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맥락
고전 본문은 도연명의 「만가」 3수의 전문이다. 도연명은 이 연작시를 통하여 산 자의 입장에서 망자, 그러니까 죽은 이를 조문하는 방향을 완전히 뒤집어, 자신이 망자가 되어 자기를 조문하러 온 산 자를 맞이한다. 또한 자신을 위하여 차려진 빈소의 모습도 서술하고, 발인을 마친 후 자신이 장지에 묻히는 과정에 대해서도, 장지에 묻힌 다음에 든 소회에 대해서도 서술한다. 이를 도연명은 죽음을 대하는 자신의 태도를 환기하였다. 한편 도연명의 「만가」에는 다소 해학이 느껴지는 대목도 있다. 살았을 때 그렇게 양껏 마시고 싶었던 술이 이제는 충분히 마련되었음에도 이제는 전혀 마시지 못한다고 함으로써 망자의 상태를 다소 익살스럽게 표현한다. 이러한 서술은 말하려 해도 입을 떨어지지 않고, 보려 해도 눈이 떠지지 않는다는 고백으로 이어지면서 삶과 죽음의 차이를 생생하게 드러내었다. 이 또한 도연명이 죽음을 다루는 방식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고전본문
생명이 있으면 반드시 죽음이 있으니, 일찍 죽는다고 하여 운명이 재촉한 것은 아니다.
어제 저녁에는 다 같이 사람이었는데, 오늘 아침에는 귀신 명부에 올라있구나.
혼은 흩어져 어디로 가는가, 말라버린 신체는 텅 빈 관속에 들어 있다.
아이들은 아비를 찾으며 울부짖고, 벗들은 나를 어루만지며 곡한다.
이해득실 다시는 모르게 되었나니, 시비인들 어찌 깨달을 수 있겠는가?
천년만년 지난 후에는, 그 누구도 내가 잘 살았는지 못 살았는지를 알지 못하리.
다만 한스러운 것은 살아생전, 양껏 술 마시지 못했음이라.(「만가1」)
살아서는 술 없어 못 마셨거늘, 이제는 공연히 술잔에 넘친다.
봄에 빚은 막걸리 쌀알이 떴거늘, 언제나 다시 마실 수 있을까.
내 앞에는 안주 수북한 상, 내 곁에는 곡하는 벗들.
말하려 해도 입에선 소리 안 나오고, 보려 해도 눈에는 빛이 들어오지 않는다.
살아서는 높은 집에 누웠으나, 이제는 황폐한 풀밭서 묵는다.
하루아침에 집에서 나왔는데, 되돌아가는 곳은 끝없는 밤이도다.(「만가2」)
시든 풀들 어찌 그리 넓게 돋았는지, 백양나무 바람결에 또한 휙휙 댄다.
찬 서리 내린 9월, 먼 교외로 날 전송한다.
사방엔 인가 하나 없고, 높은 무덤들만 우뚝 우뚝 솟아있다.
말은 하늘을 향해 울부짖고, 바람 절로 쓸쓸하게 분다.
묘실 한 번 닫히면, 다시는 영영 아침을 맞지 못하리.
다시는 영영 아침을 맞지 못함은, 현명한 자도 출세한 자도 어찌할 수 없도다.
여태까지 전송했던 사람들, 각기 다 제 집으로 돌아갔다.
친척 중 더러는 계속 슬퍼해도, 타인들은 더는 슬피 노래하지 않는다.
죽어서 무슨 할 말 있겠는가, 산언덕에 몸을 맡길 뿐이거늘.(「만가3」)
有生必有死, 早終非命促.
昨暮同爲人, 今旦在鬼錄.
魂氣散何之, 枯形寄空木.
嬌兒索父啼, 良友撫我哭.
得失不復知, 是非安能覺.
千秋萬歲後, 誰知榮與辱.
但恨在世時, 飮酒不得足.(「挽歌1」)
在昔無酒飮, 今但澹空觴.
春醪生浮蟻, 何時更能嘗.
肴案盈我前, 親舊哭我傍.
欲語口無音, 欲視眼無光.
昔在高堂寢, 今宿荒草鄕.
一朝出門去, 歸來夜未央.(「挽歌2」)
荒草何茫茫, 白楊亦蕭蕭.
嚴霜九月中, 送我出遠郊.
四面無人居, 高墳正嶕嶢.
馬爲仰天鳴, 風爲自蕭條.
幽室一已閉, 千年不復朝.
千年不復朝, 賢達無奈何.
向來相送人, 各已歸其家.
親戚或餘悲, 他人亦已歌.
死去何所道, 託體同山阿.(「挽歌3」)
[출전] 도연명,『만가』
토론하기
(1) 고전 본문의 내용을 토대로 도연명은 죽음에 대하여 어떠한 관점을 지니고 있는지를 짚어보도록 하자.
(2) 고전 본문의 내용을 토대로 삶과 죽음의 차이에 대하여 이야기해보자.
(3) 고전 본문은 도연명이 자신이 죽었을 때를 가정하여 쓴 시다. 이런 방식으로 죽음을 다루는 것의 장점과 단점에 대하여 논의해보자.
해설읽기
만가는 상여를 묘지로 메고 나갈 때 부르던 노래로 산 자가 죽은 자를 애도하는 내용을 띤다. 그런데 고전 본문의 만가는 이를 뒤집어 시적 화자가 망자가 되어 자신을 장례 치르는 모습과 무덤에 매장된 자신의 상황 등을 노래한 시다.
다시 말해 멀쩡히 살아있는 도연명이 자기가 망자가 됐을 때를 가정하여 읊은 자기 장례식장의 풍경과 발인을 끝내고 무덤에 묻힐 때, 또 묻힌 다음의 심회를 읊은 것이다. 그런데 이는, 망자가 지각이 있다고 여겼기에 가능한 상상이다. 고대 중국에서는 꽤 오래전부터 “사후존재 곧 귀신이 있는가?”란 물음과 함께 “망자가 지각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 지속적으로 던져졌고, 이는 적어도 공자 이래 지금에 이르기까지 유학에서 중요하게 다뤄져온 핵심 화두였다. 주류적 관점은 귀신이 존재하고 그들은 지각할 수 있다는 인식이었다. 사후존재가 지각하지 못하면 굳이 상례나 제례를 정성들여서 거행할 이유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자신이 망자가 되었을 때를 가정하여 읊어진 「만가」도 이러한 인식 위에 읊어졌다. 그래서 자신이 관에 담긴 채 상례가 치러지고, 땅에 묻혀 육신이 진토가 되는 과정을 노래할 수도 있었다. 예컨대 도연명의 선배 세대로 위진시대를 대표하는 문인이었던 육기(261~303)의 「만가」의 일부가 그러하다.
산사람은 갔다가도 돌아올 날 있건만 / 나는 떠나가서 돌아올 날 없다. / 전에는 사농공상들과 기거했지만 / 이제는 온갖 귀신들과 이웃이다. / …(중략)… / 풍만했던 살집은 땅강아지, 개미의 먹이이고 / 아름다운 자태는 영원히 멸하여 사라지리.
이러한 「만가」에서 주목할 점은 ‘죽음은 죽음, 삶은 삶’ 식으로 삶과 죽음이 이원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삶과 죽음을 연결하여 생사를 바라보는, 가령 장자나 열자 같은 도가들처럼 “삶과 죽음에는 본질적 차이가 없다”거나 “죽음은 삶이 있기 전의 원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식의 관점이 안 보인다. 또한 맹자 같은 유가들처럼 “죽음은 삶의 완성이다”와 같은 관점도 안 보인다. 도연명은 그저 ‘삶 대 죽음’이라는 이원적 회로 안에 머물러 있다. 그래서 죽은 이로서의 자신은 살아 있을 때 인간에게 그리도 중요시하던 ‘이해득실’을 다시는 모르게 되었고, ‘시비판단’을 다시는 내릴 수 없다고 증언한다. 이러한 관점은 도연명 자신이 망자가 됐다고 가정하고 지은 「나에게 받치는 내가 쓴 제문[자제문自祭文]」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허무하게도 어느덧 소멸되었다. 개탄스럽게도 이제는 멀어지게 되었다. 봉분을 쌓지도 않고 나무를 심지도 않았는데 시간은 급기야 흘러가버린다. 생전에 명예를 귀히 여기지 않았는데 사후에 칭송을 바라리오. 사람의 삶은 실로 지난했는데 죽음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도연명은 삶과 죽음이 연계되어 있다고 보지 않았기에, 다시 말해 죽음의 세계는 삶의 세계와 전혀 다르다고 인식했기에 이처럼 죽음의 세계에서 자신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물었던 것이다.
도연명의 이러한 관점은 죽음 이후의 세계가 실재한다는 사유가 확고하게 전제되어 있다. 다만 그 세계는 이승에서 사는 존재인 ‘나’는 직접 체험할 수 없다. 내가 알고 있게 알 수 있는 죽음은 어디까지나 이승에서 살아 있을 때 인지하는 죽음이지 죽어서 가게 된 죽음의 세계에서 망자로서 체험하는 죽음이 아니다. 단적으로 살아 있는 사람은 죽음에 대해 아무리 사유한다고 해도 죽음 그 자체를 알지 못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벗어나기 힘든 굴레를 지게 된다. 죽음 자체나 죽음 이후 세계는 인간으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바’인데, 그러한 정체불명의 죽음이 반드시 나에게 닥치기 때문에 그렇다. 알지 못하기만 해도 두려워하고 편치 않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인데 그 알 수 없는 것이 지니는, 지금 여기의 모든 것을 순식간에 중단시키고 무(無)로 돌려버리는 파괴력을 익히 알기에 더 공포스럽고 불안해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에서 죽음에 대해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하는 것일까?
도연명이 들고 나온 것은 일종의 ‘놀이’였다. 놀이는 현실과 비현실을, 가능과 불가능을 넘나든다. 놀이 속에서 어린아이들은 엄마가 되기도 하고 아빠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고 놀이에 규칙이 없는 것, 두서가 없는 것도 아니다. 아니 규칙에 의거하여야만 놀이는 성립된다. 물론 놀이를 통해 명증한 답을 얻지 못할 수 있다. 엄습해오는 불가지한 것에 대한 불안과 공포가 근본적으로 해소되는 것도 아니다. 대신 놀이하는 동안만큼은 무지 또는 불가지로 인해 야기되는 불안이나 두려움, 억압 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놀이가 지니는 효능이다. 문제를 이성 기반으로 확고하게 장악하지는 못해도 현장에 집중할 수 있는 인지적 근거를 마련할 수 있다는 점, 그러니까 죽음을 이성적으로 명료하게 파악하지는 못해도 삶에 집중할 수 있는 ‘살아냄’의 힘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고전 본문처럼 도연명이 죽음을 가지고 놀이하는 방식이 죽음을 대하는 또 하나의 유용한 방도가 될 수도 있다.
키워드
놀이, 만가, 생사관, 장송곡, 죽음, 죽음으로 놀이하기, 지각하는 망자
전후맥락
고전 본문은 도연명의 「만가」 3수의 전문이다. 도연명은 이 연작시를 통하여 산 자의 입장에서 망자, 그러니까 죽은 이를 조문하는 방향을 완전히 뒤집어, 자신이 망자가 되어 자기를 조문하러 온 산 자를 맞이한다. 또한 자신을 위하여 차려진 빈소의 모습도 서술하고, 발인을 마친 후 자신이 장지에 묻히는 과정에 대해서도, 장지에 묻힌 다음에 든 소회에 대해서도 서술한다. 이를 도연명은 죽음을 대하는 자신의 태도를 환기하였다. 한편 도연명의 「만가」에는 다소 해학이 느껴지는 대목도 있다. 살았을 때 그렇게 양껏 마시고 싶었던 술이 이제는 충분히 마련되었음에도 이제는 전혀 마시지 못한다고 함으로써 망자의 상태를 다소 익살스럽게 표현한다. 이러한 서술은 말하려 해도 입을 떨어지지 않고, 보려 해도 눈이 떠지지 않는다는 고백으로 이어지면서 삶과 죽음의 차이를 생생하게 드러내었다. 이 또한 도연명이 죽음을 다루는 방식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고전본문
생명이 있으면 반드시 죽음이 있으니, 일찍 죽는다고 하여 운명이 재촉한 것은 아니다.
어제 저녁에는 다 같이 사람이었는데, 오늘 아침에는 귀신 명부에 올라있구나.
혼은 흩어져 어디로 가는가, 말라버린 신체는 텅 빈 관속에 들어 있다.
아이들은 아비를 찾으며 울부짖고, 벗들은 나를 어루만지며 곡한다.
이해득실 다시는 모르게 되었나니, 시비인들 어찌 깨달을 수 있겠는가?
천년만년 지난 후에는, 그 누구도 내가 잘 살았는지 못 살았는지를 알지 못하리.
다만 한스러운 것은 살아생전, 양껏 술 마시지 못했음이라.(「만가1」)
살아서는 술 없어 못 마셨거늘, 이제는 공연히 술잔에 넘친다.
봄에 빚은 막걸리 쌀알이 떴거늘, 언제나 다시 마실 수 있을까.
내 앞에는 안주 수북한 상, 내 곁에는 곡하는 벗들.
말하려 해도 입에선 소리 안 나오고, 보려 해도 눈에는 빛이 들어오지 않는다.
살아서는 높은 집에 누웠으나, 이제는 황폐한 풀밭서 묵는다.
하루아침에 집에서 나왔는데, 되돌아가는 곳은 끝없는 밤이도다.(「만가2」)
시든 풀들 어찌 그리 넓게 돋았는지, 백양나무 바람결에 또한 휙휙 댄다.
찬 서리 내린 9월, 먼 교외로 날 전송한다.
사방엔 인가 하나 없고, 높은 무덤들만 우뚝 우뚝 솟아있다.
말은 하늘을 향해 울부짖고, 바람 절로 쓸쓸하게 분다.
묘실 한 번 닫히면, 다시는 영영 아침을 맞지 못하리.
다시는 영영 아침을 맞지 못함은, 현명한 자도 출세한 자도 어찌할 수 없도다.
여태까지 전송했던 사람들, 각기 다 제 집으로 돌아갔다.
친척 중 더러는 계속 슬퍼해도, 타인들은 더는 슬피 노래하지 않는다.
죽어서 무슨 할 말 있겠는가, 산언덕에 몸을 맡길 뿐이거늘.(「만가3」)
有生必有死, 早終非命促.
昨暮同爲人, 今旦在鬼錄.
魂氣散何之, 枯形寄空木.
嬌兒索父啼, 良友撫我哭.
得失不復知, 是非安能覺.
千秋萬歲後, 誰知榮與辱.
但恨在世時, 飮酒不得足.(「挽歌1」)
在昔無酒飮, 今但澹空觴.
春醪生浮蟻, 何時更能嘗.
肴案盈我前, 親舊哭我傍.
欲語口無音, 欲視眼無光.
昔在高堂寢, 今宿荒草鄕.
一朝出門去, 歸來夜未央.(「挽歌2」)
荒草何茫茫, 白楊亦蕭蕭.
嚴霜九月中, 送我出遠郊.
四面無人居, 高墳正嶕嶢.
馬爲仰天鳴, 風爲自蕭條.
幽室一已閉, 千年不復朝.
千年不復朝, 賢達無奈何.
向來相送人, 各已歸其家.
親戚或餘悲, 他人亦已歌.
死去何所道, 託體同山阿.(「挽歌3」)
[출전] 도연명,『만가』
토론하기
(1) 고전 본문의 내용을 토대로 도연명은 죽음에 대하여 어떠한 관점을 지니고 있는지를 짚어보도록 하자.
(2) 고전 본문의 내용을 토대로 삶과 죽음의 차이에 대하여 이야기해보자.
(3) 고전 본문은 도연명이 자신이 죽었을 때를 가정하여 쓴 시다. 이런 방식으로 죽음을 다루는 것의 장점과 단점에 대하여 논의해보자.
해설읽기
만가는 상여를 묘지로 메고 나갈 때 부르던 노래로 산 자가 죽은 자를 애도하는 내용을 띤다. 그런데 고전 본문의 만가는 이를 뒤집어 시적 화자가 망자가 되어 자신을 장례 치르는 모습과 무덤에 매장된 자신의 상황 등을 노래한 시다.
다시 말해 멀쩡히 살아있는 도연명이 자기가 망자가 됐을 때를 가정하여 읊은 자기 장례식장의 풍경과 발인을 끝내고 무덤에 묻힐 때, 또 묻힌 다음의 심회를 읊은 것이다. 그런데 이는, 망자가 지각이 있다고 여겼기에 가능한 상상이다. 고대 중국에서는 꽤 오래전부터 “사후존재 곧 귀신이 있는가?”란 물음과 함께 “망자가 지각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 지속적으로 던져졌고, 이는 적어도 공자 이래 지금에 이르기까지 유학에서 중요하게 다뤄져온 핵심 화두였다. 주류적 관점은 귀신이 존재하고 그들은 지각할 수 있다는 인식이었다. 사후존재가 지각하지 못하면 굳이 상례나 제례를 정성들여서 거행할 이유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자신이 망자가 되었을 때를 가정하여 읊어진 「만가」도 이러한 인식 위에 읊어졌다. 그래서 자신이 관에 담긴 채 상례가 치러지고, 땅에 묻혀 육신이 진토가 되는 과정을 노래할 수도 있었다. 예컨대 도연명의 선배 세대로 위진시대를 대표하는 문인이었던 육기(261~303)의 「만가」의 일부가 그러하다.
산사람은 갔다가도 돌아올 날 있건만 / 나는 떠나가서 돌아올 날 없다. / 전에는 사농공상들과 기거했지만 / 이제는 온갖 귀신들과 이웃이다. / …(중략)… / 풍만했던 살집은 땅강아지, 개미의 먹이이고 / 아름다운 자태는 영원히 멸하여 사라지리.
이러한 「만가」에서 주목할 점은 ‘죽음은 죽음, 삶은 삶’ 식으로 삶과 죽음이 이원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삶과 죽음을 연결하여 생사를 바라보는, 가령 장자나 열자 같은 도가들처럼 “삶과 죽음에는 본질적 차이가 없다”거나 “죽음은 삶이 있기 전의 원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식의 관점이 안 보인다. 또한 맹자 같은 유가들처럼 “죽음은 삶의 완성이다”와 같은 관점도 안 보인다. 도연명은 그저 ‘삶 대 죽음’이라는 이원적 회로 안에 머물러 있다. 그래서 죽은 이로서의 자신은 살아 있을 때 인간에게 그리도 중요시하던 ‘이해득실’을 다시는 모르게 되었고, ‘시비판단’을 다시는 내릴 수 없다고 증언한다. 이러한 관점은 도연명 자신이 망자가 됐다고 가정하고 지은 「나에게 받치는 내가 쓴 제문[자제문自祭文]」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허무하게도 어느덧 소멸되었다. 개탄스럽게도 이제는 멀어지게 되었다. 봉분을 쌓지도 않고 나무를 심지도 않았는데 시간은 급기야 흘러가버린다. 생전에 명예를 귀히 여기지 않았는데 사후에 칭송을 바라리오. 사람의 삶은 실로 지난했는데 죽음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도연명은 삶과 죽음이 연계되어 있다고 보지 않았기에, 다시 말해 죽음의 세계는 삶의 세계와 전혀 다르다고 인식했기에 이처럼 죽음의 세계에서 자신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물었던 것이다.
도연명의 이러한 관점은 죽음 이후의 세계가 실재한다는 사유가 확고하게 전제되어 있다. 다만 그 세계는 이승에서 사는 존재인 ‘나’는 직접 체험할 수 없다. 내가 알고 있게 알 수 있는 죽음은 어디까지나 이승에서 살아 있을 때 인지하는 죽음이지 죽어서 가게 된 죽음의 세계에서 망자로서 체험하는 죽음이 아니다. 단적으로 살아 있는 사람은 죽음에 대해 아무리 사유한다고 해도 죽음 그 자체를 알지 못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벗어나기 힘든 굴레를 지게 된다. 죽음 자체나 죽음 이후 세계는 인간으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바’인데, 그러한 정체불명의 죽음이 반드시 나에게 닥치기 때문에 그렇다. 알지 못하기만 해도 두려워하고 편치 않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인데 그 알 수 없는 것이 지니는, 지금 여기의 모든 것을 순식간에 중단시키고 무(無)로 돌려버리는 파괴력을 익히 알기에 더 공포스럽고 불안해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에서 죽음에 대해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하는 것일까?
도연명이 들고 나온 것은 일종의 ‘놀이’였다. 놀이는 현실과 비현실을, 가능과 불가능을 넘나든다. 놀이 속에서 어린아이들은 엄마가 되기도 하고 아빠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고 놀이에 규칙이 없는 것, 두서가 없는 것도 아니다. 아니 규칙에 의거하여야만 놀이는 성립된다. 물론 놀이를 통해 명증한 답을 얻지 못할 수 있다. 엄습해오는 불가지한 것에 대한 불안과 공포가 근본적으로 해소되는 것도 아니다. 대신 놀이하는 동안만큼은 무지 또는 불가지로 인해 야기되는 불안이나 두려움, 억압 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놀이가 지니는 효능이다. 문제를 이성 기반으로 확고하게 장악하지는 못해도 현장에 집중할 수 있는 인지적 근거를 마련할 수 있다는 점, 그러니까 죽음을 이성적으로 명료하게 파악하지는 못해도 삶에 집중할 수 있는 ‘살아냄’의 힘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고전 본문처럼 도연명이 죽음을 가지고 놀이하는 방식이 죽음을 대하는 또 하나의 유용한 방도가 될 수도 있다.
키워드
놀이, 만가, 생사관, 장송곡, 죽음, 죽음으로 놀이하기, 지각하는 망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