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맥락
고전 본문 [가]는 『안씨가훈』 중 「양생(養生)」 편에 실려 있는 세 편의 글 중 하나이다. ‘양생’은 ‘삶을 잘 돌본다’는 뜻으로, 정신과 신체의 건강함을 잘 보존하면서 정신과 신체에 해가 될 만한 것으로부터 정신과 신체를 지켜감을 삶의 최우선의 가치로 두는 삶의 태도를 말한다. 안지추가 살았던 시대는 전란이 빈발했던 혼란기였기 때문에 양생의 주장이 크게 성행하였는데, 「양생(養生)」 편에는 이에 대한 안지추의 관점이 드러나 있다. 고전 본문 [가]는 그 중 하나로 삶, 죽음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또 관점을 지녀야 하는지에 대한 안지추의 사유가 서술되어 있다.
고전 본문 [나]는『맹자』, 「진심상(盡心上)」 편에 실려 있는 대목이다. 「진심상」 편은『맹자』 7편 중 마지막 편으로, 여기에는 특정 주제에 대하여 맹자가 비교적 간단하게 언급한 말이 다수 실려 있다. 고전 본문 [나]는 맹자가 ‘운명’과 ‘죽음’이라는 주제에 대하여 언급한 말의 전문이다.
고전본문
[가] 무릇 목숨이란 아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이기는 하나 그렇다고 구차스럽게 아껴서도 안 된다. 매우 두렵고 험한 길을 걷거나, 재난과 재앙에 간여하면서 탐욕으로 인해 목숨을 상하게 하거나, 거짓되고 간사함으로 인해 죽음을 초래하는 일, 이러한 것은 군자로서 목숨을 아끼는 바이다. 충성과 효도를 행하다가 해를 입거나, 어짊과 의로움을 실천하다가 죄를 범하는 것, 자신을 희생하여 가문을 온전히 하거나, 자기 한 몸을 죽여 나라를 구하는 것, 이는 군자가 목숨을 잃어도 탓하지 않는다. 일전에 일어났던 난리 이후로 내가 본 이름난 신하와 어진 학인들은 난리에 임해서는 제 살길 구하느라 결국은 난리를 그치게 하려 하지 않고 한갓 궁색한 치욕을 자초하여 사람들의 분노와 증오를 샀다. 후경이 일으킨 난리 때에는 왕족과 고위 관리들이 다수 죽임을 당했고 왕의 처첩들 가운데 온전한 자가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오직 오군의 태수 장승만이 의군을 일으켰으나 반란군을 물리치지 못하고 적들에게 해를 당함에 죽는 순간에도 언행과 안색에 조금도 굴복함이 없었다. 파양왕의 세자빈인 사 부인은 지붕에 올라가 반란군을 욕하고 꾸짖다가 화살을 맞고 죽었다. 이 부인이 바로 사준의 딸이었다. 어찌하여 어질고 지혜롭다고 하는 이들이 품행 지키기를 이처럼 어려워하고, 처와 첩들은 스스로의 목숨 결단을 이리도 쉽게 한단 말인가! 슬프도다!
[나] 사람의 일은 모두 운명 아님이 없으나 그 정명(正命)을 따르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므로 정명을 아는 사람은 곧 쓰러질 것 같은 위태한 담장 아래에 서지 않는다. 자기가 할 수 있는 도리를 다하고 죽는 것이 정명이고, 죄를 지어 형으로 죽는 것이 비명(非命)이다.
[가] 夫生不可不惜, 不可苟惜. 涉險畏之途, 干禍難之事, 貪欲以傷生, 讒慝而致死, 此君子之所惜哉. 行誠孝而見賊, 履仁義而得罪, 喪身以全家, 泯軀而濟國, 君子不咎也. 自亂離已來, 吾見名臣賢士, 臨難求生, 終爲不救, 徒取窘辱, 令人憤懣. 侯景之亂, 王公將相, 多被戮辱, 妃主姬妾, 略無全者. 唯吳郡太守張嵊, 建義不捷, 爲賊所害, 辭色不撓. 及鄱陽王世子謝夫人, 登屋詬怒, 見射而斃. 夫人, 謝遵女也. 何賢智操行若此之難. 婢妾引決若此之易. 悲夫.
[나] 孟子曰, “莫非命也, 順受其正. 是故知命者不立乎巖墻之下. 盡其道而死者正命也, 桎梏死者는 非正命也.
[출전]『안씨가훈, 맹자』
토론하기
(1) 고전 본문 [가]에서는 목숨을 아껴야 하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로 나누고 있다. 목숨을 아껴야 하는 이유와 아끼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찾아보고, 이렇게 나누는 관점에 대하여 토의해보자.
(2) 고전 본문 [나]의 관점에 섰을 때 인간의 노력은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는지, 인간은 노력을 통해 어디까지 할 수 있게 되는지 등에 대하여 토의해보자.
(3) 운명은 있다고 생각하는가, 없다고 생각하는가? 자신의 생각을 얘기해보되 자신의 직접적, 간접적 경험이나 문헌이나 전문가의 견해 등을 근거로 들어서 이야기해보자.
해설읽기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라는 속담이 있다. 사람들이 죽음보다는 삶에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해왔음을 잘 말해주는 증거다. 사실 사람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능한 삶을 연장하고자 지난한 노력을 기울여왔고 또 기울이고 있다. 이는 의학이나 약학이 저 먼 옛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발달해왔다는 점만으로도 금방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그만큼 삶에 대한 애착이 컸던 것이고 반대로 죽음에 대한 꺼림도 컸던 것이다. 고전 본문 [가]와 [나]의 논의는 이러한 사람들의 인지상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삶에 죽음보다 더 나은 가치를 부여하고 있어야 비로소 ‘가치 있는 죽음/삶’, ‘무가치한 삶/죽음’과 같은 논의가 성립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에서 저자 안지추는 유학자답게 유가의 윤리도덕을 바탕으로 가치 있는 죽음과 무가치한 죽음을 구분한다. 그 또한 기본 전제는 생명은 소중한 것이니만큼 가능한 생명은 아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생명을 아끼는 이유나 목적이 탐욕을 위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고 잘라 말한다. 탐욕에 젖어 있다 보면 위험이 도사린 거칠고 두려운 길도 마다하지 않게 되고 때로는 재난과 재앙도 피하지 않는다. 거짓과 간사함도 일삼는다. 그렇게 일탈과 패륜, 탈법을 무릅쓰고 탐욕을 채우다 보면 죽음에 가깝게 다가가게 되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다. 생명을 아낀다는 차원에서 발동된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욕망이 비틀어지고 뒤집혀져 결국에는 애초의 목적과는 정반대의 결과를 맞이하게 된다. 안지추는 이러한 죽음은 무가치하다고 단언한다. 이러한 안지추의 관점에 서면 탐욕을 위해 위험, 재난, 재앙, 일탈, 불법 등을 무릅쓰는 삶도 무가치한 삶이 된다. 반대로 충성, 효도, 어짊, 의로움 같은 윤리도덕을 실천한다거나 자신을 희생하여 가문이나 나라를 구하는 살신성인 등에는 생명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같은 맥락에서 안지추는 지난번 반란이 일어났을 때 이른바 ‘어질고 지혜롭다고 운위되던 이들’ 중에는 윤리도덕의 실현을 위해 살신성인한 이가 너무 적었음을, 당시로서는 남성보다 못하다고 인식됐던 여성 중에 오히려 살신성인한 이가 나왔음을 통탄해 했다. 생명을 아끼는 것은 분명 가치 있는 일이지만, 인간이 사회를 이루고 사는 한에 있어서는 생명만큼, 아니 그보다 더 큰 다른 가치가 있을 수밖에 없는 만큼, 더 큰 가치의 실현을 위해서는 생명을 기꺼이 포기할 수 있어야 함을 분명하게 표명한 것이다.
[나]에서 맹자도 [가]의 안지추와 기본 전제를 공유한다. 삶은 죽음에 비해 소중하다는 것이다. 여기에 맹자는 전제를 하나 더한다. 맹자의 다른 곳에서 그는 천명, 그러니까 운명은 사람으로서는 피해갈 수 없는 것인 만큼 이를 담담하게 받아들이자고 제안한다. 장수할 운명인지 그렇지 못한 운명인지에 얽매이지 말자는 것이다. 이러한 전제 위에서 맹자는 ‘정명(正命)’의 삶을 얘기한다. “운명을 바르게 행하다”는 뜻의 정명은 자기가 할 수 있는 도리를 다하고 피할 수 없는 죽음이라는 운명을 맞이하는 것을 말한다. 그 반대는 “운명을 잘못 행하다”는 뜻의 ‘비명(非命)’이다. 가령 범죄를 저질러 형벌을 받아 죽는 것이나 위험이나 재난, 재앙 등이 일어날 가능성이 큼에도 예컨대 탐욕 등 때문에 이를 피하지 않아 죽게 된 것이 비명이다. 죽음을 피할 수 없다면 그것에 더는 얽매이지 말고, 죽기까지의 과정을 도덕적 떳떳함으로 채워가자는 제안이다.
그렇기에 정명이나 비명은 죽음에 대한 언급인 동시에 삶에 대한 언급이다. 운명을 바르게 행한다는 것은 결국 살아 있는 동안에 도덕적으로 떳떳한 삶을 사는 것이 되기에 그러하다. 곧 바르게 살아감이 곧 바르게 죽어감이 된다는 뜻이다. 죽음이 살아가는 기간의 짧고 긺과 무관하게 인간 누구에게나 닥쳐오는 것이라면, 아무리 노력을 해도 그러한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관점을 바꾸어 살아 있는 동안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는 관점이다. 그렇게 좋은 삶을 구현하는 것이 곧 좋은 죽음을 맞이하는 한 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중세 유럽의 현자 세네카의 죽음에 대한 통찰을 읊조려봄도 의미 있다.
우리는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의 심연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죽어가고 있다. “우리는 하루하루 죽어가고 있네. 왜냐하면, 우리는 하루하루 수명의 일부를 빼앗기고 있고, 자라는 동안에도 수명이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네. 우리는 이미 유년기를, 이어서 소년기를, 다시 청년기를 잃었네. 어제까지 줄곧, 지나간 모든 시간들을 잃어 온 것이네. 지금 지나고 있는 오늘 이 하루도, 우리는 죽음과 함께 공유하고 있는 셈이지. 물시계를 비우는 것은 마지막에 떨어지는 물방울이 아니라, 그때까지 떨어진 모든 물방울이네, 그것과 마찬가지로, 최후를 맞이하여 우리가 이미 존재하지 않게 될 때, 그때만이 죽음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는 걸세. 다만 죽음을 완결시킬 뿐이지. 그때 우리는 죽음에 이르지만, 그곳에 이를 때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이라네.”(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 세네카 인생론, 김천운 옮김, 동서문화사, 2007, 420쪽.)
이러한 관점에 서면 살아가는 것이 곧 죽어가는 것이 된다. 이는 이렇게도 표현할 수 있다. “죽음은 삶의 완성!”이라고 말이다. 따라서 삶을 좋게 살아가는 것이 곧 좋은 죽음을 실현해가는 과정이 된다. 그러니 죽음에 대해 공포를 지니거나 불안해 할 이유가 없게 된다는 것이다.
키워드
맹자, 삶, 생사관, 세네카, 웰 다잉(well dying), 정명(正命), 죽음,
전후맥락
고전 본문 [가]는 『안씨가훈』 중 「양생(養生)」 편에 실려 있는 세 편의 글 중 하나이다. ‘양생’은 ‘삶을 잘 돌본다’는 뜻으로, 정신과 신체의 건강함을 잘 보존하면서 정신과 신체에 해가 될 만한 것으로부터 정신과 신체를 지켜감을 삶의 최우선의 가치로 두는 삶의 태도를 말한다. 안지추가 살았던 시대는 전란이 빈발했던 혼란기였기 때문에 양생의 주장이 크게 성행하였는데, 「양생(養生)」 편에는 이에 대한 안지추의 관점이 드러나 있다. 고전 본문 [가]는 그 중 하나로 삶, 죽음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또 관점을 지녀야 하는지에 대한 안지추의 사유가 서술되어 있다.
고전 본문 [나]는『맹자』, 「진심상(盡心上)」 편에 실려 있는 대목이다. 「진심상」 편은『맹자』 7편 중 마지막 편으로, 여기에는 특정 주제에 대하여 맹자가 비교적 간단하게 언급한 말이 다수 실려 있다. 고전 본문 [나]는 맹자가 ‘운명’과 ‘죽음’이라는 주제에 대하여 언급한 말의 전문이다.
고전본문
[가] 무릇 목숨이란 아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이기는 하나 그렇다고 구차스럽게 아껴서도 안 된다. 매우 두렵고 험한 길을 걷거나, 재난과 재앙에 간여하면서 탐욕으로 인해 목숨을 상하게 하거나, 거짓되고 간사함으로 인해 죽음을 초래하는 일, 이러한 것은 군자로서 목숨을 아끼는 바이다. 충성과 효도를 행하다가 해를 입거나, 어짊과 의로움을 실천하다가 죄를 범하는 것, 자신을 희생하여 가문을 온전히 하거나, 자기 한 몸을 죽여 나라를 구하는 것, 이는 군자가 목숨을 잃어도 탓하지 않는다. 일전에 일어났던 난리 이후로 내가 본 이름난 신하와 어진 학인들은 난리에 임해서는 제 살길 구하느라 결국은 난리를 그치게 하려 하지 않고 한갓 궁색한 치욕을 자초하여 사람들의 분노와 증오를 샀다. 후경이 일으킨 난리 때에는 왕족과 고위 관리들이 다수 죽임을 당했고 왕의 처첩들 가운데 온전한 자가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오직 오군의 태수 장승만이 의군을 일으켰으나 반란군을 물리치지 못하고 적들에게 해를 당함에 죽는 순간에도 언행과 안색에 조금도 굴복함이 없었다. 파양왕의 세자빈인 사 부인은 지붕에 올라가 반란군을 욕하고 꾸짖다가 화살을 맞고 죽었다. 이 부인이 바로 사준의 딸이었다. 어찌하여 어질고 지혜롭다고 하는 이들이 품행 지키기를 이처럼 어려워하고, 처와 첩들은 스스로의 목숨 결단을 이리도 쉽게 한단 말인가! 슬프도다!
[나] 사람의 일은 모두 운명 아님이 없으나 그 정명(正命)을 따르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므로 정명을 아는 사람은 곧 쓰러질 것 같은 위태한 담장 아래에 서지 않는다. 자기가 할 수 있는 도리를 다하고 죽는 것이 정명이고, 죄를 지어 형으로 죽는 것이 비명(非命)이다.
[가] 夫生不可不惜, 不可苟惜. 涉險畏之途, 干禍難之事, 貪欲以傷生, 讒慝而致死, 此君子之所惜哉. 行誠孝而見賊, 履仁義而得罪, 喪身以全家, 泯軀而濟國, 君子不咎也. 自亂離已來, 吾見名臣賢士, 臨難求生, 終爲不救, 徒取窘辱, 令人憤懣. 侯景之亂, 王公將相, 多被戮辱, 妃主姬妾, 略無全者. 唯吳郡太守張嵊, 建義不捷, 爲賊所害, 辭色不撓. 及鄱陽王世子謝夫人, 登屋詬怒, 見射而斃. 夫人, 謝遵女也. 何賢智操行若此之難. 婢妾引決若此之易. 悲夫.
[나] 孟子曰, “莫非命也, 順受其正. 是故知命者不立乎巖墻之下. 盡其道而死者正命也, 桎梏死者는 非正命也.
[출전]『안씨가훈, 맹자』
토론하기
(1) 고전 본문 [가]에서는 목숨을 아껴야 하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로 나누고 있다. 목숨을 아껴야 하는 이유와 아끼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찾아보고, 이렇게 나누는 관점에 대하여 토의해보자.
(2) 고전 본문 [나]의 관점에 섰을 때 인간의 노력은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는지, 인간은 노력을 통해 어디까지 할 수 있게 되는지 등에 대하여 토의해보자.
(3) 운명은 있다고 생각하는가, 없다고 생각하는가? 자신의 생각을 얘기해보되 자신의 직접적, 간접적 경험이나 문헌이나 전문가의 견해 등을 근거로 들어서 이야기해보자.
해설읽기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라는 속담이 있다. 사람들이 죽음보다는 삶에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해왔음을 잘 말해주는 증거다. 사실 사람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능한 삶을 연장하고자 지난한 노력을 기울여왔고 또 기울이고 있다. 이는 의학이나 약학이 저 먼 옛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발달해왔다는 점만으로도 금방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그만큼 삶에 대한 애착이 컸던 것이고 반대로 죽음에 대한 꺼림도 컸던 것이다. 고전 본문 [가]와 [나]의 논의는 이러한 사람들의 인지상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삶에 죽음보다 더 나은 가치를 부여하고 있어야 비로소 ‘가치 있는 죽음/삶’, ‘무가치한 삶/죽음’과 같은 논의가 성립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에서 저자 안지추는 유학자답게 유가의 윤리도덕을 바탕으로 가치 있는 죽음과 무가치한 죽음을 구분한다. 그 또한 기본 전제는 생명은 소중한 것이니만큼 가능한 생명은 아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생명을 아끼는 이유나 목적이 탐욕을 위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고 잘라 말한다. 탐욕에 젖어 있다 보면 위험이 도사린 거칠고 두려운 길도 마다하지 않게 되고 때로는 재난과 재앙도 피하지 않는다. 거짓과 간사함도 일삼는다. 그렇게 일탈과 패륜, 탈법을 무릅쓰고 탐욕을 채우다 보면 죽음에 가깝게 다가가게 되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다. 생명을 아낀다는 차원에서 발동된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욕망이 비틀어지고 뒤집혀져 결국에는 애초의 목적과는 정반대의 결과를 맞이하게 된다. 안지추는 이러한 죽음은 무가치하다고 단언한다. 이러한 안지추의 관점에 서면 탐욕을 위해 위험, 재난, 재앙, 일탈, 불법 등을 무릅쓰는 삶도 무가치한 삶이 된다. 반대로 충성, 효도, 어짊, 의로움 같은 윤리도덕을 실천한다거나 자신을 희생하여 가문이나 나라를 구하는 살신성인 등에는 생명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같은 맥락에서 안지추는 지난번 반란이 일어났을 때 이른바 ‘어질고 지혜롭다고 운위되던 이들’ 중에는 윤리도덕의 실현을 위해 살신성인한 이가 너무 적었음을, 당시로서는 남성보다 못하다고 인식됐던 여성 중에 오히려 살신성인한 이가 나왔음을 통탄해 했다. 생명을 아끼는 것은 분명 가치 있는 일이지만, 인간이 사회를 이루고 사는 한에 있어서는 생명만큼, 아니 그보다 더 큰 다른 가치가 있을 수밖에 없는 만큼, 더 큰 가치의 실현을 위해서는 생명을 기꺼이 포기할 수 있어야 함을 분명하게 표명한 것이다.
[나]에서 맹자도 [가]의 안지추와 기본 전제를 공유한다. 삶은 죽음에 비해 소중하다는 것이다. 여기에 맹자는 전제를 하나 더한다. 맹자의 다른 곳에서 그는 천명, 그러니까 운명은 사람으로서는 피해갈 수 없는 것인 만큼 이를 담담하게 받아들이자고 제안한다. 장수할 운명인지 그렇지 못한 운명인지에 얽매이지 말자는 것이다. 이러한 전제 위에서 맹자는 ‘정명(正命)’의 삶을 얘기한다. “운명을 바르게 행하다”는 뜻의 정명은 자기가 할 수 있는 도리를 다하고 피할 수 없는 죽음이라는 운명을 맞이하는 것을 말한다. 그 반대는 “운명을 잘못 행하다”는 뜻의 ‘비명(非命)’이다. 가령 범죄를 저질러 형벌을 받아 죽는 것이나 위험이나 재난, 재앙 등이 일어날 가능성이 큼에도 예컨대 탐욕 등 때문에 이를 피하지 않아 죽게 된 것이 비명이다. 죽음을 피할 수 없다면 그것에 더는 얽매이지 말고, 죽기까지의 과정을 도덕적 떳떳함으로 채워가자는 제안이다.
그렇기에 정명이나 비명은 죽음에 대한 언급인 동시에 삶에 대한 언급이다. 운명을 바르게 행한다는 것은 결국 살아 있는 동안에 도덕적으로 떳떳한 삶을 사는 것이 되기에 그러하다. 곧 바르게 살아감이 곧 바르게 죽어감이 된다는 뜻이다. 죽음이 살아가는 기간의 짧고 긺과 무관하게 인간 누구에게나 닥쳐오는 것이라면, 아무리 노력을 해도 그러한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관점을 바꾸어 살아 있는 동안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는 관점이다. 그렇게 좋은 삶을 구현하는 것이 곧 좋은 죽음을 맞이하는 한 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중세 유럽의 현자 세네카의 죽음에 대한 통찰을 읊조려봄도 의미 있다.
우리는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의 심연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죽어가고 있다. “우리는 하루하루 죽어가고 있네. 왜냐하면, 우리는 하루하루 수명의 일부를 빼앗기고 있고, 자라는 동안에도 수명이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네. 우리는 이미 유년기를, 이어서 소년기를, 다시 청년기를 잃었네. 어제까지 줄곧, 지나간 모든 시간들을 잃어 온 것이네. 지금 지나고 있는 오늘 이 하루도, 우리는 죽음과 함께 공유하고 있는 셈이지. 물시계를 비우는 것은 마지막에 떨어지는 물방울이 아니라, 그때까지 떨어진 모든 물방울이네, 그것과 마찬가지로, 최후를 맞이하여 우리가 이미 존재하지 않게 될 때, 그때만이 죽음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는 걸세. 다만 죽음을 완결시킬 뿐이지. 그때 우리는 죽음에 이르지만, 그곳에 이를 때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이라네.”(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 세네카 인생론, 김천운 옮김, 동서문화사, 2007, 420쪽.)
이러한 관점에 서면 살아가는 것이 곧 죽어가는 것이 된다. 이는 이렇게도 표현할 수 있다. “죽음은 삶의 완성!”이라고 말이다. 따라서 삶을 좋게 살아가는 것이 곧 좋은 죽음을 실현해가는 과정이 된다. 그러니 죽음에 대해 공포를 지니거나 불안해 할 이유가 없게 된다는 것이다.
키워드
맹자, 삶, 생사관, 세네카, 웰 다잉(well dying), 정명(正命), 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