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맥락
인간의 본성인 소외로부터 발생하는 불안을 극복하기 위하여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인간의 본성을 그 구현하는 중요한 요소다. 사랑은 관계 맺음의 무능력 상태를 벗어나 다른 사람과 하나가 되는 능동적 감정이다. 프롬은 이렇게 사랑이 우리 존재 조건과 결부된 중요한 활동임에도 ‘진정한’ 사랑에 대해 무지하다고 이야기한다. 사랑은 드물게 나타나는데 우리는 벌거벗은 사랑에 속아 그것을 사랑이라 착각하고 있다. 프롬은 이러한 사랑을 두 가지로 표현하는데, “확대된 이기주의”와 “자기도취”가 그것이다.
첫째는 확대된 이기주의이다. 우리는 흔히 개인과 개인이 만나 하나의 커플이 되는 것을 사랑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당연해 보이는 둘의 사랑을 프롬은 확대된 이기주의라고 한다. 이것은 내가 사랑하는 대상만을 사랑한다는 점 때문에 이기주의의 확대에 불과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랑은 홀로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는 이기주의에서 숫자가 조금 늘어난 것에 불과한 것이다. ‘너’만을 사랑하는 관계는 둘 간의 관계 밖에 있는 다른 이들을 밀어내는 효과를 가지게 된다. 이런 관계는 분리를 극복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런 관계는 둘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단절하는 요소이다. 결국 누군가만을 사랑하고 나머지를 무시한다면 그것은 결코 사랑이 될 수 없으며, ‘나만 생각하는 이기주의’가 ‘둘을 사랑하는 이기주의’로 확장된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사랑은 특정한 한 대상에게만 배타적으로 행사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 전체와의 관계를 생각하는 ‘태도’의 문제다.
프롬은 공서적 관계란 근친애적 공생과 같다고 말한다. 즉, 가까운 씨족에 대해서만 애착을 느끼면서 독립성을 상실한 채 근친적 집단에 파묻히는 것을 말한다. 즉, ‘오직 가까운 사람에게만 애착을 보이는 장애’와 ‘독립성을 상실함으로서 유아적인 관계를 맺는 장애’를 포함한다.
근친애적 공생 경향을 가진 사람은 가까운 이들 외에는 사랑할 수가 없는, 정확히 말하자면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무능력자이다.
누구에게나 사랑의 ‘능력’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대상을 향해서라도 표현되어야 하는 것이다. 즉 사랑의 능력이 있는 사람은 단지 가까운 몇몇 사람만이 아니라 이방인까지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에 사랑의 능력이 없는 사람은 오직 가까운 사람만을 사랑한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확대된 이기주의에 불과한 것이다. 한마디로 근친애적 공서적 관계는 사랑의 능력을 상실한 사람의 이기주이다.
사람을 널리 사랑하는 사람은 건강한 관계를 맺는다. 건강한 관계란 독립된 사람들 사이에 맺어지는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는 관계다. 반면 근친애적 사랑은 필연적으로 공생적 관계를 맺는다. 왜냐하면 그는 사랑할 수 없는 무능력자인 동시에, 가까운 사람이나 집단에 매달려 안전을 보장받거나 이익을 취하려 하는 유아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생적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고립을 피하기 위한 일종의 도피처를 제공하는 것에 불과하다. 같아짐이라는 것을 통해서 이뤄지는 관계는 필연적으로 ‘비독립적’ 관계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공생적이고 공서적인 관계는 비독립적인 나를 만들뿐이고 그 활동의 동기가 수동적이다.
고전본문
사랑의 개념을 여러 가지 대상에 적용하는 데 반대하지 않으면서도,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덕이지만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죄라는 신념이 널리 퍼져 있다. 나 자신을 사랑할수록 남을 사랑하지 못하며, 자기애는 이기심과 같다고 생각되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서양 사상에서는 멀리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장 칼뱅은 자기애를 ‘페스트’라고 말한다. 프로이트는 정신의학적 용어로 자기애를 말하고 있으나 그럼에도 그의 가치 판단은 칼뱅의 가치 판단과 다르지 않다. 프로이트는 자기애를 자아도취, 곧 리비도를 자기 자신에게 돌리는 것으로 생각했다. 자아도취는 인간의 발달에서 매우 초기 단계이고, 후에 이 자아도취적 단계로 다시 돌아오는 사람은 사랑할 줄 모르게 된다. 극단적인 경우에 이 사람은 미치게 된다. 프로이트는 사랑을 리비도의 나타남이라고 보고 리비도는 다른 사람을 향하거나(사랑), 또는 자기 자신을 향한다(자기애)고 가정한다. 이와 같이 사랑과 자기애는 한쪽이 많을수록 다른 쪽이 줄어든다는 의미에서 상호 배타적이다. 자기애가 나쁘다면 비이기적인 것은 덕이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이 의문이 생긴다. 곧 심리학적 관찰은,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과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 사이에는 근본적 모순이 있다는 명제를 뒷받침하고 있는가?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은 이기심과 같은 현상인가, 또는 오히려 그 반대인가? 더 나아가 현대인의 이기심은 정말로 모든 지적, 감정적, 감각적 능력을 가진 개인으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인가? 그의 이기심은 자기애와 동일한가, 또는 이기심은 자기애의 결여로 생기는가?
이기심과 자기애의 심리학적 측면을 검토하기 전에.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은 상호 배타적이라고 하는 견해에 나타나 있는 논리적 오류를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만일 나의 이웃을 인간으로서 사랑하는 것이 덕이라면, 나 역시 인간이므로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도 악덕이 아니라 미덕이어야 한다.
나 자신이 포함되지 않은 인간 개념은 있을 수 없다. 나 자신을 제외하는 이론은 그 자체에 본질적인 모순이 있음을 입증하고 있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성서의 말에 표현된 사상은 자기 자신의 통합성과 특이성에 대한 존경이 다른 개인에 대한 존경과 사랑과 이해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 자신의 자아에 대한 사랑은 다른 존재에 대한 사랑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다.
[출전]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제3장
토론하기
(1) 프롬은 가까운 사람만 사랑하는 관계를 일컬어 어떤 관계라고 말하고 있는지 찾아보자.
(2) 이기심과 자기애가 같은 개념이라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다르다고 생각하는가? 다른 개념이라고 생각한다면 어떤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는지 정리해보자.
(3) 프롬은 자기애에 대해 긍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사랑에 있어서 자기애가 중요한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정리해 보자.
해설읽기
자기 사랑하기
프롬은 프로이드와 달리 자기애, 즉 자기를 사랑하는 것은 완전히 정상일 뿐 아니라 적극 권장할 일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자기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만이 타인도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의 능력은 대상을 가리지 않음으로 사랑의 능력이 있는 사람은 타인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도 사랑한다. 반대로 사랑의 능력이 없는 사람은 타인뿐 아니라 자기 자신도 사랑하지 못한다. 프롬은 “나 자신의 자아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나의 사랑의 대상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 만일 어떤 개인이 생산적으로 사랑할 수만 있다면, 그는 자기 자신도 사랑한다. 만일 그가 오직 사람만을 사랑할 수 있다면 그는 전혀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고 말한다. 타인을 사랑하지 않는 자기애가 불가능하다는 것은 이기주의자를 오직 자기만 사랑하는 사람으로 보는 견해와 모순된다. 만일 이기주의자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마땅히 타인도 사랑해야 한다. 하지만 현실에서 이기주의자는 결코 타인을 사랑하지 않는다. 이것은 이기주의자가 ‘자기를 포함한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임을 의미한다. 프롬은 “이기심과 자기애는 동일한 것이기는 커녕, 사실상 정반대되는 것이다. 이기적인 사람은 자기 자신을 엄청나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사랑하지 않는다. 사실상 그는 자기 자신을 미워한다.”고 말하며 이기심과 자기애를 구분한다.
자기애가 있는 사람이라면 타인을 사랑할 수 있고 또 실제로 사랑하는 사람이다. 반면에 자기애가 없는 사람은 이기주의자가 되기 쉽다. 이기주의는 바로 사랑의 능력이 부재하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프롬에 따르면 이기주의는 바로 이 자기애의 결여에 근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자기애는 나르시스적 자기도취는 아니다. 왜냐하면 자기도취적 인간은 스스로를 대담히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기 자신을 좋아하지 않으며, 그들의 자기도취 심리는 - 이기주의와 마찬가지로 - 근본적으로 결여되어 있는 자기애를 무리하게 보상해보려는 시도이다. 즉, 자기도취자인 나르시시스트는 타인에게서 과도하게 사랑을 갈구하는데, 이것은 그가 자기를 사랑하고 있지 않음을 반증한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타인으로부터 사랑받는 것을 목매지 않는다. 하지만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타인들의 사랑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나르시시스트들은 스스로를 과대 포장하고 과시하려 한다. 그래야만 남들이 자기를 버리지 않을 거라고 (무의식적으로) 믿기 때문이다. 또한 나르시시스트들은 자존심이 크게 손상되어 있으므로, 이를 만회하고자 자기 개념을 부풀리고 특별한 대우를 받으려 한다. 이렇게 무의식적으로 스스로를 버림받은 존재, 무가치한 존재로 여기고 있는 이들이 자기를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
우리는 사랑에 대한 오해로 인해 사랑을 부정하고 회피할 필요는 없다. 부정과 회피는 사랑으로 인한 고통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해답이 아니기 때문이다. 프롬은 그렇기 때문에 사랑을 배워야 한다고 말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랑을 오해하고 실패하는 것은 ‘진정한 사랑’을 망각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 망각의 결과로 타인과의 사랑이라는 관계를 맺는 기술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사랑이란 무엇인가? 프롬은 사랑을 “사랑받는 자의 자유, 성장 그리고 행복에 대한 능동적 갈망”이라고 정의한다. 이것은 사랑이라는 개념을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것에 국한되지 않고 동기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의에 의하면 어떤 대상을 사랑한다는 것은 곧 그 대상의 본성을 귀중히 여기고 아껴준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사람에 대한 사랑이란 곧 인간 본성에 대한 사랑이고 인간 본성을 귀하게 여기고 아껴주는 것이다. 프롬이 사랑받는 자의 “성장과 행복”을 강조했던 것은 바로 이것이 인간 본성의 실현과 발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을 사람으로 사랑하지 않는 것, 그의 인간 본성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프롬이 경탄스러운 화법으로 표현했듯이, ‘죽음의 키스’이다.
프롬의 말과 같이 모든 사람에게는 인간 본성이 있고, 따라서 한 사람이라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은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 그래서 프롬은 한 인간에 대한 사랑은 인간 자체에 대한 사랑이다. 인간 자체에 대한 사랑은 물론 발생적으로 구체적인 개인과의 접촉에 의해 획득되지만, 그것은 특정 인간에 대한 사랑의 전제라고 말한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는 사랑에 대한 오해는 다음과 같다. 사랑은 수동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는 사랑을 배우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도록 하는 첫 번째 오해는 사랑의 문제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능동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받다’는 수동적인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랑에 대한 두 번째 오해는 사랑의 문제를 능력이 아니라 대상의 문제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사랑을 대상의 문제로 파악할 때, 우리의 태도가 시장에서 상품을 거래하듯 사람을 대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인간의 상품화를 초래한다. 사랑을 대상으로 볼 때 사랑은 아름답게 포장된 물건을 구매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사랑에 대한 세 번째 오해는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이 대부분 사랑에 빠진 최초의 경험에 국한한다는 것이다. 처음 강렬함은 곧 친숙함으로 변화하고 적대감과 권태를 낳기도 한다. 더 나아가 이별로 이어진다. 프롬은 사랑은 강렬한 순간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감정들에 대처함으로 관계를 유지해 나가는 것 역시 사랑이라는 것이다.
키워드
본성, 인간, 이기심, 자기애
전후맥락
인간의 본성인 소외로부터 발생하는 불안을 극복하기 위하여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인간의 본성을 그 구현하는 중요한 요소다. 사랑은 관계 맺음의 무능력 상태를 벗어나 다른 사람과 하나가 되는 능동적 감정이다. 프롬은 이렇게 사랑이 우리 존재 조건과 결부된 중요한 활동임에도 ‘진정한’ 사랑에 대해 무지하다고 이야기한다. 사랑은 드물게 나타나는데 우리는 벌거벗은 사랑에 속아 그것을 사랑이라 착각하고 있다. 프롬은 이러한 사랑을 두 가지로 표현하는데, “확대된 이기주의”와 “자기도취”가 그것이다.
첫째는 확대된 이기주의이다. 우리는 흔히 개인과 개인이 만나 하나의 커플이 되는 것을 사랑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당연해 보이는 둘의 사랑을 프롬은 확대된 이기주의라고 한다. 이것은 내가 사랑하는 대상만을 사랑한다는 점 때문에 이기주의의 확대에 불과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랑은 홀로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는 이기주의에서 숫자가 조금 늘어난 것에 불과한 것이다. ‘너’만을 사랑하는 관계는 둘 간의 관계 밖에 있는 다른 이들을 밀어내는 효과를 가지게 된다. 이런 관계는 분리를 극복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런 관계는 둘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단절하는 요소이다. 결국 누군가만을 사랑하고 나머지를 무시한다면 그것은 결코 사랑이 될 수 없으며, ‘나만 생각하는 이기주의’가 ‘둘을 사랑하는 이기주의’로 확장된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사랑은 특정한 한 대상에게만 배타적으로 행사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 전체와의 관계를 생각하는 ‘태도’의 문제다.
프롬은 공서적 관계란 근친애적 공생과 같다고 말한다. 즉, 가까운 씨족에 대해서만 애착을 느끼면서 독립성을 상실한 채 근친적 집단에 파묻히는 것을 말한다. 즉, ‘오직 가까운 사람에게만 애착을 보이는 장애’와 ‘독립성을 상실함으로서 유아적인 관계를 맺는 장애’를 포함한다.
근친애적 공생 경향을 가진 사람은 가까운 이들 외에는 사랑할 수가 없는, 정확히 말하자면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무능력자이다.
누구에게나 사랑의 ‘능력’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대상을 향해서라도 표현되어야 하는 것이다. 즉 사랑의 능력이 있는 사람은 단지 가까운 몇몇 사람만이 아니라 이방인까지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에 사랑의 능력이 없는 사람은 오직 가까운 사람만을 사랑한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확대된 이기주의에 불과한 것이다. 한마디로 근친애적 공서적 관계는 사랑의 능력을 상실한 사람의 이기주이다.
사람을 널리 사랑하는 사람은 건강한 관계를 맺는다. 건강한 관계란 독립된 사람들 사이에 맺어지는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는 관계다. 반면 근친애적 사랑은 필연적으로 공생적 관계를 맺는다. 왜냐하면 그는 사랑할 수 없는 무능력자인 동시에, 가까운 사람이나 집단에 매달려 안전을 보장받거나 이익을 취하려 하는 유아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생적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고립을 피하기 위한 일종의 도피처를 제공하는 것에 불과하다. 같아짐이라는 것을 통해서 이뤄지는 관계는 필연적으로 ‘비독립적’ 관계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공생적이고 공서적인 관계는 비독립적인 나를 만들뿐이고 그 활동의 동기가 수동적이다.
고전본문
사랑의 개념을 여러 가지 대상에 적용하는 데 반대하지 않으면서도,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덕이지만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죄라는 신념이 널리 퍼져 있다. 나 자신을 사랑할수록 남을 사랑하지 못하며, 자기애는 이기심과 같다고 생각되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서양 사상에서는 멀리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장 칼뱅은 자기애를 ‘페스트’라고 말한다. 프로이트는 정신의학적 용어로 자기애를 말하고 있으나 그럼에도 그의 가치 판단은 칼뱅의 가치 판단과 다르지 않다. 프로이트는 자기애를 자아도취, 곧 리비도를 자기 자신에게 돌리는 것으로 생각했다. 자아도취는 인간의 발달에서 매우 초기 단계이고, 후에 이 자아도취적 단계로 다시 돌아오는 사람은 사랑할 줄 모르게 된다. 극단적인 경우에 이 사람은 미치게 된다. 프로이트는 사랑을 리비도의 나타남이라고 보고 리비도는 다른 사람을 향하거나(사랑), 또는 자기 자신을 향한다(자기애)고 가정한다. 이와 같이 사랑과 자기애는 한쪽이 많을수록 다른 쪽이 줄어든다는 의미에서 상호 배타적이다. 자기애가 나쁘다면 비이기적인 것은 덕이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이 의문이 생긴다. 곧 심리학적 관찰은,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과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 사이에는 근본적 모순이 있다는 명제를 뒷받침하고 있는가?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은 이기심과 같은 현상인가, 또는 오히려 그 반대인가? 더 나아가 현대인의 이기심은 정말로 모든 지적, 감정적, 감각적 능력을 가진 개인으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인가? 그의 이기심은 자기애와 동일한가, 또는 이기심은 자기애의 결여로 생기는가?
이기심과 자기애의 심리학적 측면을 검토하기 전에.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은 상호 배타적이라고 하는 견해에 나타나 있는 논리적 오류를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만일 나의 이웃을 인간으로서 사랑하는 것이 덕이라면, 나 역시 인간이므로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도 악덕이 아니라 미덕이어야 한다.
나 자신이 포함되지 않은 인간 개념은 있을 수 없다. 나 자신을 제외하는 이론은 그 자체에 본질적인 모순이 있음을 입증하고 있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성서의 말에 표현된 사상은 자기 자신의 통합성과 특이성에 대한 존경이 다른 개인에 대한 존경과 사랑과 이해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 자신의 자아에 대한 사랑은 다른 존재에 대한 사랑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다.
[출전]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제3장
토론하기
(1) 프롬은 가까운 사람만 사랑하는 관계를 일컬어 어떤 관계라고 말하고 있는지 찾아보자.
(2) 이기심과 자기애가 같은 개념이라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다르다고 생각하는가? 다른 개념이라고 생각한다면 어떤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는지 정리해보자.
(3) 프롬은 자기애에 대해 긍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사랑에 있어서 자기애가 중요한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정리해 보자.
해설읽기
자기 사랑하기
프롬은 프로이드와 달리 자기애, 즉 자기를 사랑하는 것은 완전히 정상일 뿐 아니라 적극 권장할 일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자기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만이 타인도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의 능력은 대상을 가리지 않음으로 사랑의 능력이 있는 사람은 타인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도 사랑한다. 반대로 사랑의 능력이 없는 사람은 타인뿐 아니라 자기 자신도 사랑하지 못한다. 프롬은 “나 자신의 자아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나의 사랑의 대상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 만일 어떤 개인이 생산적으로 사랑할 수만 있다면, 그는 자기 자신도 사랑한다. 만일 그가 오직 사람만을 사랑할 수 있다면 그는 전혀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고 말한다. 타인을 사랑하지 않는 자기애가 불가능하다는 것은 이기주의자를 오직 자기만 사랑하는 사람으로 보는 견해와 모순된다. 만일 이기주의자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마땅히 타인도 사랑해야 한다. 하지만 현실에서 이기주의자는 결코 타인을 사랑하지 않는다. 이것은 이기주의자가 ‘자기를 포함한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임을 의미한다. 프롬은 “이기심과 자기애는 동일한 것이기는 커녕, 사실상 정반대되는 것이다. 이기적인 사람은 자기 자신을 엄청나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사랑하지 않는다. 사실상 그는 자기 자신을 미워한다.”고 말하며 이기심과 자기애를 구분한다.
자기애가 있는 사람이라면 타인을 사랑할 수 있고 또 실제로 사랑하는 사람이다. 반면에 자기애가 없는 사람은 이기주의자가 되기 쉽다. 이기주의는 바로 사랑의 능력이 부재하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프롬에 따르면 이기주의는 바로 이 자기애의 결여에 근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자기애는 나르시스적 자기도취는 아니다. 왜냐하면 자기도취적 인간은 스스로를 대담히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기 자신을 좋아하지 않으며, 그들의 자기도취 심리는 - 이기주의와 마찬가지로 - 근본적으로 결여되어 있는 자기애를 무리하게 보상해보려는 시도이다. 즉, 자기도취자인 나르시시스트는 타인에게서 과도하게 사랑을 갈구하는데, 이것은 그가 자기를 사랑하고 있지 않음을 반증한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타인으로부터 사랑받는 것을 목매지 않는다. 하지만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타인들의 사랑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나르시시스트들은 스스로를 과대 포장하고 과시하려 한다. 그래야만 남들이 자기를 버리지 않을 거라고 (무의식적으로) 믿기 때문이다. 또한 나르시시스트들은 자존심이 크게 손상되어 있으므로, 이를 만회하고자 자기 개념을 부풀리고 특별한 대우를 받으려 한다. 이렇게 무의식적으로 스스로를 버림받은 존재, 무가치한 존재로 여기고 있는 이들이 자기를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
우리는 사랑에 대한 오해로 인해 사랑을 부정하고 회피할 필요는 없다. 부정과 회피는 사랑으로 인한 고통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해답이 아니기 때문이다. 프롬은 그렇기 때문에 사랑을 배워야 한다고 말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랑을 오해하고 실패하는 것은 ‘진정한 사랑’을 망각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 망각의 결과로 타인과의 사랑이라는 관계를 맺는 기술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사랑이란 무엇인가? 프롬은 사랑을 “사랑받는 자의 자유, 성장 그리고 행복에 대한 능동적 갈망”이라고 정의한다. 이것은 사랑이라는 개념을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것에 국한되지 않고 동기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의에 의하면 어떤 대상을 사랑한다는 것은 곧 그 대상의 본성을 귀중히 여기고 아껴준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사람에 대한 사랑이란 곧 인간 본성에 대한 사랑이고 인간 본성을 귀하게 여기고 아껴주는 것이다. 프롬이 사랑받는 자의 “성장과 행복”을 강조했던 것은 바로 이것이 인간 본성의 실현과 발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을 사람으로 사랑하지 않는 것, 그의 인간 본성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프롬이 경탄스러운 화법으로 표현했듯이, ‘죽음의 키스’이다.
프롬의 말과 같이 모든 사람에게는 인간 본성이 있고, 따라서 한 사람이라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은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 그래서 프롬은 한 인간에 대한 사랑은 인간 자체에 대한 사랑이다. 인간 자체에 대한 사랑은 물론 발생적으로 구체적인 개인과의 접촉에 의해 획득되지만, 그것은 특정 인간에 대한 사랑의 전제라고 말한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는 사랑에 대한 오해는 다음과 같다. 사랑은 수동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는 사랑을 배우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도록 하는 첫 번째 오해는 사랑의 문제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능동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받다’는 수동적인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랑에 대한 두 번째 오해는 사랑의 문제를 능력이 아니라 대상의 문제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사랑을 대상의 문제로 파악할 때, 우리의 태도가 시장에서 상품을 거래하듯 사람을 대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인간의 상품화를 초래한다. 사랑을 대상으로 볼 때 사랑은 아름답게 포장된 물건을 구매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사랑에 대한 세 번째 오해는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이 대부분 사랑에 빠진 최초의 경험에 국한한다는 것이다. 처음 강렬함은 곧 친숙함으로 변화하고 적대감과 권태를 낳기도 한다. 더 나아가 이별로 이어진다. 프롬은 사랑은 강렬한 순간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감정들에 대처함으로 관계를 유지해 나가는 것 역시 사랑이라는 것이다.
키워드
본성, 인간, 이기심, 자기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