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맥락
고전 본문은 『야초』에 실려 있는 「사후(死後)」라는 제목의 산문이다. ‘사후’는 말 그대로 ‘죽은 후’라는 뜻이다. 루쉰이 꿈속에서 자신이 어느 이름 모를 거리에서 죽었음을 죽은 자신이 발견한다는 상황을 설정하여 쓴 글이다. 글 속에서 루쉰은 죽음에 대한 평소의 생각을 전복적이고도 색다른 발상을 기반으로 명료하게 드러내었다.
고전본문
나는 내가 길바닥에 죽어 있는 꿈을 꾸었다. 여기가 어딘지, 어떻게 이곳에 왔는지, 어쩌다가 죽었는지, 이 모두를 나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아무튼 내 자신이 내가 이미 죽었음을 알았을 즈음 나는 거기에 이미 죽어 있었다. 까치 소리가 몇 마디 들렸고 뒤이어 까마귀 소리도 들렸다. 비록 흙냄새가 섞이기는 했어도 공기는 무척 상쾌한 것이 대략 동틀 무렵인 듯하다. 나는 눈을 뜨려 하였으나 눈은 미동조차 하지 않은 것이 마치 내 눈이 전혀 아닌 듯했다. 이에 팔을 들어 보려 하였으나 마찬가지였다. 공포라는 날카로운 화살촉이 돌연 내 심장을 뚫고 와 박혔다. 나는 살아 있을 때 일찍이 장난삼아 상상을 해본 적이 있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죽었을 때 운동신경만 소멸되고 지각은 남아 작동된다면 그것은 온전히 죽는 것보다 훨씬 두려울 일이라고. 누가 알았을까, 내 예상은 적중하였고 내 스스로 이러한 예상을 입증하고 있다. 발소리가 들렸다, 길 가는 사람의 것이겠지. 외바퀴 수레 한 대가 내 머리를 밀치고 지나갔다. 무거운 물건을 실었는지 삐걱삐걱 대며 마음을 짜증나게 하고 이빨을 시큰거리게 했다. 두 눈 가득 붉음이 느껴지는 것을 보니 해가 뜬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내 얼굴은 동쪽을 향해 있는 것이로군. 그러나 이런 것은 다 무의미하다. 웅성거리는 사람 소리, 번잡하게 구는 구경꾼들. 그들 발치에서 황토가 일어 내 콧구멍 속으로 날아들었다. 나는 재채기를 하고 싶었으나 끝내 하지 못했다. 마음만 간절했을 뿐. …(중략)… 아마 개미인 듯, 내 등줄기를 따라 기는데 간지럽다. 나는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기에 녀석을 쫓아낼 능력이 없다. 평상시였다면 한번 몸을 뒤척이면 달아나게 할 수 있었을 테다. 게다가 허벅지로 또 한 녀석이 기어오른다. 이 녀석들 뭐하자는 거지? 버러지 놈들! 그러나 사정은 더욱 나빠졌다. 웅 하는 소리가 나더니 파리 한 마리가 내 관자놀이에 내려앉아 몇 발짝 기다가 다시 날아오르더니만 주둥이를 벌려 내 코끝을 핥았다. …(중략)… 목재가 땅에 떨어지는 둔중한 소리와 함께 땅이 흔들리는 바람에 홀연히 정신을 차렸는데 이마에서 거적의 울퉁불퉁한 결이 느껴졌다. 그런데 거적이 벗겨지자 작열하는 햇빛이 느껴졌다. 누군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왜 여기서 죽느냔 말이야?……” 목소리가 가까이서 들리는 걸 보니 아마 허리를 내 시신 쪽으로 굽히고 있는 것이리라. 그런데 사람은 어디서 죽어야 마땅하단 말인가? …(중략)… 나는 전에, 사람이 땅 위에서 마음대로 살 권리는 없지만 마음대로 죽을 권리만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야 결코 그렇지 않음을 알았으니, 내 생각은 뭇 사람들의 공통된 생각과 부합하기 어려웠음이다. 안타깝게도 내게는 오래토록 종이와 붓이 없었고, 설령 있다고 해도 글을 쓸 수 없으며, 설령 쓴다고 해도 발표할 곳도 없다. 그러니 이렇게 가만히 놔둘 수밖에. 누군가가 나를 들쳤는데 누군지는 모르겠다. 칼집 소리가 드리는 것을 보니 순경도 여기 있는 것이리라, 여기 내가 ‘죽어 있어서는 안 될 여기’에. 나는 몇 차례 뒤집혔고 들어올려졌다가 다시 한 차례 내려졌다. 뚜껑이 덮이고 못질 소리가 들렸다. 못질을 두 개만 하는 것이 기이했다. 설마, 이 동네는 널에 못을 두 개만 박는가? …(중략)… 땅속에 묻혔는지는 잘 모르겠다. 손등에 거적의 울퉁불퉁한 결이 닿았는데 내 시신 입장에서 보면 뒤집혀 덮어진 것이지만 나쁘지는 않다. 누가 나를 위해 돈을 썼을까 알지 못함이 정녕 아쉽다. 그러나 가증스러웠다, 시신을 관에 넣은 녀석들이! 내 등의 속옷자락 접혀 있는 것을 펴 주지 않아 등이 배기는 것이 무척 견디기 어렵다. 너희들이 죽은 사람이니깐 지각하지 못할 것이라 여겨 이따위 건성으로 일을 한단 말이냐? 하하! 살아 있을 때보다 몸이 훨씬 무거워진 것 같다. 그래서 옷자락 접힌 것이 이리도 불편한가 보다. 그렇지만 나는 생각했다. 오래지 않아 익숙해질 것이리라. 혹은 금세 썩어질 것이니 더는 성가시지 않게 되거나. 지금은 차분하게, 차분하게 먹는 생각하는 것만 한 게 없다. …
我夢見自己死在道路上. 這是那里, 我怎么到這里來, 怎么死的, 這些事我全不明白. 總之, 待到我自己知道已經死掉的時候, 就已經死在那里了. 聽到几聲喜鵲叫, 接着是一陣烏老鴉. 空氣很淸爽, ―雖然也帶些土氣息―, 大約正當黎明時候罷. 我想睜開眼睛來, 他卻絲毫也不動, 簡直不像是我的眼睛. 于是想抬手, 也一樣. 恐怖的利鏃忽然穿透我的心了. 在我生存時, 曾經玩笑地設想. 假使一個人的死亡, 只是運動神經的廢滅, 而知覺還在, 那就比全死了更可怕. 誰知道我的預想竟的中了, 我自己就在證實這預想. 聽到脚步聲, 走路的罷. 一輛獨輪車從我的頭邊推過, 大約是重載的, 軋軋地叫得人心煩, 還有些牙齒. 很覺得滿眼緋紅, 一定是太陽上來了. 那么, 我的臉是朝東的. 但那都沒有什么關系. 切切嚓嚓的人聲, 看熱鬧的. 他們踹起黃土來, 飛進我的鼻孔, 使我想打噴嚔了, 但終于沒有打, 僅有想打的心. …(중략)… 大約是一個馬蟻, 在我的脊梁上爬着, 癢癢的. 我一點也不能動, 已經沒有除去他的能力了. 倘在平時, 只將身子一扭, 就能使他退避. 而且大腿上又爬着一個哩. 你們是做什么的? 蟲豸! 事情可更壞了. 嗡的一聲, 就有一個靑蠅停在我的顴骨上, 走了几步, 又一飛, 開口便舐我的鼻尖. …(중략)… 木材摔在地上的鈍重的聲音同着地面的震動, 使我忽然淸醒, 前額上感着蘆席的條紋. 但那蘆席就被掀去了, 又立刻感到了日光的灼熱. 還聽得有人說―“怎么要死在這里?……” 這聲音離我很近, 他正彎着腰罷. 但人應該死在那里呢? …(중략)… 我先前以爲人在地上雖沒有任意生存的權利, 卻總有任意死掉的權利的. 現在才知道幷不然, 也很難適合人們的公意. 可惜我久沒了紙筆, 卽有也不能寫, 而且卽使寫了也沒有地方發表了. 只好就這樣地抛開. 有人來抬我, 也不知道是誰. 聽到刀鞘聲, 還有巡警在這里罷, 在我所不應該“死在這里”的這里. 我被翻了几個轉身, 便覺得向上一擧, 又往下一沉, 又聽得蓋了蓋, 釘着釘. 但是, 奇怪, 只釘了兩個. 難道這里的棺材釘, 是只釘兩個的么? …(중략)… 雖然知不淸埋了沒有. 在手背上觸到草席的條紋, 覺得這屍衾倒也不惡. 只不知道是誰給我化錢的, 可惜! 但是, 可惡, 收斂的小子們! 我背後的小衫的一角皺起來了, 他們幷不給我拉平, 現在抵得我很難受. 你們以爲死人無知, 做事就這樣地草率么? 哈哈! 我的身體似乎比活的時候要重得多, 所以壓着衣皺便格外的不舒服. 但我想, 不久就可以習慣的, 或者就要腐爛, 不至于再有什么大麻煩. 此刻還不如靜靜地靜着想.
[출전] 루쉰,『야초』
토론하기
(1) 고전 본문에서 ‘망자로서의 루쉰’이 제기한 문제를, 불만을 짚어보고 그러한 문제와 불만의 타당성 여부에 대하여 토의해보자.
(2) 고전 본문처럼 자신의 죽음을 가정하고 글을 쓰는 것이 어떠한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어떤 효과를 낼 수 있을까? 이들에 대하여 토의해보자.
(3) 망자는 지각할 수 있을까? 또 사유할 수 있을까? 이 물음들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근거를 갖춰서 이야기해보자.
해설읽기
고전 본문은 루쉰이 꿈에서 겪은 바라면서 쓴 수필이다. 루쉰은 어느 날인가 문득 자신이 어느 길에선가 죽어있음을 지각했다. 그러자 의문이 밀려왔다. 사실 이 물음들은 죽음을 사유할 때 곧잘 제기되는 물음이다. 자신이 죽어 있는 곳이 어딘지, 왜 거기에 있었고 또 죽게 되었는지, 나는 이미 죽어 있었는데 내가 죽었다는 것은 어떻게 아는 것인지, 왜 죽고 싶은 곳에서 못 죽고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죽는 것인지 등등, 적잖은 물음이 연이어 일어났다. 물론 망자로서의 자신은 그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그러나 자신이 죽었음을 아는 또 하나의 자신은 분명하게 지각하고 있었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죽음 직후에 자신에게 발생한 여러 성가시고 불편한 일들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짐을 가득 실은 수레가 자신의 머리를 밀치고 지나가자 치아가 욱신거리고, 자신의 죽은 몸 위를 기어 다니는 개미와 날아와서 연신 자기 얼굴을 핥아대는 파리 때문에 몹시 가렵고 성가셔한다. 자신을 짐짝처럼 다루는 거친 손길이 마냥 불편하고 대충대충 수의를 입히고 관에 시신을 넣었던 탓에 접힌 수의 자락 때문에 등이 배겨 곤혹스러워한다. 게다가 이러한 갖가지 불편과 곤혹스러움을 고스란히 지각할 수 있는 반면 신체의 어느 한 부분도 생각대로 움직일 수 없다. 망자로서의 루쉰은 가없는 답답함에 사뭇 몸서리친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망자임에도 생각을 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이미 죽었음에도 길바닥에 죽어 있는 자신을 구경거리로 삼는 행인들과 왜 여기 죽어 있냐며 툴툴대는 순경 등의 반응에 대하여 자신이 사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망자로서의 루쉰은 더욱더 엄청 답답해한다. 대처할 수도 없는데 느끼고 생각할 수는 있다니, 지각할 수 있음이, 또 사유할 수 있음이 망자로서의 자신을 더 힘들게 만들고 있었다.
흔히들 살면서 겪게 되는 모든 고통, 고난 등도 죽으면 다 끝이라고들 생각한다. 그런데 루쉰은 고전 본문과 같은 사고실험을 통해 죽음이라는 것이 과연 삶과 완전하게 무관할 있는가라는 근본적 문제를 제기한다. 망자인 루쉰을 여전히 불편하게 만들고 곤혹스럽게 만드는 것들은 실은 살아 있을 때 자신을 고민케 하고 번민에 빠지게 했던 문제들과 별다를 바 없는 것들이었다. 살아서 해결하지 않은 문제들은 죽은 이후까지도 이어질 수 있다는 통찰을 제시한 것이다. 결국 죽음은 삶의 종료가 아니라 삶의 연장일 수 있고, 그래서 죽음은 ‘영원한 안식’과는 무관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죽음에 대하여 어떠한 태도를 지녀야 하는 것일까? 이 물음의 답으로 루쉰이 취했던 삶의 태도 중 하나를 제시할 수 있다. 루쉰은 자신이 세상에 대해 취한 태도를 ‘비스듬히 서기[橫站]’라고 표현한 적이 있었다. 혁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적들과 마주하기에도 벅찼던 격동의 시대를 살아내면서, 그는 등 뒤에서 날아드는 아군의 암습을 감내하기가 너무도 버거웠다. 앞도 봐야 하고 동시에 뒤도 봐야 하는 딜레마에 봉착했던 것이 그의 일상적 삶이었다. 이에 그가 취했던 태도가 아군 속에서 비스듬히 서기였다. 루쉰은 이렇게 고백한 적이 있었다. “가장 두려운 건 무엇보다도 입으론 ‘네.’ 하면서 속으론 ‘아니오.’ 하는, 이른바 ‘전우’라는 자들로, 아무리 방비를 해도 방비할 수가 없습니다. …(중략)… 제 후방을 지키기 위해 저는 비스듬히 서 있어야 되기에 적을 정면으로 마주할 수도 없습니다. 이렇게 앞뒤를 다 살피는 일은 몹시도 힘듭니다.(1934. 12. 18일 자 「양치윈에게 보내는 편지[致楊霽雲]」, 루쉰서신집하(魯迅書信集下), 895쪽)” 이렇게 비스듬히 서 있어야 눈앞의 적과 등 뒤의 아군을 동시에 볼 수 있다는 얘기다.
죽음에 대해서도 이렇게 비스듬히 서는 것이 죽음을 대하는 한 방도일 수 있다. 죽음은 삶의 제반 문제의 종결이 아니라 그러한 문제들의 지속이라는 루쉰의 통찰은 오래 시절 믿어왔던 죽음으로부터 뒤통수를 맞은 것이다. 죽음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든 죽음은 이렇듯 우리의 뒤통수를 칠 수 있는 존재다. 따라서 비스듬히 서서 정면으로는 삶을 마주하고 뒤쪽으로는 죽음을 바라보는 방식으로 삶과 죽음을 대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앞통수를 맞거나 뒤통수를 맞는 일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기에 그러하다.
키워드
비스듬히 서기, 사유하는 망자, 삶, 생사관, 죽음, 지각하는 망자
전후맥락
고전 본문은 『야초』에 실려 있는 「사후(死後)」라는 제목의 산문이다. ‘사후’는 말 그대로 ‘죽은 후’라는 뜻이다. 루쉰이 꿈속에서 자신이 어느 이름 모를 거리에서 죽었음을 죽은 자신이 발견한다는 상황을 설정하여 쓴 글이다. 글 속에서 루쉰은 죽음에 대한 평소의 생각을 전복적이고도 색다른 발상을 기반으로 명료하게 드러내었다.
고전본문
나는 내가 길바닥에 죽어 있는 꿈을 꾸었다. 여기가 어딘지, 어떻게 이곳에 왔는지, 어쩌다가 죽었는지, 이 모두를 나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아무튼 내 자신이 내가 이미 죽었음을 알았을 즈음 나는 거기에 이미 죽어 있었다. 까치 소리가 몇 마디 들렸고 뒤이어 까마귀 소리도 들렸다. 비록 흙냄새가 섞이기는 했어도 공기는 무척 상쾌한 것이 대략 동틀 무렵인 듯하다. 나는 눈을 뜨려 하였으나 눈은 미동조차 하지 않은 것이 마치 내 눈이 전혀 아닌 듯했다. 이에 팔을 들어 보려 하였으나 마찬가지였다. 공포라는 날카로운 화살촉이 돌연 내 심장을 뚫고 와 박혔다. 나는 살아 있을 때 일찍이 장난삼아 상상을 해본 적이 있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죽었을 때 운동신경만 소멸되고 지각은 남아 작동된다면 그것은 온전히 죽는 것보다 훨씬 두려울 일이라고. 누가 알았을까, 내 예상은 적중하였고 내 스스로 이러한 예상을 입증하고 있다. 발소리가 들렸다, 길 가는 사람의 것이겠지. 외바퀴 수레 한 대가 내 머리를 밀치고 지나갔다. 무거운 물건을 실었는지 삐걱삐걱 대며 마음을 짜증나게 하고 이빨을 시큰거리게 했다. 두 눈 가득 붉음이 느껴지는 것을 보니 해가 뜬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내 얼굴은 동쪽을 향해 있는 것이로군. 그러나 이런 것은 다 무의미하다. 웅성거리는 사람 소리, 번잡하게 구는 구경꾼들. 그들 발치에서 황토가 일어 내 콧구멍 속으로 날아들었다. 나는 재채기를 하고 싶었으나 끝내 하지 못했다. 마음만 간절했을 뿐. …(중략)… 아마 개미인 듯, 내 등줄기를 따라 기는데 간지럽다. 나는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기에 녀석을 쫓아낼 능력이 없다. 평상시였다면 한번 몸을 뒤척이면 달아나게 할 수 있었을 테다. 게다가 허벅지로 또 한 녀석이 기어오른다. 이 녀석들 뭐하자는 거지? 버러지 놈들! 그러나 사정은 더욱 나빠졌다. 웅 하는 소리가 나더니 파리 한 마리가 내 관자놀이에 내려앉아 몇 발짝 기다가 다시 날아오르더니만 주둥이를 벌려 내 코끝을 핥았다. …(중략)… 목재가 땅에 떨어지는 둔중한 소리와 함께 땅이 흔들리는 바람에 홀연히 정신을 차렸는데 이마에서 거적의 울퉁불퉁한 결이 느껴졌다. 그런데 거적이 벗겨지자 작열하는 햇빛이 느껴졌다. 누군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왜 여기서 죽느냔 말이야?……” 목소리가 가까이서 들리는 걸 보니 아마 허리를 내 시신 쪽으로 굽히고 있는 것이리라. 그런데 사람은 어디서 죽어야 마땅하단 말인가? …(중략)… 나는 전에, 사람이 땅 위에서 마음대로 살 권리는 없지만 마음대로 죽을 권리만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야 결코 그렇지 않음을 알았으니, 내 생각은 뭇 사람들의 공통된 생각과 부합하기 어려웠음이다. 안타깝게도 내게는 오래토록 종이와 붓이 없었고, 설령 있다고 해도 글을 쓸 수 없으며, 설령 쓴다고 해도 발표할 곳도 없다. 그러니 이렇게 가만히 놔둘 수밖에. 누군가가 나를 들쳤는데 누군지는 모르겠다. 칼집 소리가 드리는 것을 보니 순경도 여기 있는 것이리라, 여기 내가 ‘죽어 있어서는 안 될 여기’에. 나는 몇 차례 뒤집혔고 들어올려졌다가 다시 한 차례 내려졌다. 뚜껑이 덮이고 못질 소리가 들렸다. 못질을 두 개만 하는 것이 기이했다. 설마, 이 동네는 널에 못을 두 개만 박는가? …(중략)… 땅속에 묻혔는지는 잘 모르겠다. 손등에 거적의 울퉁불퉁한 결이 닿았는데 내 시신 입장에서 보면 뒤집혀 덮어진 것이지만 나쁘지는 않다. 누가 나를 위해 돈을 썼을까 알지 못함이 정녕 아쉽다. 그러나 가증스러웠다, 시신을 관에 넣은 녀석들이! 내 등의 속옷자락 접혀 있는 것을 펴 주지 않아 등이 배기는 것이 무척 견디기 어렵다. 너희들이 죽은 사람이니깐 지각하지 못할 것이라 여겨 이따위 건성으로 일을 한단 말이냐? 하하! 살아 있을 때보다 몸이 훨씬 무거워진 것 같다. 그래서 옷자락 접힌 것이 이리도 불편한가 보다. 그렇지만 나는 생각했다. 오래지 않아 익숙해질 것이리라. 혹은 금세 썩어질 것이니 더는 성가시지 않게 되거나. 지금은 차분하게, 차분하게 먹는 생각하는 것만 한 게 없다. …
我夢見自己死在道路上. 這是那里, 我怎么到這里來, 怎么死的, 這些事我全不明白. 總之, 待到我自己知道已經死掉的時候, 就已經死在那里了. 聽到几聲喜鵲叫, 接着是一陣烏老鴉. 空氣很淸爽, ―雖然也帶些土氣息―, 大約正當黎明時候罷. 我想睜開眼睛來, 他卻絲毫也不動, 簡直不像是我的眼睛. 于是想抬手, 也一樣. 恐怖的利鏃忽然穿透我的心了. 在我生存時, 曾經玩笑地設想. 假使一個人的死亡, 只是運動神經的廢滅, 而知覺還在, 那就比全死了更可怕. 誰知道我的預想竟的中了, 我自己就在證實這預想. 聽到脚步聲, 走路的罷. 一輛獨輪車從我的頭邊推過, 大約是重載的, 軋軋地叫得人心煩, 還有些牙齒. 很覺得滿眼緋紅, 一定是太陽上來了. 那么, 我的臉是朝東的. 但那都沒有什么關系. 切切嚓嚓的人聲, 看熱鬧的. 他們踹起黃土來, 飛進我的鼻孔, 使我想打噴嚔了, 但終于沒有打, 僅有想打的心. …(중략)… 大約是一個馬蟻, 在我的脊梁上爬着, 癢癢的. 我一點也不能動, 已經沒有除去他的能力了. 倘在平時, 只將身子一扭, 就能使他退避. 而且大腿上又爬着一個哩. 你們是做什么的? 蟲豸! 事情可更壞了. 嗡的一聲, 就有一個靑蠅停在我的顴骨上, 走了几步, 又一飛, 開口便舐我的鼻尖. …(중략)… 木材摔在地上的鈍重的聲音同着地面的震動, 使我忽然淸醒, 前額上感着蘆席的條紋. 但那蘆席就被掀去了, 又立刻感到了日光的灼熱. 還聽得有人說―“怎么要死在這里?……” 這聲音離我很近, 他正彎着腰罷. 但人應該死在那里呢? …(중략)… 我先前以爲人在地上雖沒有任意生存的權利, 卻總有任意死掉的權利的. 現在才知道幷不然, 也很難適合人們的公意. 可惜我久沒了紙筆, 卽有也不能寫, 而且卽使寫了也沒有地方發表了. 只好就這樣地抛開. 有人來抬我, 也不知道是誰. 聽到刀鞘聲, 還有巡警在這里罷, 在我所不應該“死在這里”的這里. 我被翻了几個轉身, 便覺得向上一擧, 又往下一沉, 又聽得蓋了蓋, 釘着釘. 但是, 奇怪, 只釘了兩個. 難道這里的棺材釘, 是只釘兩個的么? …(중략)… 雖然知不淸埋了沒有. 在手背上觸到草席的條紋, 覺得這屍衾倒也不惡. 只不知道是誰給我化錢的, 可惜! 但是, 可惡, 收斂的小子們! 我背後的小衫的一角皺起來了, 他們幷不給我拉平, 現在抵得我很難受. 你們以爲死人無知, 做事就這樣地草率么? 哈哈! 我的身體似乎比活的時候要重得多, 所以壓着衣皺便格外的不舒服. 但我想, 不久就可以習慣的, 或者就要腐爛, 不至于再有什么大麻煩. 此刻還不如靜靜地靜着想.
[출전] 루쉰,『야초』
토론하기
(1) 고전 본문에서 ‘망자로서의 루쉰’이 제기한 문제를, 불만을 짚어보고 그러한 문제와 불만의 타당성 여부에 대하여 토의해보자.
(2) 고전 본문처럼 자신의 죽음을 가정하고 글을 쓰는 것이 어떠한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어떤 효과를 낼 수 있을까? 이들에 대하여 토의해보자.
(3) 망자는 지각할 수 있을까? 또 사유할 수 있을까? 이 물음들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근거를 갖춰서 이야기해보자.
해설읽기
고전 본문은 루쉰이 꿈에서 겪은 바라면서 쓴 수필이다. 루쉰은 어느 날인가 문득 자신이 어느 길에선가 죽어있음을 지각했다. 그러자 의문이 밀려왔다. 사실 이 물음들은 죽음을 사유할 때 곧잘 제기되는 물음이다. 자신이 죽어 있는 곳이 어딘지, 왜 거기에 있었고 또 죽게 되었는지, 나는 이미 죽어 있었는데 내가 죽었다는 것은 어떻게 아는 것인지, 왜 죽고 싶은 곳에서 못 죽고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죽는 것인지 등등, 적잖은 물음이 연이어 일어났다. 물론 망자로서의 자신은 그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그러나 자신이 죽었음을 아는 또 하나의 자신은 분명하게 지각하고 있었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죽음 직후에 자신에게 발생한 여러 성가시고 불편한 일들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짐을 가득 실은 수레가 자신의 머리를 밀치고 지나가자 치아가 욱신거리고, 자신의 죽은 몸 위를 기어 다니는 개미와 날아와서 연신 자기 얼굴을 핥아대는 파리 때문에 몹시 가렵고 성가셔한다. 자신을 짐짝처럼 다루는 거친 손길이 마냥 불편하고 대충대충 수의를 입히고 관에 시신을 넣었던 탓에 접힌 수의 자락 때문에 등이 배겨 곤혹스러워한다. 게다가 이러한 갖가지 불편과 곤혹스러움을 고스란히 지각할 수 있는 반면 신체의 어느 한 부분도 생각대로 움직일 수 없다. 망자로서의 루쉰은 가없는 답답함에 사뭇 몸서리친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망자임에도 생각을 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이미 죽었음에도 길바닥에 죽어 있는 자신을 구경거리로 삼는 행인들과 왜 여기 죽어 있냐며 툴툴대는 순경 등의 반응에 대하여 자신이 사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망자로서의 루쉰은 더욱더 엄청 답답해한다. 대처할 수도 없는데 느끼고 생각할 수는 있다니, 지각할 수 있음이, 또 사유할 수 있음이 망자로서의 자신을 더 힘들게 만들고 있었다.
흔히들 살면서 겪게 되는 모든 고통, 고난 등도 죽으면 다 끝이라고들 생각한다. 그런데 루쉰은 고전 본문과 같은 사고실험을 통해 죽음이라는 것이 과연 삶과 완전하게 무관할 있는가라는 근본적 문제를 제기한다. 망자인 루쉰을 여전히 불편하게 만들고 곤혹스럽게 만드는 것들은 실은 살아 있을 때 자신을 고민케 하고 번민에 빠지게 했던 문제들과 별다를 바 없는 것들이었다. 살아서 해결하지 않은 문제들은 죽은 이후까지도 이어질 수 있다는 통찰을 제시한 것이다. 결국 죽음은 삶의 종료가 아니라 삶의 연장일 수 있고, 그래서 죽음은 ‘영원한 안식’과는 무관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죽음에 대하여 어떠한 태도를 지녀야 하는 것일까? 이 물음의 답으로 루쉰이 취했던 삶의 태도 중 하나를 제시할 수 있다. 루쉰은 자신이 세상에 대해 취한 태도를 ‘비스듬히 서기[橫站]’라고 표현한 적이 있었다. 혁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적들과 마주하기에도 벅찼던 격동의 시대를 살아내면서, 그는 등 뒤에서 날아드는 아군의 암습을 감내하기가 너무도 버거웠다. 앞도 봐야 하고 동시에 뒤도 봐야 하는 딜레마에 봉착했던 것이 그의 일상적 삶이었다. 이에 그가 취했던 태도가 아군 속에서 비스듬히 서기였다. 루쉰은 이렇게 고백한 적이 있었다. “가장 두려운 건 무엇보다도 입으론 ‘네.’ 하면서 속으론 ‘아니오.’ 하는, 이른바 ‘전우’라는 자들로, 아무리 방비를 해도 방비할 수가 없습니다. …(중략)… 제 후방을 지키기 위해 저는 비스듬히 서 있어야 되기에 적을 정면으로 마주할 수도 없습니다. 이렇게 앞뒤를 다 살피는 일은 몹시도 힘듭니다.(1934. 12. 18일 자 「양치윈에게 보내는 편지[致楊霽雲]」, 루쉰서신집하(魯迅書信集下), 895쪽)” 이렇게 비스듬히 서 있어야 눈앞의 적과 등 뒤의 아군을 동시에 볼 수 있다는 얘기다.
죽음에 대해서도 이렇게 비스듬히 서는 것이 죽음을 대하는 한 방도일 수 있다. 죽음은 삶의 제반 문제의 종결이 아니라 그러한 문제들의 지속이라는 루쉰의 통찰은 오래 시절 믿어왔던 죽음으로부터 뒤통수를 맞은 것이다. 죽음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든 죽음은 이렇듯 우리의 뒤통수를 칠 수 있는 존재다. 따라서 비스듬히 서서 정면으로는 삶을 마주하고 뒤쪽으로는 죽음을 바라보는 방식으로 삶과 죽음을 대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앞통수를 맞거나 뒤통수를 맞는 일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기에 그러하다.
키워드
비스듬히 서기, 사유하는 망자, 삶, 생사관, 죽음, 지각하는 망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