의 마음으로부터 그 사물에 사후적으로 달라붙은 것임을 깨닫게 된다. 이에 비해 본 것이 적은 사람은 통달한 사람이 행하는 이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고 바로 괴이하다고 판단하고 만다. 결국 박지원이 말하는 본 것이 적다는 것은 실제로 본 것이 적음을 말함과 동시에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자 하는 사고의 힘도 미비되어 있음을 동시에 가리켰다. 우리에게 익숙한 표현으로 바꾸자면 본 것이 적다는 것은 ‘생각이 짧음’을 말한 것이었다. 반면에 통달한 사람은 아무리 낯설고 처음 접하는 사물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아낼 수 있는 사고의 힘을 갖추고 있는 덕분에 “마음이 한가롭고 여유롭게 되어 만물에 대응해감이 무궁무진해지게 된다.” 그 결과 설령 만 가지의 낯설고 새로운 사물을 접하게 된다고 해도 그 모든 사물을 있는 그 자체대로 인식할 수 있게 된다.
이상의 서술을 통해 박지원은 만물 가운데 그 자체로 괴이한 것은 없음을 강조했다. 괴이하다고 함은 그 사물과 무관하게 그 사물을 접한 사람이 자기가 아는 것으로는 그 정체가 파악되지 않자 사후적으로 그것에 덧붙인 결과라는 얘기다. 결국 박지원은 이러한 이치를 알게 되면 마음에 여유가 한층 생겨서 어떤 사물이든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된다고 말한 셈이다. 곧 아무런 편견이나 선입견 없이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진면목을 볼 수 있게 된다고 여긴 것이다. 이러한 통찰을 두괄식으로 제시한 후 박지원은 본 것이 적음, 그러니까 생각의 짧음으로 인해 발생하는 병폐에 대하여 서술한다. 하얀 깃털의 해오라기가 정상이라고만 보는 이는 검은 깃털의 까마귀를 비정상이라고, 그래서 괴이하다고 여긴다. 다리가 짧은 오리를 기준으로 삼은 이는 다리가 긴 학을 보고는 위태롭다며 비정상으로, 기괴하다고 여긴다. 그러면서 까마귀나 학은 비정상적이지도 괴이하지도 않음에도 자기 혼자 그렇다고 여기고는 왜 그런 식으로 비정상적이고 괴이하냐며 화를 내기도 한다. 나아가 이렇게 어느 하나의 일이라도 기존에 자기가 지니고 있는 생각과 같지 않으면 사물을 헐뜯기도 한다. 가령 쓸모없다는 둥, 사람을 해친다는 둥, 있지도 않은 얘기를, 근거도 없는 모함을 늘어놓게 된다.
사정이 이러하니 본 것이 적은 이, 그러니까 생각이 짧은 자는 실제로 일어나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까마귀가 검은색임은 분명하지만, 그 검은색 위로 햇빛이 비쳐들면 검은빛과 햇빛이 만나 색채가 달라진다. 그래서 어떤 날씨 조건에서 또 언제, 어느 각도에서 바라보냐에 따라 뽀얀 황금빛으로도, 진한 녹색으로도, 또 자줏빛, 비췻빛으로도 보인다. 이들 빛깔 또한 그렇게 발현되는 그 순간에서만큼은 엄연히 실제로 존재했던 사실이다. 그럼에도 생각이 짧은 사람은 이를 인정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오로지 자기가 사실이라고 믿는 것에만, 기존에 알고 있는 것에만, 평소에 익숙한 것에만 의지하여, 사실을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니, 단지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단계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믿고 아는 것을 유일한 정상, 기준으로 삼아 사실마저도 기꺼이 오독하고 또 왜곡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실은 사실만 오독, 왜곡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앎도 비틀리고 어그러지게 된다. 아무리 많은 사물을 새로 접한다고 해도 그것을 오독하고 왜곡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새로 본 것이 없게 된다. 그 결과 본 것이 적음, 곧 생각이 짧음 상태가 지속된다. 문제는 이런 이들이 사회의 다수가 되는, 이러한 이들이 사회 주도층이 되는 경우다. 우리 사회에서 가짜뉴스마저도 자신들의 이익 구현에 도움이 된다면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정치인이나 언론인, 지식인 등이 버젓이 존재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되면 사실에 근거한 객관적 앎마저도 여지없이 흔들리게 된다. 생각의 짧음이 단지 개인 차원에서만 문제적이고 해악이 됨만은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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