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맥락
본문은 『수호전』 제51회의 한 장면으로, 정부 고위 관료인 고렴 세력과 양산박 집단 사이에 벌어지는 갈등과 전투(51~53회)의 도입부에 해당한다. 평소 양산박의 호걸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던 창주(滄州) 지방의 대부호 시진은 어느 날 숙부인 시 황성(皇城; 송대 무관 계열의 명목상의 직책)으로부터 다급한 한 통을 편지를 받는다. 새로 부임한 지방관 고렴의 처남인 은천석이 그의 집을 강제로 차지하고 가족들을 내쫓으려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소식을 접한 시진은 양산박에서 가장 난폭한 인물로 묘사되는 이규와 함께 숙부가 있는 고당주(高唐州)로 급히 달려간다.
고전본문
시진은 곧장 침실로 들어가 누워 있는 숙부를 보고는 침대 옆에 앉아 목 놓아 울었다. 시 황성의 후처가 와서 시진을 달랬다.
“대관인께서 말을 타고 먼 길을 오시느라 고생도 많으셨을 텐데, 쉴 새도 없이 이곳으로 바로 오셨군요.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시진은 예를 갖추어 인사를 올린 뒤,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다. 후처가 대답했다.
“이곳에 지부로 새로 부임해 온 고렴이라는 자가 있는데, 저희 주의 군 사령관이기도 합니다. 동경(東京: 북송의 수도 개봉[開封])에 있는 고 태위와 사촌지간이라고 하는데, 사촌 형의 권세를 믿고 여기서 못하는 짓이 없어요. 게다가 은천석이라는 처남 한 놈을 데리고 왔는데, 사람들이 모두 은 직각(直閣: 정부의 문헌을 담당하는 관리)이라 부르죠. 나이도 얼마 되지도 않은 놈이 매형의 힘을 믿고 설치는 꼴이 고렴과 똑같습니다. 그놈에게 알랑거려서 잘 보이려는 인간들이 저희 집 후원 연못에 지은 정자가 보기 좋다고 떠들어댄 모양이에요. 그러자 그놈이 간사한 불량배 이삼십 명을 데리고 들이닥쳐 뒤뜰을 둘러보더니 자기가 와서 살 테니 우리더러 당장 나가라고 하는 겁니다. 황성 어른께서 ‘우리 집안은 황족의 후손으로 선황께서 하사하신 단서철권(丹書鐵券: 황제가 공신들에게 상으로 내린 표지)이 있다. 누구도 감히 업신여기거나 능욕할 수가 없거늘 네가 어찌 감히 내 집을 빼앗으려 하느냐. 그리고 나와 우리 식솔더러 어디로 가라고 하는 것이냐?’라고 꾸짖으셨죠. 그런데도 그놈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나가라고만 했어요. 황성 어른께서 그놈을 붙잡고 쫓아내려 하시다가 도리어 밀치고 맞기까지 하셨죠. 이 일로 분을 이기지 못하신 어르신께서는 그 길로 병이 나 침상에 누우셨고, 그 뒤로는 일어나지도 못하시고 식사도 못하시고 계십니다. 약도 듣지를 않으니 아무래도 돌아가실 날이 가까운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대관인께서 도우러 오셨으니, 사정이 어렵더라도 이젠 안심입니다.”
“작은어머니께서는 염려 마십시오. 좋은 의원을 모셔서 작은아버지 치료하는 것만 잘해 주십시오. 단서철권이 저희 집에 있으니 제가 창주로 사람을 보내 가져오게 하겠습니다. 그런 다음에 그놈을 직접 만나 따져 보도록 하죠. 관아에서 소송을 하든, 황제 앞에 나아가든 두려워하실 일은 전혀 없습니다.”
“황성 어른께서 하신 일은 하나같이 제대로 된 것이 없었는데, 역시 대관인께서는 사리에 밝으시군요.”
시진은 잠시 숙부를 살핀 뒤 밖으로 나와 이규와 수행인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자세히 전했다. 이규는 그 말을 듣고 펄쩍 뛰었다.
“이런 막돼먹은 놈이 있나! 여기 내 도끼가 있으니 일단 도끼맛부터 보여주고 이야기합시다!”
“이 형, 잠깐 참으시오. 무턱대고 그놈에게 시비를 걸어서 되겠소? 그놈은 자기 뒷배를 믿고 까불고 있지만, 우리 집안에는 황제께서 내리신 성지가 있소. 여기서 그놈과 말이 통하지 않더라도 동경에 가면 그놈 못지않은 힘을 가진 대관들이 있으니 법대로 분명히 따져 송사를 벌이면 되지 않겠소.”
“법, 법이라니! 법이 그렇게 믿을 만한 것이었으면 세상이 이 지경이 되지도 않았을 거요! 나는 먼저 그놈을 좀 패 놓고 나서 생각해 보겠소. 만에 하나라도 그놈이 고소를 한다면 그 망할 놈의 판관까지 내 도끼로 찍어버릴 거요!”
시진이 웃으며 말했다.
“주동이 이 형과 얼굴을 마주치려 하지 않는 이유를 알 만합니다. 여기는 황제의 땅이니 양산박 산채에서 이 형이 하던 식으로 아무렇게나 할 수가 있겠소.”
“황제의 땅이면 뭐 어쨌단 말이오? 내가 강주의 무위군에서도 죽여야 할 놈들은 다 죽이지 않았소?”
“일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보고, 정말 필요할 때가 오면 그때 부탁하겠소. 지금은 별일 없으니 방에서 잠시 진정하고 계시오.”
바로 그때 안에서 하인 하나가 다급히 뛰어나와 시진에게 어서 시 황성에게 가보라고 했다. 시진이 방에 들어가 침상 앞으로 다가가자 황성이 눈물을 머금고 말했다.
“너는 기백이 있는 사람이니 조상을 욕되게 하지는 않겠구나. 나는 이번 일로 은천석에게 욕을 당하고 죽지만 너는 골육인 내 얼굴을 생각해서라도 동경으로 가 황제께 직접 상소를 올려 내 원수를 갚도록 해라. 그것만 해 준다면 내가 죽어서도 결코 너의 그 마음을 잊지 않을 것이야. 부디 몸조심하거라. 더는 할 말이 없구나.”
시 황성은 말을 마치자마자 숨을 거두었다. 시진은 오랫동안 통곡했다.
[출전] 시내암, 『수호전』
토론하기
(1) 본문의 사건은 당시 사회의 어떤 문제를 드러내는가? 이 사건에서 알 수 있는 송대 사회는 어떤 모습인가?
(2) 만약 여러분의 가까운 친구가 억울한 일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친구를 도와주고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시진의 경우와 같이 제도적 해결이 당장은 어려운 상황이라면,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3)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사회적 약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이들을 돕기 위해 마을 공동체, 시민 사회, 국가는 어떤 일을 하고 있는가? 여러분이 직접 보았거나 알고 있는 예가 있다면 함께 나누어 보자.
해설읽기
본문의 사건은 ‘부패한 권력의 횡포와 이에 맞서는 양산박 집단의 투쟁’이라는 『수호전』 전체의 서사를 압축하고 있다. 동네 불량배들의 우두머리에 불과한 은천석은 매형 고렴을 등에 업고 온갖 악행을 일삼는다. 시 황성의 부인이 이야기하듯이 고렴은 송대에 수도 다음으로 큰 행정 단위였던 부(府)의 장관이자, 그보다 작은 단위인 주(州)의 군 사령관이다. 더 큰 문제는 이렇게 권력을 배경으로 폭력을 행하는 것이 은천석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고렴 역시 사촌 형인 태위(太尉; 국가의 군대를 총괄하는 직책) 고구의 힘을 믿고 마찬가지로 일상적으로 악행을 저지른다. 본문은 “~의 권력을 힘입어 못하는 짓이 없다”(倚仗 ... 勢要, ... 無所不為)라는 표현을 고렴과 은천석에 대한 시 황성 부인의 설명에 반복해서 사용함으로써 이러한 악행이 개별적인 인물의 비도덕성에 기인하는 것 이상으로 부패한 권력의 사적 네트워크에 근거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은천석에서 고렴, 고구로 이어지는 이 부패의 연쇄 고리는 고구 뒤에 있는 또 한 사람의 권력자를 가리킨다. 이 소설의 첫 회는 젊어서 축구를 잘했던 고구가 아무 직업도 없이 이곳저곳을 전전하다가 우연히 마찬가지로 놀기를 좋아하고 그중에서도 축구를 좋아하던 황자 단왕(端王)의 눈에 띄어 그와 가깝게 지내게 된 사연을 이야기한다. 이 단왕이 바로 나중에 황제가 된 휘종(徽宗)이며, 휘종이 다스리던 시기가 이 소설의 주요한 시간적 배경이다. 휘종은 자신의 친구나 다름없는 고구를 국방의 최고 책임자로 임명한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은천석이 고렴을 통해 고구에게까지 연결된다는 사실은 부패한 권력의 구조가 황제를 정점으로 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소설이 묘사하는 국가 권력의 도덕적 타락은 은천석이 단서철권을 무시하는 장면에서 다시 한 번 확인된다. 단서철권은 황제가 공신들에게 내린 철제 표식으로, 이를 받은 가문은 반역죄를 제외한 모든 범죄에 대해 대대로 사법적 처벌을 피할 수 있었다. 본문 바로 앞의 제50회에서 시진은 자신의 조상인 후주(後周, 951~960)의 시(柴) 씨 황실이 송나라 태조에게 천자의 자리를 양위하면서 단서철권을 받았다고 말한다. 이런 이유로 시진은 “대관인”이라는 존칭으로 불렸고, 또한 관가의 수색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에 죄를 짓고 도망 중인 사람들—이들은 나중에 양산박에 합류한다—을 숨겨줄 수 있었다. 본문에서 은천석은 단서철권으로 상징되는 이러한 황실의 오랜 사법적·도덕적 권위를 무시하고 시 황성을 폭행한다. 이는 고렴에서 고구를 거쳐 황제로 이어지는 현재의 권력이 과거 황제가 정한 질서를 부정하고 있음을 뜻한다.
황실이 더 이상 도덕적 권위의 중심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사법 체계마저 작동을 멈춘 상황에서 개인은 어떻게 부패한 권력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을까? 본문은 두 가지 선택지를 제시한다. 하나는 시진처럼 여전히 제도와 이성에 대한 믿음을 갖고 침착하게 대응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규처럼 법의 도움을 기다리기보다 자신이 가진 물리적인 힘으로 해결하는 것이다. 이 사건과 관련된 본문 이후의 이야기는 이규의 손을 들어준다. 은천석이 다시 찾아와 시진에게 퇴거를 재촉하자, 이를 본 이규가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은천석을 때려 죽인다. 고렴은 시진에게 누명을 씌워 감옥에 가두고. 이규는 양산박으로 가서 이 사실을 알린다. 양산박 무리는 시진을 구해낸다. 결과적으로 시진은 황제에게 가서 상소하라는 숙부의 지시를 따르지는 못했지만, 양산박 일당의 도움으로 숙부의 원수를 갚을 수 있게 되었다. 시진은 이 일을 계기로 양산박 무리에 합류한다.
은천석과 시진의 대립 이면에 놓인 고렴과 양산박 집단의 대립은 하나의 아이러니를 내포한다. 시진이 이야기하듯이, 지금 사건이 벌어지는 고당주는 황제의 통치가 작동하는 곳, 즉 법에 의해 다스려지는 공간이며, 불법을 저지르고 도망한 자들이 모여 있는 양산박과는 다른 곳이다. 그러나 만약 이 ‘법의 공간’에서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이 타인을 억압하고 횡포를 일삼는다면, 정말로 무법한 자들은 누구인가? 누가 진짜 “도적(盜賊)”인가?
양산박 집단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때때로 잔혹한 범죄를 저지르기도 하지만, 자신들보다 훨씬 더 잔혹한 지배층의 폭력에 맞서 도움받을 곳 없는 사회적 약자들을 도울 때 그들은 영웅으로 이야기된다. 이 ‘의롭지 않은 자들의 의’ 혹은 ‘법의 외부에 있는 자들에 의한 질서의 수호’라는 역설은 이 소설을 관통한다. 물론 이 역설은 ‘폭력에 맞서는 폭력은 정당한가’라는 또 다른 질문을 낳는다. 아무리 부패한 지배층에 대항하는 (아마도 유일한) 방식이라 하더라도 폭력은 그 자체로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이며, 그것으로 맞서는 세력의 악을 되풀이하게 된다. 이처럼 양산박 집단의 폭력성을 어떻게 바라보고 평가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이 소설이 던지는 가장 근원적인 질문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의로움이란 무엇인가?
키워드
부패한 권력, 사회적 약자, 저항, 정의, 폭력
전후맥락
본문은 『수호전』 제51회의 한 장면으로, 정부 고위 관료인 고렴 세력과 양산박 집단 사이에 벌어지는 갈등과 전투(51~53회)의 도입부에 해당한다. 평소 양산박의 호걸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던 창주(滄州) 지방의 대부호 시진은 어느 날 숙부인 시 황성(皇城; 송대 무관 계열의 명목상의 직책)으로부터 다급한 한 통을 편지를 받는다. 새로 부임한 지방관 고렴의 처남인 은천석이 그의 집을 강제로 차지하고 가족들을 내쫓으려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소식을 접한 시진은 양산박에서 가장 난폭한 인물로 묘사되는 이규와 함께 숙부가 있는 고당주(高唐州)로 급히 달려간다.
고전본문
시진은 곧장 침실로 들어가 누워 있는 숙부를 보고는 침대 옆에 앉아 목 놓아 울었다. 시 황성의 후처가 와서 시진을 달랬다.
“대관인께서 말을 타고 먼 길을 오시느라 고생도 많으셨을 텐데, 쉴 새도 없이 이곳으로 바로 오셨군요.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시진은 예를 갖추어 인사를 올린 뒤,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다. 후처가 대답했다.
“이곳에 지부로 새로 부임해 온 고렴이라는 자가 있는데, 저희 주의 군 사령관이기도 합니다. 동경(東京: 북송의 수도 개봉[開封])에 있는 고 태위와 사촌지간이라고 하는데, 사촌 형의 권세를 믿고 여기서 못하는 짓이 없어요. 게다가 은천석이라는 처남 한 놈을 데리고 왔는데, 사람들이 모두 은 직각(直閣: 정부의 문헌을 담당하는 관리)이라 부르죠. 나이도 얼마 되지도 않은 놈이 매형의 힘을 믿고 설치는 꼴이 고렴과 똑같습니다. 그놈에게 알랑거려서 잘 보이려는 인간들이 저희 집 후원 연못에 지은 정자가 보기 좋다고 떠들어댄 모양이에요. 그러자 그놈이 간사한 불량배 이삼십 명을 데리고 들이닥쳐 뒤뜰을 둘러보더니 자기가 와서 살 테니 우리더러 당장 나가라고 하는 겁니다. 황성 어른께서 ‘우리 집안은 황족의 후손으로 선황께서 하사하신 단서철권(丹書鐵券: 황제가 공신들에게 상으로 내린 표지)이 있다. 누구도 감히 업신여기거나 능욕할 수가 없거늘 네가 어찌 감히 내 집을 빼앗으려 하느냐. 그리고 나와 우리 식솔더러 어디로 가라고 하는 것이냐?’라고 꾸짖으셨죠. 그런데도 그놈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나가라고만 했어요. 황성 어른께서 그놈을 붙잡고 쫓아내려 하시다가 도리어 밀치고 맞기까지 하셨죠. 이 일로 분을 이기지 못하신 어르신께서는 그 길로 병이 나 침상에 누우셨고, 그 뒤로는 일어나지도 못하시고 식사도 못하시고 계십니다. 약도 듣지를 않으니 아무래도 돌아가실 날이 가까운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대관인께서 도우러 오셨으니, 사정이 어렵더라도 이젠 안심입니다.”
“작은어머니께서는 염려 마십시오. 좋은 의원을 모셔서 작은아버지 치료하는 것만 잘해 주십시오. 단서철권이 저희 집에 있으니 제가 창주로 사람을 보내 가져오게 하겠습니다. 그런 다음에 그놈을 직접 만나 따져 보도록 하죠. 관아에서 소송을 하든, 황제 앞에 나아가든 두려워하실 일은 전혀 없습니다.”
“황성 어른께서 하신 일은 하나같이 제대로 된 것이 없었는데, 역시 대관인께서는 사리에 밝으시군요.”
시진은 잠시 숙부를 살핀 뒤 밖으로 나와 이규와 수행인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자세히 전했다. 이규는 그 말을 듣고 펄쩍 뛰었다.
“이런 막돼먹은 놈이 있나! 여기 내 도끼가 있으니 일단 도끼맛부터 보여주고 이야기합시다!”
“이 형, 잠깐 참으시오. 무턱대고 그놈에게 시비를 걸어서 되겠소? 그놈은 자기 뒷배를 믿고 까불고 있지만, 우리 집안에는 황제께서 내리신 성지가 있소. 여기서 그놈과 말이 통하지 않더라도 동경에 가면 그놈 못지않은 힘을 가진 대관들이 있으니 법대로 분명히 따져 송사를 벌이면 되지 않겠소.”
“법, 법이라니! 법이 그렇게 믿을 만한 것이었으면 세상이 이 지경이 되지도 않았을 거요! 나는 먼저 그놈을 좀 패 놓고 나서 생각해 보겠소. 만에 하나라도 그놈이 고소를 한다면 그 망할 놈의 판관까지 내 도끼로 찍어버릴 거요!”
시진이 웃으며 말했다.
“주동이 이 형과 얼굴을 마주치려 하지 않는 이유를 알 만합니다. 여기는 황제의 땅이니 양산박 산채에서 이 형이 하던 식으로 아무렇게나 할 수가 있겠소.”
“황제의 땅이면 뭐 어쨌단 말이오? 내가 강주의 무위군에서도 죽여야 할 놈들은 다 죽이지 않았소?”
“일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보고, 정말 필요할 때가 오면 그때 부탁하겠소. 지금은 별일 없으니 방에서 잠시 진정하고 계시오.”
바로 그때 안에서 하인 하나가 다급히 뛰어나와 시진에게 어서 시 황성에게 가보라고 했다. 시진이 방에 들어가 침상 앞으로 다가가자 황성이 눈물을 머금고 말했다.
“너는 기백이 있는 사람이니 조상을 욕되게 하지는 않겠구나. 나는 이번 일로 은천석에게 욕을 당하고 죽지만 너는 골육인 내 얼굴을 생각해서라도 동경으로 가 황제께 직접 상소를 올려 내 원수를 갚도록 해라. 그것만 해 준다면 내가 죽어서도 결코 너의 그 마음을 잊지 않을 것이야. 부디 몸조심하거라. 더는 할 말이 없구나.”
시 황성은 말을 마치자마자 숨을 거두었다. 시진은 오랫동안 통곡했다.
[출전] 시내암, 『수호전』
토론하기
(1) 본문의 사건은 당시 사회의 어떤 문제를 드러내는가? 이 사건에서 알 수 있는 송대 사회는 어떤 모습인가?
(2) 만약 여러분의 가까운 친구가 억울한 일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친구를 도와주고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시진의 경우와 같이 제도적 해결이 당장은 어려운 상황이라면,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3)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사회적 약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이들을 돕기 위해 마을 공동체, 시민 사회, 국가는 어떤 일을 하고 있는가? 여러분이 직접 보았거나 알고 있는 예가 있다면 함께 나누어 보자.
해설읽기
본문의 사건은 ‘부패한 권력의 횡포와 이에 맞서는 양산박 집단의 투쟁’이라는 『수호전』 전체의 서사를 압축하고 있다. 동네 불량배들의 우두머리에 불과한 은천석은 매형 고렴을 등에 업고 온갖 악행을 일삼는다. 시 황성의 부인이 이야기하듯이 고렴은 송대에 수도 다음으로 큰 행정 단위였던 부(府)의 장관이자, 그보다 작은 단위인 주(州)의 군 사령관이다. 더 큰 문제는 이렇게 권력을 배경으로 폭력을 행하는 것이 은천석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고렴 역시 사촌 형인 태위(太尉; 국가의 군대를 총괄하는 직책) 고구의 힘을 믿고 마찬가지로 일상적으로 악행을 저지른다. 본문은 “~의 권력을 힘입어 못하는 짓이 없다”(倚仗 ... 勢要, ... 無所不為)라는 표현을 고렴과 은천석에 대한 시 황성 부인의 설명에 반복해서 사용함으로써 이러한 악행이 개별적인 인물의 비도덕성에 기인하는 것 이상으로 부패한 권력의 사적 네트워크에 근거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은천석에서 고렴, 고구로 이어지는 이 부패의 연쇄 고리는 고구 뒤에 있는 또 한 사람의 권력자를 가리킨다. 이 소설의 첫 회는 젊어서 축구를 잘했던 고구가 아무 직업도 없이 이곳저곳을 전전하다가 우연히 마찬가지로 놀기를 좋아하고 그중에서도 축구를 좋아하던 황자 단왕(端王)의 눈에 띄어 그와 가깝게 지내게 된 사연을 이야기한다. 이 단왕이 바로 나중에 황제가 된 휘종(徽宗)이며, 휘종이 다스리던 시기가 이 소설의 주요한 시간적 배경이다. 휘종은 자신의 친구나 다름없는 고구를 국방의 최고 책임자로 임명한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은천석이 고렴을 통해 고구에게까지 연결된다는 사실은 부패한 권력의 구조가 황제를 정점으로 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소설이 묘사하는 국가 권력의 도덕적 타락은 은천석이 단서철권을 무시하는 장면에서 다시 한 번 확인된다. 단서철권은 황제가 공신들에게 내린 철제 표식으로, 이를 받은 가문은 반역죄를 제외한 모든 범죄에 대해 대대로 사법적 처벌을 피할 수 있었다. 본문 바로 앞의 제50회에서 시진은 자신의 조상인 후주(後周, 951~960)의 시(柴) 씨 황실이 송나라 태조에게 천자의 자리를 양위하면서 단서철권을 받았다고 말한다. 이런 이유로 시진은 “대관인”이라는 존칭으로 불렸고, 또한 관가의 수색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에 죄를 짓고 도망 중인 사람들—이들은 나중에 양산박에 합류한다—을 숨겨줄 수 있었다. 본문에서 은천석은 단서철권으로 상징되는 이러한 황실의 오랜 사법적·도덕적 권위를 무시하고 시 황성을 폭행한다. 이는 고렴에서 고구를 거쳐 황제로 이어지는 현재의 권력이 과거 황제가 정한 질서를 부정하고 있음을 뜻한다.
황실이 더 이상 도덕적 권위의 중심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사법 체계마저 작동을 멈춘 상황에서 개인은 어떻게 부패한 권력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을까? 본문은 두 가지 선택지를 제시한다. 하나는 시진처럼 여전히 제도와 이성에 대한 믿음을 갖고 침착하게 대응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규처럼 법의 도움을 기다리기보다 자신이 가진 물리적인 힘으로 해결하는 것이다. 이 사건과 관련된 본문 이후의 이야기는 이규의 손을 들어준다. 은천석이 다시 찾아와 시진에게 퇴거를 재촉하자, 이를 본 이규가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은천석을 때려 죽인다. 고렴은 시진에게 누명을 씌워 감옥에 가두고. 이규는 양산박으로 가서 이 사실을 알린다. 양산박 무리는 시진을 구해낸다. 결과적으로 시진은 황제에게 가서 상소하라는 숙부의 지시를 따르지는 못했지만, 양산박 일당의 도움으로 숙부의 원수를 갚을 수 있게 되었다. 시진은 이 일을 계기로 양산박 무리에 합류한다.
은천석과 시진의 대립 이면에 놓인 고렴과 양산박 집단의 대립은 하나의 아이러니를 내포한다. 시진이 이야기하듯이, 지금 사건이 벌어지는 고당주는 황제의 통치가 작동하는 곳, 즉 법에 의해 다스려지는 공간이며, 불법을 저지르고 도망한 자들이 모여 있는 양산박과는 다른 곳이다. 그러나 만약 이 ‘법의 공간’에서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이 타인을 억압하고 횡포를 일삼는다면, 정말로 무법한 자들은 누구인가? 누가 진짜 “도적(盜賊)”인가?
양산박 집단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때때로 잔혹한 범죄를 저지르기도 하지만, 자신들보다 훨씬 더 잔혹한 지배층의 폭력에 맞서 도움받을 곳 없는 사회적 약자들을 도울 때 그들은 영웅으로 이야기된다. 이 ‘의롭지 않은 자들의 의’ 혹은 ‘법의 외부에 있는 자들에 의한 질서의 수호’라는 역설은 이 소설을 관통한다. 물론 이 역설은 ‘폭력에 맞서는 폭력은 정당한가’라는 또 다른 질문을 낳는다. 아무리 부패한 지배층에 대항하는 (아마도 유일한) 방식이라 하더라도 폭력은 그 자체로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이며, 그것으로 맞서는 세력의 악을 되풀이하게 된다. 이처럼 양산박 집단의 폭력성을 어떻게 바라보고 평가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이 소설이 던지는 가장 근원적인 질문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의로움이란 무엇인가?
키워드
부패한 권력, 사회적 약자, 저항, 정의, 폭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