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맥락
고전 본문 [가]와 [나]는 「지락(至樂)」 편에 실려 있다. ‘지락’은 ‘지극한 즐거움’이라는 뜻으로 「지락」 편의 수록된 첫 문장의 첫 단어에서 따온 것이다. 그러나 ‘지락’은 이편에 실린 글 전반에 걸친 주제이기도 하다. 「지락」 편에서 장자는 지극한 즐거움이란 세속의 즐거움들, 이를테면 부귀함, 장수함, 안락함 같은 것들이 아니라 그러한 세속적 즐거움을 초월하여 있는 ‘무위자연’한 참된 경지에 도달함으로써 얻게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삶과 죽음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말한다. 세속에서는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하지만, 이러한 구분을 초월함으로써 참되게 지극한 즐거움을 얻게 된다고 한다. 고전 본문 [가]와 [나]는 이러한 장자의 관점을 서로 다른 각도에서 환기하는 내용의 글이다.
고전본문
[가] 장자의 아내가 죽자 혜시가 조문하러 갔더니 장자는 두 다리를 쭉 뻗고 앉아 질동이를 두드리며 노래하고 있었다. 혜시가 이렇게 말했다. “아내와 함께 살면서 자식을 키우다가 늙어서 이제 그 몸이 죽었다. 곡을 하지 않는 것은 그래도 괜찮으나 질동이를 두드리며 노래하는 것은 너무 심하지 않은가?” 장자가 말했다. “그렇지 않다네. 이 사람이 처음 죽었을 때 난들 어찌 슬프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이 사람이란 존재의 처음을 살펴보았더니, 이 사람으로 태어나기 전에는 본래 생명이 없었고, 그저 생명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본래 형체도 없었으며, 형체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본래 기(氣)조차 없었다네. 막막하고 황홀한 가운데 섞여 있다가 변화하여 기가 생기고, 기가 변하여 형체를 갖추게 되며, 형체가 변하여 생명이 생겼다가 지금 또 변화해서 죽음으로 갔다네. 이는 서로 함께하여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로 운행됨과 같은 것이지. 이 사람이 천지라는 큰 집에서 편안히 쉬고 있는데 내가 시끄럽게 떠들면서 습속을 따라 곡을 하는 것은 스스로 천명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여겼기에 그만두었던 것이네.”
[나] 장자가 초나라로 가다가 앙상한 해골을 밟았는데 바싹 마른 상태였다. 장자는 말채찍으로 해골을 치면서 물었다. “그대는 삶을 탐내다가 도리를 잃어 이렇게 되었는가? 아니면 그대는 나라를 망친 일로 도끼로 사형을 당하여 이렇게 되었는가? 그것도 아니라면 그대는 선하지 않은 일을 하여 부모, 처자를 추하게 한 것을 부끄러워하여 이렇게 되었는가? 혹 먹고사는 문제로 인한 근심이 있어 이렇게 되었는가? 이도저도 아니라면 그대는 천수를 다 살았던 까닭에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이렇게 말하고 나서 장자는 그 해골을 가져다가 베고 누워서 잠들었다. 한밤중에 해골이 장자의 꿈에 나타나 말했다. “그대의 말은 말 잘하는 유세가 같았소. 그런데 그대가 말한 바를 보니 모두가 살아 있는 사람들이 짊어지고 있는 짐이었소. 그런데 죽으면 그러한 짐들은 없어진다네. 그대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은가?” 장자가 답했다. “그러세.” 그러자 해골이 말했다. “죽음에는 위로는 임금이 없고 아래로는 신하가 없네. 또한 사계절의 변화도 없지. 그저 고요히 천지와 수명을 같이할 뿐이지만 임금 노릇하는 즐거움도 이곳에서의 즐거움보다 낫지 못하다네.” 장자는 그 말을 믿겨지지 않아 말했다. “내가 생명을 관장하는 신으로 그대의 생전 형체를 재생시키고 그대의 골육과 피부를 되살리게 하여 자네의 부모와 처자, 마을 사람들에게 돌려보내 그대가 돌아왔음을 알리고자 하는데, 그대는 그것을 바라는가?” 그러자 해골은 눈썹을 치켜 올리면서 사납게 노려보고는 콧마루를 찡그리면서 말했다. “내가 어찌 왕 노릇하는 즐거움보다 더 큰 여기서의 즐거움을 버리고 살아 있는 인간의 고생을 반복하겠는가?”
[원문]
[가] 莊子妻死, 惠子弔之, 莊子則方箕踞鼓盆而歌. 惠子曰, “與人居, 長者, 老, 身死. 不哭, 亦足矣, 又鼓盆而歌, 不亦甚乎.” 莊子曰, “不然. 是其始死也, 我獨何能無槪然. 察其始而本無生, 非徒無生也而本無形, 非徒無形也而無氣. 雜乎芒芴之間, 變而有氣, 氣變而有形, 形變而有生, 今又變而之死. 是相與爲春秋冬夏四時行也. 人且偃然寢於巨室, 而我噭噭然隨而哭之, 自以爲不通乎命, 故止也.”
[나] 莊子之楚, 見空躅髏, 髐然有形. 撽以馬捶因而問之曰, “夫子貪生失理, 而爲此乎. 將子有亡國之事, 斧鉞之誅, 而爲此乎. 將子有不善之行, 愧遺父母妻子之醜, 而爲此乎. 將子有凍餒之患, 而爲此乎. 將子之春秋故及此乎.” 於是語卒, 援髑髏, 枕而臥. 夜半, 髑髏見夢曰, “子之談者似辯士. 視子所言, 皆生人之累也, 死則無此矣. 子欲聞死之說乎.” 莊子曰, “然.” 髑髏曰, “死, 無君於上, 無臣於下, 亦無四時之事, 從然以天地爲春秋, 雖南面王樂, 不能過也.” 莊子不信曰, “吾使司命復生子形, 爲子骨肉肌膚, 反子父母妻子閭里知識, 子欲之乎.” 髑髏深矉蹙頞曰, “吾安能棄南面王樂而復爲人間之勞乎.”
[출전]『장자』
토론하기
(1) 고전 본문 [가], [나]에 드러나 있는 삶과 죽음에 대한 관점을 정리해보자. 또한 [가]에 드러난 관점과 [나]에 드러난 관점 사이의 차이점을 짚어보고, 왜 그러한 차이가 생겼는지에 대해 토의해보자.
(2) 고전 본문 [나]의 해골이 만약 [가]에 나오는 장자가 죽어 된 해골이었다면, 그 해골은 ‘살아 있는 인간’ 장자에게 무슨 말을 했을까?
(3) 장자는 무엇을 근거로 삶과 죽음에 본질적 차이가 없다고 보았는가? 이러한 장자의 관점이 현대사회에서 어떠한 의미를 지닐 수 있는지에 대하여 토의해보자.
해설읽기
고전 본문 [가]에는 죽음과 삶이 본질적 차이가 없다는 관점이 표출되어 있고, [나]에는 죽음이 삶보다 낫다는 관점이 드러나 있다. [가]에서 장자가 죽음과 삶에 본질적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 근거는 다음과 같다.
보통 죽음하면 살아 있던 사람이 소멸된다는 차원에서 사유한다. 그래서 저 옛날부터 죽은 자를 장사지내는 일련의 과정을 ‘상(喪)’을 치른다고 해왔다. 喪은 ‘잃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장자는 살아 있던 사람이 소멸되는 쪽에서 죽음에 접근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사람이 살게 된 시점, 그러니까 사람으로 존재하기 시작된 시점 쪽에서 접근했다. 어떤 사람이 태어나기 전에 그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음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그러다 무언가가 “막막하고 황홀한 가운데 섞여 있다가 변화하여 기가 생기고, 기가 변하여 형체를 갖추게 되며, 형체가 변하여 생명이 생겨” 그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다. 여기서 ‘막막하고 황홀하다’는 것은 ‘무언가’가 있는 세계는 인간의 인지 능력으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차원이기에 인간에게는 그저 그렇게만 인지된다는 것이다. 기가 그러한 “막막하고 황홀한 가운데 섞여 있다가 변화하여” 생겨났다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알 수 없는 차원에 있는 무언가가 인간도 알 수 있는 바로 변이된 결과기 기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 기로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이 생겨났다는 얘기다.
따라서 사람은 누구나 사람으로 존재하기 전에는 사람으로 존재하지 않았던 상태로 있다가 이러한 기가 변하여 사람으로 존재하게 된 것이다. 죽음은 그렇게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이 사람이 되어 사람으로서 살아가다가, 다시 말해 존재해 있다가 다시 존재하지 않았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이니, 결국 우주자연 차원에서는 상실된 바가 없다. 장자와 같은 도가 계열의 고전인 회남자(淮南子)란 책에서 “내가 살아 있는 때는 만물과 같이 형체를 지닌 것들의 세계에 속하지만, 죽으면 형체가 없는 존재들의 세계로 들어간다. 내가 태어났다고 하여 만물의 수가 증가하는 것도 아니고, 죽는다고 해서 흙이 더 많아지는 것도 아니다”(「정신훈(精神訓)」)라고 정리한 까닭이다. 그러니 누군가가 죽었다고 하여 애달피 울고 서러워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장자의 생각이다. 삶과 죽음은 없는 데서 있게 되고, 있는 데서 없게 된다는 겉으로 드러나는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표피적인 차이에 불과하고, 근본적 차원에서는 이렇듯 애초의 상태로 회귀하는 것이므로 그 둘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삶과 죽음에 대한 장자의 이러한 관점에서 반드시 유의해야 할 것이 있다. 죽음을 생명이 있기 전의 본래의 상태로 회귀하는 것으로 봤다고 하여 그가 죽음을 권장한 일은 절대로 없다는 점이다. 장자는 죽음을 지나치게 두려워하거나 그것 때문에 불안에 젖는 일 등에 대하여 그럴 필요가 없다는 점을 일러주었을 따름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에 드러난 죽음에 대한 장자의 관점은 생명에 대한 존중과 밀접하게 연동되어 있음을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가]는 죽음의 공포, 불안 따위로부터 벗어나서 살아 있는 동안에는 생명체로서의 삶에 충실하라고 권고한 것으로 뒤집어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자는 스스로 삶을 마감하는 행위에 대하여 그 어느 곳에서도 동의한 적이 없다. 생명을 띠고 있는 기간 동안에는 생명을 지닌 존재로서의 삶에 충실하고, 그러다 생명이 소진되어 죽음이 가까워지면 두려워하거나 불안해하지 말고, 공포에 젖지도 말고 담담하게 죽음을 맞이하면 된다는 것이 장자 논의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고전 본문 [나]도 마찬가지다. 문면으로는 삶보다는 죽음이 더 낫다는 관점이 드러나 있지만, 이는 역설적 진술로 읽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죽음으로 인해 살았을 적의 온갖 부담과 걱정으로부터 자유로워졌는데 어찌 다시 살아 있을 적으로 되돌아가겠느냐는 [나] 속 해골의 말은 정확하게 반대로 읽어야 한다는 얘기다. 해골이 말하는 좋음은 죽은 자로서의 좋음이지 산 자로서의 좋음은 아니다. 다시 말해 장자는 죽은 자로서의 좋음이 산 자로서의 좋음보다 낫다고 말한 것이 아니다. 장자가 교묘한 트릭을 사용한 셈이다. 산 자로서의 힘듦에 죽은 자로서의 좋음을 비교한 다음에 죽은 자로서의 좋음이 더 낫다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만약 장자가 진정으로 죽은 자로서의 좋음이 더 낫다고 주장하고자 했다면 죽은 자로서의 좋음과 비교하는 대상은 산 자로서의 힘듦이 아니라 산 자로서의 좋음이었어야 한다. 결국 죽음의 좋음은 삶의 힘듦의 대안은 될 수 있을지언정 삶의 좋음에 대한 대안은 결코 될 수 없음을 장자는 역설적으로 환기한 것이다. 또한 장자는 삶의 힘듦에 비하면 죽음이 좋다고 말함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그러면 삶의 좋음은 무엇일까를 따져보게 하는 고도의 수사 전략을 구사했던 것이다.
키워드
삶, 생사관, 아내 상에서 노래한 장자, 죽음, 환생을 거부한 해골
전후맥락
고전 본문 [가]와 [나]는 「지락(至樂)」 편에 실려 있다. ‘지락’은 ‘지극한 즐거움’이라는 뜻으로 「지락」 편의 수록된 첫 문장의 첫 단어에서 따온 것이다. 그러나 ‘지락’은 이편에 실린 글 전반에 걸친 주제이기도 하다. 「지락」 편에서 장자는 지극한 즐거움이란 세속의 즐거움들, 이를테면 부귀함, 장수함, 안락함 같은 것들이 아니라 그러한 세속적 즐거움을 초월하여 있는 ‘무위자연’한 참된 경지에 도달함으로써 얻게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삶과 죽음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말한다. 세속에서는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하지만, 이러한 구분을 초월함으로써 참되게 지극한 즐거움을 얻게 된다고 한다. 고전 본문 [가]와 [나]는 이러한 장자의 관점을 서로 다른 각도에서 환기하는 내용의 글이다.
고전본문
[가] 장자의 아내가 죽자 혜시가 조문하러 갔더니 장자는 두 다리를 쭉 뻗고 앉아 질동이를 두드리며 노래하고 있었다. 혜시가 이렇게 말했다. “아내와 함께 살면서 자식을 키우다가 늙어서 이제 그 몸이 죽었다. 곡을 하지 않는 것은 그래도 괜찮으나 질동이를 두드리며 노래하는 것은 너무 심하지 않은가?” 장자가 말했다. “그렇지 않다네. 이 사람이 처음 죽었을 때 난들 어찌 슬프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이 사람이란 존재의 처음을 살펴보았더니, 이 사람으로 태어나기 전에는 본래 생명이 없었고, 그저 생명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본래 형체도 없었으며, 형체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본래 기(氣)조차 없었다네. 막막하고 황홀한 가운데 섞여 있다가 변화하여 기가 생기고, 기가 변하여 형체를 갖추게 되며, 형체가 변하여 생명이 생겼다가 지금 또 변화해서 죽음으로 갔다네. 이는 서로 함께하여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로 운행됨과 같은 것이지. 이 사람이 천지라는 큰 집에서 편안히 쉬고 있는데 내가 시끄럽게 떠들면서 습속을 따라 곡을 하는 것은 스스로 천명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여겼기에 그만두었던 것이네.”
[나] 장자가 초나라로 가다가 앙상한 해골을 밟았는데 바싹 마른 상태였다. 장자는 말채찍으로 해골을 치면서 물었다. “그대는 삶을 탐내다가 도리를 잃어 이렇게 되었는가? 아니면 그대는 나라를 망친 일로 도끼로 사형을 당하여 이렇게 되었는가? 그것도 아니라면 그대는 선하지 않은 일을 하여 부모, 처자를 추하게 한 것을 부끄러워하여 이렇게 되었는가? 혹 먹고사는 문제로 인한 근심이 있어 이렇게 되었는가? 이도저도 아니라면 그대는 천수를 다 살았던 까닭에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이렇게 말하고 나서 장자는 그 해골을 가져다가 베고 누워서 잠들었다. 한밤중에 해골이 장자의 꿈에 나타나 말했다. “그대의 말은 말 잘하는 유세가 같았소. 그런데 그대가 말한 바를 보니 모두가 살아 있는 사람들이 짊어지고 있는 짐이었소. 그런데 죽으면 그러한 짐들은 없어진다네. 그대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은가?” 장자가 답했다. “그러세.” 그러자 해골이 말했다. “죽음에는 위로는 임금이 없고 아래로는 신하가 없네. 또한 사계절의 변화도 없지. 그저 고요히 천지와 수명을 같이할 뿐이지만 임금 노릇하는 즐거움도 이곳에서의 즐거움보다 낫지 못하다네.” 장자는 그 말을 믿겨지지 않아 말했다. “내가 생명을 관장하는 신으로 그대의 생전 형체를 재생시키고 그대의 골육과 피부를 되살리게 하여 자네의 부모와 처자, 마을 사람들에게 돌려보내 그대가 돌아왔음을 알리고자 하는데, 그대는 그것을 바라는가?” 그러자 해골은 눈썹을 치켜 올리면서 사납게 노려보고는 콧마루를 찡그리면서 말했다. “내가 어찌 왕 노릇하는 즐거움보다 더 큰 여기서의 즐거움을 버리고 살아 있는 인간의 고생을 반복하겠는가?”
[원문]
[가] 莊子妻死, 惠子弔之, 莊子則方箕踞鼓盆而歌. 惠子曰, “與人居, 長者, 老, 身死. 不哭, 亦足矣, 又鼓盆而歌, 不亦甚乎.” 莊子曰, “不然. 是其始死也, 我獨何能無槪然. 察其始而本無生, 非徒無生也而本無形, 非徒無形也而無氣. 雜乎芒芴之間, 變而有氣, 氣變而有形, 形變而有生, 今又變而之死. 是相與爲春秋冬夏四時行也. 人且偃然寢於巨室, 而我噭噭然隨而哭之, 自以爲不通乎命, 故止也.”
[나] 莊子之楚, 見空躅髏, 髐然有形. 撽以馬捶因而問之曰, “夫子貪生失理, 而爲此乎. 將子有亡國之事, 斧鉞之誅, 而爲此乎. 將子有不善之行, 愧遺父母妻子之醜, 而爲此乎. 將子有凍餒之患, 而爲此乎. 將子之春秋故及此乎.” 於是語卒, 援髑髏, 枕而臥. 夜半, 髑髏見夢曰, “子之談者似辯士. 視子所言, 皆生人之累也, 死則無此矣. 子欲聞死之說乎.” 莊子曰, “然.” 髑髏曰, “死, 無君於上, 無臣於下, 亦無四時之事, 從然以天地爲春秋, 雖南面王樂, 不能過也.” 莊子不信曰, “吾使司命復生子形, 爲子骨肉肌膚, 反子父母妻子閭里知識, 子欲之乎.” 髑髏深矉蹙頞曰, “吾安能棄南面王樂而復爲人間之勞乎.”
[출전]『장자』
토론하기
(1) 고전 본문 [가], [나]에 드러나 있는 삶과 죽음에 대한 관점을 정리해보자. 또한 [가]에 드러난 관점과 [나]에 드러난 관점 사이의 차이점을 짚어보고, 왜 그러한 차이가 생겼는지에 대해 토의해보자.
(2) 고전 본문 [나]의 해골이 만약 [가]에 나오는 장자가 죽어 된 해골이었다면, 그 해골은 ‘살아 있는 인간’ 장자에게 무슨 말을 했을까?
(3) 장자는 무엇을 근거로 삶과 죽음에 본질적 차이가 없다고 보았는가? 이러한 장자의 관점이 현대사회에서 어떠한 의미를 지닐 수 있는지에 대하여 토의해보자.
해설읽기
고전 본문 [가]에는 죽음과 삶이 본질적 차이가 없다는 관점이 표출되어 있고, [나]에는 죽음이 삶보다 낫다는 관점이 드러나 있다. [가]에서 장자가 죽음과 삶에 본질적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 근거는 다음과 같다.
보통 죽음하면 살아 있던 사람이 소멸된다는 차원에서 사유한다. 그래서 저 옛날부터 죽은 자를 장사지내는 일련의 과정을 ‘상(喪)’을 치른다고 해왔다. 喪은 ‘잃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장자는 살아 있던 사람이 소멸되는 쪽에서 죽음에 접근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사람이 살게 된 시점, 그러니까 사람으로 존재하기 시작된 시점 쪽에서 접근했다. 어떤 사람이 태어나기 전에 그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음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그러다 무언가가 “막막하고 황홀한 가운데 섞여 있다가 변화하여 기가 생기고, 기가 변하여 형체를 갖추게 되며, 형체가 변하여 생명이 생겨” 그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다. 여기서 ‘막막하고 황홀하다’는 것은 ‘무언가’가 있는 세계는 인간의 인지 능력으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차원이기에 인간에게는 그저 그렇게만 인지된다는 것이다. 기가 그러한 “막막하고 황홀한 가운데 섞여 있다가 변화하여” 생겨났다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알 수 없는 차원에 있는 무언가가 인간도 알 수 있는 바로 변이된 결과기 기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 기로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이 생겨났다는 얘기다.
따라서 사람은 누구나 사람으로 존재하기 전에는 사람으로 존재하지 않았던 상태로 있다가 이러한 기가 변하여 사람으로 존재하게 된 것이다. 죽음은 그렇게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이 사람이 되어 사람으로서 살아가다가, 다시 말해 존재해 있다가 다시 존재하지 않았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이니, 결국 우주자연 차원에서는 상실된 바가 없다. 장자와 같은 도가 계열의 고전인 회남자(淮南子)란 책에서 “내가 살아 있는 때는 만물과 같이 형체를 지닌 것들의 세계에 속하지만, 죽으면 형체가 없는 존재들의 세계로 들어간다. 내가 태어났다고 하여 만물의 수가 증가하는 것도 아니고, 죽는다고 해서 흙이 더 많아지는 것도 아니다”(「정신훈(精神訓)」)라고 정리한 까닭이다. 그러니 누군가가 죽었다고 하여 애달피 울고 서러워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장자의 생각이다. 삶과 죽음은 없는 데서 있게 되고, 있는 데서 없게 된다는 겉으로 드러나는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표피적인 차이에 불과하고, 근본적 차원에서는 이렇듯 애초의 상태로 회귀하는 것이므로 그 둘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삶과 죽음에 대한 장자의 이러한 관점에서 반드시 유의해야 할 것이 있다. 죽음을 생명이 있기 전의 본래의 상태로 회귀하는 것으로 봤다고 하여 그가 죽음을 권장한 일은 절대로 없다는 점이다. 장자는 죽음을 지나치게 두려워하거나 그것 때문에 불안에 젖는 일 등에 대하여 그럴 필요가 없다는 점을 일러주었을 따름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에 드러난 죽음에 대한 장자의 관점은 생명에 대한 존중과 밀접하게 연동되어 있음을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가]는 죽음의 공포, 불안 따위로부터 벗어나서 살아 있는 동안에는 생명체로서의 삶에 충실하라고 권고한 것으로 뒤집어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자는 스스로 삶을 마감하는 행위에 대하여 그 어느 곳에서도 동의한 적이 없다. 생명을 띠고 있는 기간 동안에는 생명을 지닌 존재로서의 삶에 충실하고, 그러다 생명이 소진되어 죽음이 가까워지면 두려워하거나 불안해하지 말고, 공포에 젖지도 말고 담담하게 죽음을 맞이하면 된다는 것이 장자 논의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고전 본문 [나]도 마찬가지다. 문면으로는 삶보다는 죽음이 더 낫다는 관점이 드러나 있지만, 이는 역설적 진술로 읽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죽음으로 인해 살았을 적의 온갖 부담과 걱정으로부터 자유로워졌는데 어찌 다시 살아 있을 적으로 되돌아가겠느냐는 [나] 속 해골의 말은 정확하게 반대로 읽어야 한다는 얘기다. 해골이 말하는 좋음은 죽은 자로서의 좋음이지 산 자로서의 좋음은 아니다. 다시 말해 장자는 죽은 자로서의 좋음이 산 자로서의 좋음보다 낫다고 말한 것이 아니다. 장자가 교묘한 트릭을 사용한 셈이다. 산 자로서의 힘듦에 죽은 자로서의 좋음을 비교한 다음에 죽은 자로서의 좋음이 더 낫다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만약 장자가 진정으로 죽은 자로서의 좋음이 더 낫다고 주장하고자 했다면 죽은 자로서의 좋음과 비교하는 대상은 산 자로서의 힘듦이 아니라 산 자로서의 좋음이었어야 한다. 결국 죽음의 좋음은 삶의 힘듦의 대안은 될 수 있을지언정 삶의 좋음에 대한 대안은 결코 될 수 없음을 장자는 역설적으로 환기한 것이다. 또한 장자는 삶의 힘듦에 비하면 죽음이 좋다고 말함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그러면 삶의 좋음은 무엇일까를 따져보게 하는 고도의 수사 전략을 구사했던 것이다.
키워드
삶, 생사관, 아내 상에서 노래한 장자, 죽음, 환생을 거부한 해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