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맥락
이 글은 다산 정약용이 저술한 오학론(五學論)의 네 번째 편으로, 과거학(科擧學)의 폐해를 비판하고 있다. 다산에 따르면 배우가 무대 위에서 연극을 연출하는 것처럼, 과거학을 하는 자는 유학을 숭상하고 이단을 배척하지도 않으면서 유학자의 옷을 입고 유학자인 척을 한다. 그러나 과거학의 실상을 살펴보면 아름답고 고상한 수사로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학문일 뿐, 유학과 동떨어져 있다.
과거학을 배우는 자들은 출세를 목표하여 성리학은 물론, 훈고학이나 문장학 등 다른 학문을 경시하고, 과거학의 격식에 맞는 글만 훌륭하다고 상찬한다. 또한 요행으로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명성을 얻게 되면, 부모는 물론 일가친척과 친구들이 그를 존경하고 군주는 그를 경하한다. 그러나 과거학과 상관없는 학문을 한 자들은 아무리 행실이 뛰어나고 지혜가 훌륭하다고 하더라도, 나라에 쓰이지 못한 채 한을 품고 쓸쓸히 죽어간다.
또한 다산에 따르면 과거학은 저마다 다른 개성과 특기를 지닌 수재들을 형식적인 시험 틀에 일률적으로 집어넣고 짓이긴다는 점에서, 국가적 손실과 재능의 낭비를 초래한다. 과거가 없는 옆 나라 일본과 비교해 보면, 일본은 조선과 달리 과거가 없기에 문학은 물론 실용 학문이 크게 발달하여 군사력이 중국과 견줄만하고 국가의 제도와 기강도 바로잡혀 있다.
고전본문
일단 과거학에 빠지면 예악(禮樂)은 자신과 관계없는 일로 여기고 형정(刑政)은 잡무로 여긴다. 그리하여 지방관에 임명되면 업무에 어두워 아전들이 하자는 대로 따르기만 한다. 내직(內職)에 들어와 회계와 송사(訟事)를 담당하는 관리에 임명되면 우두커니 자리만 지키고 앉아 녹봉을 타 먹으면서 그저 예전 처리 방식만 물어 일을 관행대로 처리하려 한다. 외직(外職)에 나가 군대를 이끌고 적을 막아야 하는 임무를 맡기면, 군대에 관한 일은 배우지 않았다고 하면서 무관을 추대하여 맨 앞에 세운다. (이런 자를) 천하 어디에 쓸 수 있겠는가.
[출전] 정약용, 『여유당전서』, 「오학론 」 중에서
토론하기
(1) 조선시대에 과거학이 있었다면 오늘날 한국 사회에는 대입을 비롯한 공무원이 되기 위한 각종 고시가 존재한다. 학교와 학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문제 풀이 시험 위주의 교육이 실제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식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는지 비판적으로 성찰해 보자.
(2) 다산은 자기 성찰과 국가와 사회 운용에 필요한 지식 둘 다 중시했다. 성찰을 위한 앎
과 생계를 위한 앎 중 현대 사회에서 무엇이 더 중시되어야 할지 논의해 보자.
(3) 다산은 부국강병에 필요하다면 오랑캐의 학문이라도 적극 수용해야 한다고 보았다. 오
늘날 우리 사회에 어떤 지식이 필요한지 토론하고, 외래 지식의 수용을 꺼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 추론해 보자.
해설읽기
과거학은 과거시험에서 어떤 주제가 출제되면 일정 격식에 맞추어 글을 짓는 학문을 의미한다. 이 학문은 수많은 전거(典據)와 음운(音韻)을 암기하여 일률적인 틀에 적합한 글을 짓는 것이 목적인 까닭에, 일상과 사회, 국가의 운용에 필요한 지식의 습득과 그것의 실천과 거리가 멀다. 그리하여 과거학에 몰두하게 되면 예악과 같은 국가 제도의 운용과 유지는 자신과 무관한 일로 여기게 되고, 정치와 형벌 문제 역시 소홀하게 생각한다.
평생을 과거학에 매달려 운 좋게 시험에 통과하고 지방에 관직을 얻는다 하더라도 행정 업무에는 아는 바가 전혀 없어, 결국 그 지방 아전들의 손에 놀아난다. 또한 중앙 정부에서 일하게 되더라도 재정과 세무, 감옥과 소송 등을 담당하는 업무를 맡으면, 그 일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기에, 자리만 지키고 앉아 녹봉만 축낼 뿐이다. 새롭게 배우려 시도하기는커녕, 이전에 처리해 온 방식을 주변에 묻고 관행대로 처리하려는 구태의연한 태도를 보인다.
또한 군대를 통솔하여 방어하는 업무를 부여하면, 자신은 무기와 군대, 국방에 관한 지식은 배운 적이 없다고 변명하며, 무관을 추대하여 내세운다. 다산이 볼 때, 이런 사람은 사회와 국가에 아무 기여도 할 수 없는 무능하고 무용한 자라고 할 수 있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성리학은 심성론을 중심으로 정교하게 발전하였고, 과거시험의 영향 하에 수사와 전거로 점철된 시문을 작성하는 사장학(詞章學) 역시 조선 지식계에 크게 유행했다. 다산의 관점에서 성리학에 몰두한 유학자들은 이론의 분석에만 집착하여 공리공담을 일삼았고, 과거학에 빠진 자들은 오로지 출세를 위해 현란하고 아름다운 문장 짓기에 심력을 쏟았다.
이는 전부 현실 사회와 국가에 도움이 되지 않는 쓸모없는 지식으로, 군주를 도와 국가를 운용해야 할 사대부들에게 적합한 학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그들의 행정 능력과 국정 능력을 갉아먹는 유독한 학문이었다.
다산이 볼 때 성찰을 위한 앎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시급한 앎은 현실을 유지하고 개선할 수 있는 유용한 지식이었다. 정치와 법률, 재정과 행정, 기술, 군사 분야의 지식이 없이는 국가가 부강해질 수도 없고 백성도 편안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정조를 도와 중앙 정부와 지방에서 행정가로서 탁월한 재능을 보인 것은 물론, 서양이나 청나라처럼 조선인에게 오랑캐로 간주된 자들의 학문도 적극적으로 흡수하여 현실 개선에 적용하려 한 것도, 전문 지식의 유용성과 중요성을 절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산은 늘 “공자의 도는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일 뿐이다”라고 주장했다. 수기는 자신을 성찰하고 치인은 타인을 다스린다는 의미이다. 다산에게 앎이란 성찰에 기초한 국가 제도의 운영이었으며, 이런 점에서 실용적인 지식을 매우 중시했다.
사회와 국가에 쓸모 있는 지식을 강조했던 다산의 태도는 정조가 승하한 이듬해, 천주교도로 몰려 강진으로 유배 간 1801년 이후에도 한결같이 유지되었다. 그는 18년이라는 긴 유배 기간에 500여 권이 넘는 거질의 저술을 완성하였는데, 대부분이 국가 경영과 국방, 송사, 의술처럼 현실 생활에 요긴한 지식을 수집하고 편집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가운데 일표이서(一表二書)라 통칭하는 저서 세 권이 대표적인데, 바로 『목민심서』 와 『경세유표』,『흠흠신서』이다. 『목민심서』는 목민관 즉 지방관이 마음에 새겨야 할 책이라는 의미로, 수령이 지켜야 할 지침 및 관리들의 폭정에 대한 비판이 실려있다. 『경세유표』는 세상의 운영에 대한 유표(遺表)라는 말로, 유표란 신하가 죽음에 임박했을 때 군주에게 올리는 글을 의미한다. 『경세유표』는 행정 기구의 개편을 비롯하여 관제, 토지제, 부세제 등 모든 제도의 개혁 원리를 제시한 책이다.
『흠흠신서』는 조선시대의 형법과 그 사례를 다룬 책이다. ‘흠흠(欽欽)’이란 걱정되어 잊지 못하는 모습을 가리키는 말로, 죄수를 신중히 심의하는 흠휼(欽恤) 사상에 입각하여 재판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다산의 대표 저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바와 같이, 그는 일상생활은 물론 나아가 국가경영에 필요한 지식을 집대성할 정도로 실생활에 필요한 지식을 추구했던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키워드
과거학, 다산 정약용, 성리학, 성찰, 실용 지식
전후맥락
이 글은 다산 정약용이 저술한 오학론(五學論)의 네 번째 편으로, 과거학(科擧學)의 폐해를 비판하고 있다. 다산에 따르면 배우가 무대 위에서 연극을 연출하는 것처럼, 과거학을 하는 자는 유학을 숭상하고 이단을 배척하지도 않으면서 유학자의 옷을 입고 유학자인 척을 한다. 그러나 과거학의 실상을 살펴보면 아름답고 고상한 수사로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학문일 뿐, 유학과 동떨어져 있다.
과거학을 배우는 자들은 출세를 목표하여 성리학은 물론, 훈고학이나 문장학 등 다른 학문을 경시하고, 과거학의 격식에 맞는 글만 훌륭하다고 상찬한다. 또한 요행으로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명성을 얻게 되면, 부모는 물론 일가친척과 친구들이 그를 존경하고 군주는 그를 경하한다. 그러나 과거학과 상관없는 학문을 한 자들은 아무리 행실이 뛰어나고 지혜가 훌륭하다고 하더라도, 나라에 쓰이지 못한 채 한을 품고 쓸쓸히 죽어간다.
또한 다산에 따르면 과거학은 저마다 다른 개성과 특기를 지닌 수재들을 형식적인 시험 틀에 일률적으로 집어넣고 짓이긴다는 점에서, 국가적 손실과 재능의 낭비를 초래한다. 과거가 없는 옆 나라 일본과 비교해 보면, 일본은 조선과 달리 과거가 없기에 문학은 물론 실용 학문이 크게 발달하여 군사력이 중국과 견줄만하고 국가의 제도와 기강도 바로잡혀 있다.
고전본문
일단 과거학에 빠지면 예악(禮樂)은 자신과 관계없는 일로 여기고 형정(刑政)은 잡무로 여긴다. 그리하여 지방관에 임명되면 업무에 어두워 아전들이 하자는 대로 따르기만 한다. 내직(內職)에 들어와 회계와 송사(訟事)를 담당하는 관리에 임명되면 우두커니 자리만 지키고 앉아 녹봉을 타 먹으면서 그저 예전 처리 방식만 물어 일을 관행대로 처리하려 한다. 외직(外職)에 나가 군대를 이끌고 적을 막아야 하는 임무를 맡기면, 군대에 관한 일은 배우지 않았다고 하면서 무관을 추대하여 맨 앞에 세운다. (이런 자를) 천하 어디에 쓸 수 있겠는가.
[출전] 정약용, 『여유당전서』, 「오학론 」 중에서
토론하기
(1) 조선시대에 과거학이 있었다면 오늘날 한국 사회에는 대입을 비롯한 공무원이 되기 위한 각종 고시가 존재한다. 학교와 학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문제 풀이 시험 위주의 교육이 실제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식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는지 비판적으로 성찰해 보자.
(2) 다산은 자기 성찰과 국가와 사회 운용에 필요한 지식 둘 다 중시했다. 성찰을 위한 앎
과 생계를 위한 앎 중 현대 사회에서 무엇이 더 중시되어야 할지 논의해 보자.
(3) 다산은 부국강병에 필요하다면 오랑캐의 학문이라도 적극 수용해야 한다고 보았다. 오
늘날 우리 사회에 어떤 지식이 필요한지 토론하고, 외래 지식의 수용을 꺼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 추론해 보자.
해설읽기
과거학은 과거시험에서 어떤 주제가 출제되면 일정 격식에 맞추어 글을 짓는 학문을 의미한다. 이 학문은 수많은 전거(典據)와 음운(音韻)을 암기하여 일률적인 틀에 적합한 글을 짓는 것이 목적인 까닭에, 일상과 사회, 국가의 운용에 필요한 지식의 습득과 그것의 실천과 거리가 멀다. 그리하여 과거학에 몰두하게 되면 예악과 같은 국가 제도의 운용과 유지는 자신과 무관한 일로 여기게 되고, 정치와 형벌 문제 역시 소홀하게 생각한다.
평생을 과거학에 매달려 운 좋게 시험에 통과하고 지방에 관직을 얻는다 하더라도 행정 업무에는 아는 바가 전혀 없어, 결국 그 지방 아전들의 손에 놀아난다. 또한 중앙 정부에서 일하게 되더라도 재정과 세무, 감옥과 소송 등을 담당하는 업무를 맡으면, 그 일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기에, 자리만 지키고 앉아 녹봉만 축낼 뿐이다. 새롭게 배우려 시도하기는커녕, 이전에 처리해 온 방식을 주변에 묻고 관행대로 처리하려는 구태의연한 태도를 보인다.
또한 군대를 통솔하여 방어하는 업무를 부여하면, 자신은 무기와 군대, 국방에 관한 지식은 배운 적이 없다고 변명하며, 무관을 추대하여 내세운다. 다산이 볼 때, 이런 사람은 사회와 국가에 아무 기여도 할 수 없는 무능하고 무용한 자라고 할 수 있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성리학은 심성론을 중심으로 정교하게 발전하였고, 과거시험의 영향 하에 수사와 전거로 점철된 시문을 작성하는 사장학(詞章學) 역시 조선 지식계에 크게 유행했다. 다산의 관점에서 성리학에 몰두한 유학자들은 이론의 분석에만 집착하여 공리공담을 일삼았고, 과거학에 빠진 자들은 오로지 출세를 위해 현란하고 아름다운 문장 짓기에 심력을 쏟았다.
이는 전부 현실 사회와 국가에 도움이 되지 않는 쓸모없는 지식으로, 군주를 도와 국가를 운용해야 할 사대부들에게 적합한 학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그들의 행정 능력과 국정 능력을 갉아먹는 유독한 학문이었다.
다산이 볼 때 성찰을 위한 앎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시급한 앎은 현실을 유지하고 개선할 수 있는 유용한 지식이었다. 정치와 법률, 재정과 행정, 기술, 군사 분야의 지식이 없이는 국가가 부강해질 수도 없고 백성도 편안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정조를 도와 중앙 정부와 지방에서 행정가로서 탁월한 재능을 보인 것은 물론, 서양이나 청나라처럼 조선인에게 오랑캐로 간주된 자들의 학문도 적극적으로 흡수하여 현실 개선에 적용하려 한 것도, 전문 지식의 유용성과 중요성을 절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산은 늘 “공자의 도는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일 뿐이다”라고 주장했다. 수기는 자신을 성찰하고 치인은 타인을 다스린다는 의미이다. 다산에게 앎이란 성찰에 기초한 국가 제도의 운영이었으며, 이런 점에서 실용적인 지식을 매우 중시했다.
사회와 국가에 쓸모 있는 지식을 강조했던 다산의 태도는 정조가 승하한 이듬해, 천주교도로 몰려 강진으로 유배 간 1801년 이후에도 한결같이 유지되었다. 그는 18년이라는 긴 유배 기간에 500여 권이 넘는 거질의 저술을 완성하였는데, 대부분이 국가 경영과 국방, 송사, 의술처럼 현실 생활에 요긴한 지식을 수집하고 편집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가운데 일표이서(一表二書)라 통칭하는 저서 세 권이 대표적인데, 바로 『목민심서』 와 『경세유표』,『흠흠신서』이다. 『목민심서』는 목민관 즉 지방관이 마음에 새겨야 할 책이라는 의미로, 수령이 지켜야 할 지침 및 관리들의 폭정에 대한 비판이 실려있다. 『경세유표』는 세상의 운영에 대한 유표(遺表)라는 말로, 유표란 신하가 죽음에 임박했을 때 군주에게 올리는 글을 의미한다. 『경세유표』는 행정 기구의 개편을 비롯하여 관제, 토지제, 부세제 등 모든 제도의 개혁 원리를 제시한 책이다.
『흠흠신서』는 조선시대의 형법과 그 사례를 다룬 책이다. ‘흠흠(欽欽)’이란 걱정되어 잊지 못하는 모습을 가리키는 말로, 죄수를 신중히 심의하는 흠휼(欽恤) 사상에 입각하여 재판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다산의 대표 저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바와 같이, 그는 일상생활은 물론 나아가 국가경영에 필요한 지식을 집대성할 정도로 실생활에 필요한 지식을 추구했던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키워드
과거학, 다산 정약용, 성리학, 성찰, 실용 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