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맥락
동심에 관하여(童心說)」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부분에서 저자는 동심이란 무엇이며, 사람들이 그것을 어떻게 잃게 되는지를 설명한다. 두 번째 부분에서는 동심의 상실이 개인의 정신과 사회의 도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논하고, 마지막으로 동심에서 비롯된 문학의 가치를 주장하는 한편 유가 경전에 대한 맹목적 존숭을 비판한다.
고전본문
동심이란 참된 마음(眞心)이다. 동심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은 참된 마음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동심이란 꾸밈이 전혀 없고 오롯이 참된 것으로, 마음 속에서 한 가닥의 생각이 처음 떠오를 때의 바로 그 원초적인 마음이다. 동심을 잃으면 참된 마음을 잃게 되고, 참된 마음을 잃으면 참된 자기됨을 잃게 된다. 누군가가 참된 자신으로부터 멀어진다면 그는 더 이상 본래의 마음을 가질 수가 없다. 어린 아이는 사람으로서 처음 맞게 되는 단계이고, 동심은 마음이 처음 처하는 상태다. 그런 마음의 처음을 어떻게 잃어버릴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런데도 동심을 갑자기 잃어버리게 되는 것은 어째서인가? 대체로 처음에는 보고 듣는 것이 눈과 귀를 통해 들어와 마음에서 주인 노릇을 하게 되면서 동심을 잃게 된다. 그러다 사람이 나이 들어감에 따라 세상과 삶의 이치라는 것이 보고 듣는 것을 통해 들어와 마음에서 주인 노릇을 하게 되면서 동심을 잃게 된다. 시간이 오래 지나면, 아는 이치와 보고 듣는 것이 나날이 많아지고, 깨닫고 느끼는 대상의 범위가 나날이 넓어진다. 그러다 보면 명예라는 것이 좋아할 만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스스로도 이름을 드러내려고 애쓰다 보면 동심을 잃게 되고, 마찬가지로 나쁜 평판이 추하게 여겨진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런 것을 감추려고 애쓰다가 또 동심을 잃게 된다.
(중략)
동심이 막히면 말을 해도 그 말이 마음에서 우러나오지 않고, 정치를 해도 그 다스림이 뿌리가 없고, 글을 써도 의미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아름다움이 내면에 갖추어지지 않고 빛이 진실함에서 나오지 않으니, 한 마디의 덕스러운 말을 지어보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왜 그런가? 동심이 가로막힌 상태에서 견문과 이치가 자아의 외부에부터 들어와 본래의 마음을 대신했기 때문이다. 견문과 이치가 마음을 채우고 나면 그 사람이 하는 말이란 모두 이치와 견문에서 뻗어 나온 말이고 동심에서 저절로 우러나온 말이 아니다. 그런 말이 아무리 유려해 보여도 말하는 그 사람 자신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이런 것이 바로 거짓된 사람이 거짓된 말을 하고 거짓된 일을 하고 그럴듯하게 흉내만 내는 글을 쓴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람 자체가 이미 거짓이니 뭘 하든지 간에 거짓이 아닌 것이 없다. 같은 이치로 거짓된 사람은 거짓된 말을 해 주면 좋아하고 거짓된 일을 이야기해 주면 좋아하고 거짓된 글로 담론을 나누면 좋아한다. 도처에 거짓이 아닌 것이 없으니 그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없다. 온 무대가 거짓으로 가득한 판이니 다른 관객들에 가로막혀 있는 키 작은 사람이 어떻게 무대에서 벌어지는 일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분별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비록 천하의 뛰어난 글이라 하더라도 거짓된 사람들로 인해 사라지고 후대에 전해지지 못한 경우가 어찌 적겠는가? 왜 그런가? 천하의 뛰어난 글은 동심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동심이 계속 보존될 수만 있다면 그 사람에게서 이치가 작동하지 않고 견문이 마음에 들어차지 않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좋은 글이 나오지 않는 시대가 없고, 좋은 글을 쓰지 못하는 사람이 없고, 어떤 형식과 스타일로 쓰더라도 좋은 글이 안 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좋은 시를 왜 꼭 옛 사람이 좋다고 가려 뽑은 것에서 찾아야 하고, 좋은 문장을 왜 반드시 진(秦)나라 이전 고대의 글에서만 찾아야 하겠는가.
(중략)
『육경』, 『논어』, 『맹자』에 실린 말들은 그 책들이 쓰일 당시에 역사를 쓰는 관리가 지나치게 성인을 높여서 쓴 것이거나 아니면 신하가 지나치게 그들을 칭송해서 쓴 것이다. 이런 경우들이 아니라면, 사리에 어두운 문하생이나 어리숙한 제자들이 스승의 말씀을 기억해 놓기는 했는데 머리만 있고 꼬리는 없거나 뒤는 있는데 앞은 빠진 채로 전하거나, 혹은 어쩌다 본 것만 가지고 글로 옮겨 놓은 것이다. 후세에 공부하는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제대로 분별하지도 않고 그저 성인의 입에서 나온 것이라 하면서 그것들을 경전으로 삼아버렸다. 그러나 그 가운데 태반이 성인의 말씀이 아닐 수도 있음을 누가 알겠는가. 혹 그것들이 정말로 성인이 한 말이라고 해도 결국 어떤 한정된 필요에 의해 한 것이다. 환자가 병이 나서 약을 쓸 때 의사가 상황에 맞게 처방을 내리는 것처럼 경전에 기록된 성인들의 말씀이란 어리석은 제자와 사리에 어두운 문하생들을 그들의 제한된 상황 속에서 구해주려고 한 것에 불과하다. 어떤 약이 꾀병에도 듣는다고 해서 그 약을 모든 경우에 고집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소위 경전이라는 것들이 만세에 통하는 지당한 말씀이라고 어찌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결국 『육경』, 『논어』, 『맹자』와 같은 책들은 도학자(道學者)들이 입에 올리기를 좋아하는 말거리, 거짓된 자들이 숨어드는 소굴이 되어버렸다. 그런 까닭에 이 경전들로는 더 이상 동심에서 나온 말을 담아낼 수 없다. 아아! 나는 과연 어디서 동심을 잃지 않은 참되고 위대한 성인을 만나 그와 단 한 마디라도 진정한 글에 대해 함께 나눌 수 있을까?
[출전] 탁오, 『동심에 관하여』
토론하기
(1) 본문에서 저자가 말하는 “동심”이란 무엇인가? 저자는 사람들이 왜 “동심”을 잃게 된다고 주장하는가?
(2) 여러분은 “동심”을 막거나 가려야 했던 적이 있는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동심”을 지키는 것이 왜 어려운지를 나누어 보자.
(3) 오늘날 우리 사회의 여러 제도들(교육 제도, 가족이나 또래 관계, 온라인 문화 등)은 “동심”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되고 있는가, 아니면 오히려 그것이 드러나는 것을 막고 있는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해설읽기
오늘날 우리가 순수의 상징으로 여기는 “동심”이라는 개념은 16세기 말 저자의 맥락에서는 지금처럼 긍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글을 깊이 있게 연구한 학자 폴린 리(Pauline C. Lee)는 저자 당시의 독자들에게 “동심”이라는 단어는 ‘순수’보다는 ‘미숙함’ 또는 ‘어리숙함’이라는 의미를 먼저 떠올리게 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본문 첫 단락에 등장하는, “동심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은 이러한 상황을 반영한다. 다시 말해, 동심은 오늘날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간직하거나 회복해야 할 어떤 바람직한 가치라기보다는 오히려 벗어나야 할 부정적인 정신적 상태로 여겨졌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지가 여기서 동심을 “참된 마음”, 곧 한자 그대로 “진심”(眞心)으로 정의한 것은 당시에 이 단어가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던 방식에 대한 일종의 전복을 내포한다.
본문에서 이지는 이 “참된 마음”으로서의 동심을 한 사람이 사회의 기존 질서를 학습하기 이전, 또는 사회가 신봉하는 이념에 따라 자신을 검열하는 것에 익숙해지기 이전의 상태로 정의한다. 이러한 외적 질서와 규범이 자아를 완전히 규율하게 되면―즉, “세상과 삶의 이치라는 것이 보고 듣는 것을 통해 들어와 마음에서 주인 노릇을 하게 되면”―그는 자신의 본래적이고 본질적인 상태로부터 멀어진 “거짓된 사람”(假人)으로 살아가게 된다. 이러한 사람들이 각자의 역할 가면을 쓰고 하는 말이란 자기 고유의 사유와 감정을 담아내지 못하는 허울뿐인 언어가 되고, 그들이 쓰는 글 역시 공기 중을 떠도는 타인의 말들을 짜깁기하고 흉내낸 것에 지나지 않게 된다.
흥미로운 점은 이 글 어디에서도 이지가 ‘거짓된 마음’(假心)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글뿐만 아니라 이 글이 실린 『분서』 전체에서도 이 용어는 발견되지 않는다. “거짓된 사람”, “거짓된 말”(假言), “거짓된 일”(假事), “거짓된 글”(假文) 등 그가 말하듯 도처에 거짓이 아닌 것이 없는데도 저자는 ‘거짓된 마음’을 이것들의 원인으로 지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표현의 성립 자체를 상상할 수 없다고 여기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사유는 본문에서 동심으로 대표되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이지의 견해를 재확인시켜 준다. 마음은 본질적으로 거짓될 수 없고, 단지 원래의 상태로부터 멀어지거나 혹은 그 발현이 가로막힐 뿐이다. 위에서 언급한 모든 거짓된 것들은 이러한 마음이 이러한 상태에 처했을 때 빚어지는 현상에 불과하며, 인간은 ‘거짓된 마음’을 찾아 없애기보다 “참된 마음”으로서의 동심을 회복하고 보존함으로써만 기만과 위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본문에서 저자는 동심의 이상적인 발현을 그것이 산출하는 탁월한 글에서 발견한다. 동심이 있는 사람이 쓴 글이라면 그 글의 형식이나 문체가 어떠하든, 또 그것을 누가 썼든 간에 좋은 글이 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좋은 글’은 단순히 예술성이 뛰어난 문장 이상으로 도덕적인 감화력을 지닌 글을 뜻한다. 유가 전통 속에서 사람들은 공자와 맹자 같은 성인들의 말을 옮겨 놓은 경전이 이러한 도덕적인 역할을 수행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저자는 대담하게도 제자들의 인지적 한계 때문에 처음부터 성인의 생각 전체를 기록할 수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어떤 텍스트가 불완전하게나마 성인의 말을 담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경전’으로 편찬되는 과정에서 편찬자들의 관점과 의도에 의해 오염되었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그는 경전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이 그것을 지적 허위와 도덕적 위선의 도구로 만들어버렸고, 그 결과 경전은 더 이상 성인들의 “동심”에서 비롯된 참된 언어를 전달할 수 없는 매체가 되었다고 말한다. 설령 어떤 경전이 성인의 말을 있는 그대로 온전히 옮겨 놓았다 하더라도 저자의 관점에서 그것은 당시의 많은 사람들이 믿었던 것처럼 시대와 상황을 초월하여 모든 곳에 언제나 적용될 수 있는 지혜와 도덕적 영향력을 갖고 있지 않다. 경전의 말씀은 어디까지나 성인들이 “어떤 한정된 필요에 의해 한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가 이 글에서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그가 경전의 숭고한 권위에 도전하면서까지 전달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본문 전체의 맥락을 되짚어 보면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동심”과 이로부터 비롯된 글이야말로, 오염되고 제한된 기존의 경전을 대체하는 궁극의 경전이라는 것이다. “동심”을 보존한 사람들은 경전에 담긴 특수한 맥락을 넘어, 실제 삶의 무수히 다양한 상황에 적용될 수 있는 살아 있는 지혜를 지닌다. 그러한 마음을 지닌 이가 곧 성인이며, 그의 말이 경전이다.
키워드
견문과 이치, 경전, 동심, 성인, 참과 거짓
전후맥락
동심에 관하여(童心說)」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부분에서 저자는 동심이란 무엇이며, 사람들이 그것을 어떻게 잃게 되는지를 설명한다. 두 번째 부분에서는 동심의 상실이 개인의 정신과 사회의 도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논하고, 마지막으로 동심에서 비롯된 문학의 가치를 주장하는 한편 유가 경전에 대한 맹목적 존숭을 비판한다.
고전본문
동심이란 참된 마음(眞心)이다. 동심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은 참된 마음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동심이란 꾸밈이 전혀 없고 오롯이 참된 것으로, 마음 속에서 한 가닥의 생각이 처음 떠오를 때의 바로 그 원초적인 마음이다. 동심을 잃으면 참된 마음을 잃게 되고, 참된 마음을 잃으면 참된 자기됨을 잃게 된다. 누군가가 참된 자신으로부터 멀어진다면 그는 더 이상 본래의 마음을 가질 수가 없다. 어린 아이는 사람으로서 처음 맞게 되는 단계이고, 동심은 마음이 처음 처하는 상태다. 그런 마음의 처음을 어떻게 잃어버릴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런데도 동심을 갑자기 잃어버리게 되는 것은 어째서인가? 대체로 처음에는 보고 듣는 것이 눈과 귀를 통해 들어와 마음에서 주인 노릇을 하게 되면서 동심을 잃게 된다. 그러다 사람이 나이 들어감에 따라 세상과 삶의 이치라는 것이 보고 듣는 것을 통해 들어와 마음에서 주인 노릇을 하게 되면서 동심을 잃게 된다. 시간이 오래 지나면, 아는 이치와 보고 듣는 것이 나날이 많아지고, 깨닫고 느끼는 대상의 범위가 나날이 넓어진다. 그러다 보면 명예라는 것이 좋아할 만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스스로도 이름을 드러내려고 애쓰다 보면 동심을 잃게 되고, 마찬가지로 나쁜 평판이 추하게 여겨진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런 것을 감추려고 애쓰다가 또 동심을 잃게 된다.
(중략)
동심이 막히면 말을 해도 그 말이 마음에서 우러나오지 않고, 정치를 해도 그 다스림이 뿌리가 없고, 글을 써도 의미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아름다움이 내면에 갖추어지지 않고 빛이 진실함에서 나오지 않으니, 한 마디의 덕스러운 말을 지어보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왜 그런가? 동심이 가로막힌 상태에서 견문과 이치가 자아의 외부에부터 들어와 본래의 마음을 대신했기 때문이다. 견문과 이치가 마음을 채우고 나면 그 사람이 하는 말이란 모두 이치와 견문에서 뻗어 나온 말이고 동심에서 저절로 우러나온 말이 아니다. 그런 말이 아무리 유려해 보여도 말하는 그 사람 자신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이런 것이 바로 거짓된 사람이 거짓된 말을 하고 거짓된 일을 하고 그럴듯하게 흉내만 내는 글을 쓴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람 자체가 이미 거짓이니 뭘 하든지 간에 거짓이 아닌 것이 없다. 같은 이치로 거짓된 사람은 거짓된 말을 해 주면 좋아하고 거짓된 일을 이야기해 주면 좋아하고 거짓된 글로 담론을 나누면 좋아한다. 도처에 거짓이 아닌 것이 없으니 그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없다. 온 무대가 거짓으로 가득한 판이니 다른 관객들에 가로막혀 있는 키 작은 사람이 어떻게 무대에서 벌어지는 일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분별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비록 천하의 뛰어난 글이라 하더라도 거짓된 사람들로 인해 사라지고 후대에 전해지지 못한 경우가 어찌 적겠는가? 왜 그런가? 천하의 뛰어난 글은 동심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동심이 계속 보존될 수만 있다면 그 사람에게서 이치가 작동하지 않고 견문이 마음에 들어차지 않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좋은 글이 나오지 않는 시대가 없고, 좋은 글을 쓰지 못하는 사람이 없고, 어떤 형식과 스타일로 쓰더라도 좋은 글이 안 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좋은 시를 왜 꼭 옛 사람이 좋다고 가려 뽑은 것에서 찾아야 하고, 좋은 문장을 왜 반드시 진(秦)나라 이전 고대의 글에서만 찾아야 하겠는가.
(중략)
『육경』, 『논어』, 『맹자』에 실린 말들은 그 책들이 쓰일 당시에 역사를 쓰는 관리가 지나치게 성인을 높여서 쓴 것이거나 아니면 신하가 지나치게 그들을 칭송해서 쓴 것이다. 이런 경우들이 아니라면, 사리에 어두운 문하생이나 어리숙한 제자들이 스승의 말씀을 기억해 놓기는 했는데 머리만 있고 꼬리는 없거나 뒤는 있는데 앞은 빠진 채로 전하거나, 혹은 어쩌다 본 것만 가지고 글로 옮겨 놓은 것이다. 후세에 공부하는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제대로 분별하지도 않고 그저 성인의 입에서 나온 것이라 하면서 그것들을 경전으로 삼아버렸다. 그러나 그 가운데 태반이 성인의 말씀이 아닐 수도 있음을 누가 알겠는가. 혹 그것들이 정말로 성인이 한 말이라고 해도 결국 어떤 한정된 필요에 의해 한 것이다. 환자가 병이 나서 약을 쓸 때 의사가 상황에 맞게 처방을 내리는 것처럼 경전에 기록된 성인들의 말씀이란 어리석은 제자와 사리에 어두운 문하생들을 그들의 제한된 상황 속에서 구해주려고 한 것에 불과하다. 어떤 약이 꾀병에도 듣는다고 해서 그 약을 모든 경우에 고집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소위 경전이라는 것들이 만세에 통하는 지당한 말씀이라고 어찌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결국 『육경』, 『논어』, 『맹자』와 같은 책들은 도학자(道學者)들이 입에 올리기를 좋아하는 말거리, 거짓된 자들이 숨어드는 소굴이 되어버렸다. 그런 까닭에 이 경전들로는 더 이상 동심에서 나온 말을 담아낼 수 없다. 아아! 나는 과연 어디서 동심을 잃지 않은 참되고 위대한 성인을 만나 그와 단 한 마디라도 진정한 글에 대해 함께 나눌 수 있을까?
[출전] 탁오, 『동심에 관하여』
토론하기
(1) 본문에서 저자가 말하는 “동심”이란 무엇인가? 저자는 사람들이 왜 “동심”을 잃게 된다고 주장하는가?
(2) 여러분은 “동심”을 막거나 가려야 했던 적이 있는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동심”을 지키는 것이 왜 어려운지를 나누어 보자.
(3) 오늘날 우리 사회의 여러 제도들(교육 제도, 가족이나 또래 관계, 온라인 문화 등)은 “동심”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되고 있는가, 아니면 오히려 그것이 드러나는 것을 막고 있는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해설읽기
오늘날 우리가 순수의 상징으로 여기는 “동심”이라는 개념은 16세기 말 저자의 맥락에서는 지금처럼 긍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글을 깊이 있게 연구한 학자 폴린 리(Pauline C. Lee)는 저자 당시의 독자들에게 “동심”이라는 단어는 ‘순수’보다는 ‘미숙함’ 또는 ‘어리숙함’이라는 의미를 먼저 떠올리게 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본문 첫 단락에 등장하는, “동심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은 이러한 상황을 반영한다. 다시 말해, 동심은 오늘날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간직하거나 회복해야 할 어떤 바람직한 가치라기보다는 오히려 벗어나야 할 부정적인 정신적 상태로 여겨졌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지가 여기서 동심을 “참된 마음”, 곧 한자 그대로 “진심”(眞心)으로 정의한 것은 당시에 이 단어가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던 방식에 대한 일종의 전복을 내포한다.
본문에서 이지는 이 “참된 마음”으로서의 동심을 한 사람이 사회의 기존 질서를 학습하기 이전, 또는 사회가 신봉하는 이념에 따라 자신을 검열하는 것에 익숙해지기 이전의 상태로 정의한다. 이러한 외적 질서와 규범이 자아를 완전히 규율하게 되면―즉, “세상과 삶의 이치라는 것이 보고 듣는 것을 통해 들어와 마음에서 주인 노릇을 하게 되면”―그는 자신의 본래적이고 본질적인 상태로부터 멀어진 “거짓된 사람”(假人)으로 살아가게 된다. 이러한 사람들이 각자의 역할 가면을 쓰고 하는 말이란 자기 고유의 사유와 감정을 담아내지 못하는 허울뿐인 언어가 되고, 그들이 쓰는 글 역시 공기 중을 떠도는 타인의 말들을 짜깁기하고 흉내낸 것에 지나지 않게 된다.
흥미로운 점은 이 글 어디에서도 이지가 ‘거짓된 마음’(假心)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글뿐만 아니라 이 글이 실린 『분서』 전체에서도 이 용어는 발견되지 않는다. “거짓된 사람”, “거짓된 말”(假言), “거짓된 일”(假事), “거짓된 글”(假文) 등 그가 말하듯 도처에 거짓이 아닌 것이 없는데도 저자는 ‘거짓된 마음’을 이것들의 원인으로 지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표현의 성립 자체를 상상할 수 없다고 여기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사유는 본문에서 동심으로 대표되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이지의 견해를 재확인시켜 준다. 마음은 본질적으로 거짓될 수 없고, 단지 원래의 상태로부터 멀어지거나 혹은 그 발현이 가로막힐 뿐이다. 위에서 언급한 모든 거짓된 것들은 이러한 마음이 이러한 상태에 처했을 때 빚어지는 현상에 불과하며, 인간은 ‘거짓된 마음’을 찾아 없애기보다 “참된 마음”으로서의 동심을 회복하고 보존함으로써만 기만과 위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본문에서 저자는 동심의 이상적인 발현을 그것이 산출하는 탁월한 글에서 발견한다. 동심이 있는 사람이 쓴 글이라면 그 글의 형식이나 문체가 어떠하든, 또 그것을 누가 썼든 간에 좋은 글이 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좋은 글’은 단순히 예술성이 뛰어난 문장 이상으로 도덕적인 감화력을 지닌 글을 뜻한다. 유가 전통 속에서 사람들은 공자와 맹자 같은 성인들의 말을 옮겨 놓은 경전이 이러한 도덕적인 역할을 수행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저자는 대담하게도 제자들의 인지적 한계 때문에 처음부터 성인의 생각 전체를 기록할 수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어떤 텍스트가 불완전하게나마 성인의 말을 담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경전’으로 편찬되는 과정에서 편찬자들의 관점과 의도에 의해 오염되었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그는 경전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이 그것을 지적 허위와 도덕적 위선의 도구로 만들어버렸고, 그 결과 경전은 더 이상 성인들의 “동심”에서 비롯된 참된 언어를 전달할 수 없는 매체가 되었다고 말한다. 설령 어떤 경전이 성인의 말을 있는 그대로 온전히 옮겨 놓았다 하더라도 저자의 관점에서 그것은 당시의 많은 사람들이 믿었던 것처럼 시대와 상황을 초월하여 모든 곳에 언제나 적용될 수 있는 지혜와 도덕적 영향력을 갖고 있지 않다. 경전의 말씀은 어디까지나 성인들이 “어떤 한정된 필요에 의해 한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가 이 글에서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그가 경전의 숭고한 권위에 도전하면서까지 전달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본문 전체의 맥락을 되짚어 보면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동심”과 이로부터 비롯된 글이야말로, 오염되고 제한된 기존의 경전을 대체하는 궁극의 경전이라는 것이다. “동심”을 보존한 사람들은 경전에 담긴 특수한 맥락을 넘어, 실제 삶의 무수히 다양한 상황에 적용될 수 있는 살아 있는 지혜를 지닌다. 그러한 마음을 지닌 이가 곧 성인이며, 그의 말이 경전이다.
키워드
견문과 이치, 경전, 동심, 성인, 참과 거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