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맥락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 제7권에서 진리를 향한 지적·영적 상승의 과정을 전개하며, 그가 감각의 세계에서 참된 존재의 세계로 나아가는 내면의 여정을 섬세하게 묘사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처음에는 마니교적 이원론과 물질 중심의 세계관에 매여 있었으나, 그것이 참된 진리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한계에 부딪친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그는 플라톤주의, 특히 신플라톤주의 사상에 주목하며,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 곧 영원하고 불변하는 존재에 대한 이해를 추구하게 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플라톤주의(특히 신플라톤주의)의 사상을 통해 비물질적이고 영원한 존재의 개념을 받아들이며, 시간 속에 있는 모든 것은 유한하고 의존적이며, 참된 존재는 오직 변하지 않는 하나님이라는 인식을 얻게 된다. 그러나 이 철학적 인식만으로는 인간의 죄 문제, 즉 의지가 악에 기울어 있는 상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한다. 그는 죄를 단지 무지나 물질 때문으로 보았던 철학적 사유가 인간의 타락한 의지를 설명하지 못한다고 비판하며, 인간에게는 구원이 필요한 존재로서의 본질이 있다고 본다.
이 과정에서 그는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역할을 강조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철학을 통해 하느님에 대해 알게 되었지만, 인간의 구원은 철학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은혜로만 가능하다고 깨닫는다. 그는 성경을 통해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요한복음의 구절을 깊이 묵상하면서, 하나님이 인간의 구원을 위해 낮아지셨다는 사실에 감동을 받는다. 결국 그는 고백한다. “나는 진리를 멀리 있는 것으로 생각했으나, 그것은 내 안에 계셨다.”
이 철학적 사유의 과정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감각적이고 유한한 사물들을 넘어서 ‘존재하는 자’, 곧 하느님을 발견하려 노력한다. 그는 육체가 아니라 정신을 통해 진리를 바라보아야 한다고 깨닫고, 자신의 내면을 깊이 응시한다. 이때 그는 “내 안에 계시는 하나님”을 직감하게 되며, 진리는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서 만나야 할 대상임을 인식한다. 이러한 인식은 플라톤의 ‘일자’ 사상과도 연결되며, 그는 모든 존재의 근원으로서의 하느님을 철학적으로 수용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철학적 상승은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문제, 즉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한다는 점에서 한계를 드러낸다. 그는 의지가 약하여 선을 알면서도 행하지 못하는 자기 모순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으며, 철학적 통찰만으로는 이 죄된 의지를 치유할 수 없음을 절감한다. 이 지점에서 그는 진정한 진리로의 상승이 단지 인간의 이성과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하며, 하느님의 은총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한 구원이 필요하다는 자각에 이른다.
결국 아우구스티누스는 진리로 향하는 길이 지성의 상승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겸손과 사랑을 통한 전 존재의 전환이어야 함을 깨닫는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 제7권에서 인간 이성의 한계를 통찰하고, 참된 진리이신 하나님께로 나아가기 위해 철학에서 신앙으로 넘어가는 상승의 과정이자, 내면의 눈이 떠지는 결정적 순간을 기록하고 있다.
고전본문
거기서 저는 제 자신에게 돌아가라는 권유를 받았고 당신의 이끄심으로 저의 내면 깊숙이 들어갔는데 그 일이 가능했던 것은 당신께서 저를 돕는 이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들어가고 나서 저는 제 영혼의 어떤 눈으로 보았습니다. 제 영혼의 눈 바로 그 위에, 저의 지성 위에 불변하는 빛을, 모든 육신에 선연한 예사로운 빛이 아니었고, 그런 빛과 종류가 같지만 다만 크기가 훨씬 더해서 무척이나 환하게 반짝이는 그런 빛도 아니었고, 그 크기를 갖고서 만유를 품는 그런 빛도 아니었습니다. 그 빛은 그런 것이 아니었고, 다른 것이었으니 저 모든 빛들과 아주 다른 빛이었습니다. 저의 지성 위에 있다고 해서 기름이 물 위에 뜬 그런 것이 아니었고, 하늘이 땅 위에 있는 그런 것도 아니었고, 오히려 그 빛이 저를 만들었으므로 제 위였고 그 빛에 의해서 만들어졌으므로 제가 그 아래였습니다. 진리를 아는 이는 그를 알고 그를 아는 이는 영원을 압니다. 사랑이 그를 압니다. 오, 영원한 진리여, 참된 사랑이여, 사랑스러운 영원이여! 당신께서 저의 하느님이시니 밤낮으로 당신을 향해 한숨 짓습니다. 그리고 제가 당신을 처음 알았던 때에 당신께서 저를 들어 올려 주셨으며, 제가 봐야 할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게 해 주셨는데 제가 아직 그것을 볼 만한 존재가 아님도 제가 알아보게 하였습니다. 당신께서는 제 안에 세찬 빛을 쏘시어 저의 허약한 시력에 타격을 주셨고, 그래서 저는 사랑과 두려움에 몸을 떨었습니다. 저는 제가 당신께로부터 멀리 떨어져 그야말로 비유사성의 영역에 존재하고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까마득히 높은 데서 당신의 이런 음성이 들리는 듯 했습니다. “나는 다 큰 사람들의 음식이로다. 자라거라! 그러면 나를 먹게 되리라. 네 육신의 음식을 삭이듯이 네가 나를 네 속에서 변화시킬 것이 아니고 네가 내 속에서 변화되리라.” 또한 저는 깨달았습니다. 당신께서는 죄악 때문에 사람을 훈계하셨음을, 저의 영혼을 거미줄처럼 스러지게 만드셨음을, 그래서 저는 말씀드렸습니다. “유한한 공간에도 무한한 공간에도 진리가 퍼져 있지 않으니 진리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그러자 당신께서는 멀리서 외치셨습니다. “그럴 리 없다. 나는 있는 자로다.” 이 말씀을 저는 마음에 들려오는 그대로 들었습니다. 저로서는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만들어진 그것들을 통해서 진리가 파악되어 드러나고 있으니 진리가 존재 않는다고 의심하기보다는 차라리 제가 살아있음을 의심하는 편이 훨씬 쉬웠습니다.
[출전]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제7권
토론하기
(1) 아우구스티누스가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가고 내면으로 돌아가서 발견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2) 아우구스티누스가 물질적인 것에 대한 관심에서 비물질적이고 영원불변한 존재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도록 영향을 미친 사상이 있다면 무엇인지 찾아보고, 어떤 특징이 있는지 생각해보자.
(3) 영원불변하는 진리와 신이 존재한다는 명제가 현대인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보자.
해설읽기
하느님을 향한 사랑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은 단순한 자서전이나 회고록이 아니라, 인간이 어떻게 하느님을 향해 마음을 열고 참된 사랑에 도달하는지를 보여주는 깊은 영적 여정이다. 그 중심에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의 절대적인 중요성과 그 사랑이 실현되는 구체적인 방식이 자리 잡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삶 전체를 통틀어 다양한 사랑의 대상을 추구하며 방황했으나, 결국 그 모든 사랑은 하느님을 향한 사랑으로 통합되어야 비로소 인간 존재의 참된 목적을 이룰 수 있다고 고백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 제1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주께서는 우리를 당신을 향해 살도록 창조하셨고, 우리의 마음은 주 안에서 안식할 때까지 쉼이 없습니다.” 이 문장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과 영성의 핵심을 담고 있으며, 인간 존재는 근원적으로 하느님을 향한 갈망을 품고 창조되었다는 인식을 전제한다. 인간의 모든 사랑은 사실상 하느님을 향한 사랑의 왜곡된 형태이거나, 하나님께로 나아가기 위한 미완성의 단계이다. 인간이 세속적인 쾌락, 명예, 지식, 권력을 사랑하는 것은 그 자체가 악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궁극적인 목적이 될 때 사랑이 잘못된 방향으로 흐르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하나님은 존재 자체이며, 모든 선의 원천이시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단순히 도덕적 의무를 수행하는 것을 넘어서,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질서를 회복하는 일이다. 하느님을 사랑할 때 인간은 자기를 바로 보게 되고, 이웃을 참되게 사랑할 수 있는 기준을 얻게 되며, 세상의 모든 사물들을 그 본래의 질서 속에서 이해하게 된다. 다시 말해,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은 인간이 창조 질서 속에서 자기 자리를 찾는 일이자, 궁극적인 행복과 평화를 누리는 유일한 길이다.
행복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단순히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말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는 그 사랑이 어떻게 가능하고, 어떤 과정을 통해 깊어질 수 있는지를 고뇌와 체험을 통해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첫째,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느님에 대한 참된 지식’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는 젊은 시절 철학과 이교 사상, 마니교, 심지어 성경 자체까지 다양한 사유 체계들을 탐색했지만, 참된 하느님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 사랑도 방향을 잃은 채 방황했다고 고백한다. 특히 하느님을 물질적인 존재로 오해하거나, 인간의 감각에 종속된 대상처럼 인식했던 자신의 무지를 깊이 반성한다. 진리를 향한 내면의 상승을 통해 그는 하느님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영원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제야 사랑이 참된 방향을 찾기 시작한다.
둘째,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인간의 의지나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는 “나는 원하지만, 행하지 못합니다”라는 바울의 고백처럼, 자기 안에 자리 잡은 죄의 힘 앞에서 무력함을 느낀다. 이때 그는 신의 은총의 필요성을 절실히 깨닫는다. 인간이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은 결국 하느님께서 먼저 주시는 사랑에서 비롯되며, 인간은 그것에 응답하는 존재로 부름받는다. 따라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삶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은총에 의존하면서도, 그 은총에 응답하는 ‘자유의 사랑’으로 성숙해 가야 한다.
셋째, 하느님을 사랑하는 구체적인 방법으로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 비움’과 ‘겸손’, 그리고 ‘회개의 삶’을 강조한다. 그는 자신의 교만하고 자만에 찬 과거를 솔직하게 고백하면서,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태도만이 참된 사랑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고 본다. 그는 말한다. “주께서 교만한 자는 멀리하시고, 겸손한 자와 함께하신다.” 인간이 스스로를 신처럼 여기며 자신의 욕망을 절대화할 때, 하느님의 사랑은 그에게 닿지 못한다. 반대로, 자신의 죄와 무능을 인정하고 하느님의 자비를 갈망할 때, 사랑은 시작된다.
넷째,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삶이 곧 이웃 사랑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본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사랑이며, 참된 하느님 사랑은 반드시 구체적인 삶의 행위로 나타나야 한다. 그는 자주 “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원하는 대로 하라”고 말했는데, 이는 방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사랑이 있는 곳에서는 율법이 필요 없다는 의미이다. 하느님을 향한 사랑이 인간의 마음을 지배할 때, 그 사람은 본성적으로 선을 행하게 되며, 자신의 삶 전체가 하느님을 영화롭게 하는 예배가 된다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인간 존재의 핵심이며, 참된 행복의 근원이다. 이 사랑은 단지 감정적 애착이나 도덕적 실천이 아니라, 하느님의 존재 자체를 향한 열망이며, 인간의 전 존재를 하느님께 드리는 응답이다. 그는 자신의 삶을 통해 그 사랑이 얼마나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지를 솔직하게 드러내지만, 동시에 그 사랑이 얼마나 가까이 있으며, 우리 안에서 이미 역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하느님은 항상 우리 안에 계시며, 우리가 진실하게 하나님을 찾고자 할 때, 그분은 우리를 먼저 찾아오시는 사랑이시다. 그리고 이 사랑 안에서 우리는 비로소 자신을 발견하고, 세상과 조화를 이루며, 궁극적인 안식을 누릴 수 있게 된다.
키워드
고백, 사랑, 영원, 은총, 하느님
전후맥락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 제7권에서 진리를 향한 지적·영적 상승의 과정을 전개하며, 그가 감각의 세계에서 참된 존재의 세계로 나아가는 내면의 여정을 섬세하게 묘사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처음에는 마니교적 이원론과 물질 중심의 세계관에 매여 있었으나, 그것이 참된 진리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한계에 부딪친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그는 플라톤주의, 특히 신플라톤주의 사상에 주목하며,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 곧 영원하고 불변하는 존재에 대한 이해를 추구하게 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플라톤주의(특히 신플라톤주의)의 사상을 통해 비물질적이고 영원한 존재의 개념을 받아들이며, 시간 속에 있는 모든 것은 유한하고 의존적이며, 참된 존재는 오직 변하지 않는 하나님이라는 인식을 얻게 된다. 그러나 이 철학적 인식만으로는 인간의 죄 문제, 즉 의지가 악에 기울어 있는 상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한다. 그는 죄를 단지 무지나 물질 때문으로 보았던 철학적 사유가 인간의 타락한 의지를 설명하지 못한다고 비판하며, 인간에게는 구원이 필요한 존재로서의 본질이 있다고 본다.
이 과정에서 그는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역할을 강조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철학을 통해 하느님에 대해 알게 되었지만, 인간의 구원은 철학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은혜로만 가능하다고 깨닫는다. 그는 성경을 통해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요한복음의 구절을 깊이 묵상하면서, 하나님이 인간의 구원을 위해 낮아지셨다는 사실에 감동을 받는다. 결국 그는 고백한다. “나는 진리를 멀리 있는 것으로 생각했으나, 그것은 내 안에 계셨다.”
이 철학적 사유의 과정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감각적이고 유한한 사물들을 넘어서 ‘존재하는 자’, 곧 하느님을 발견하려 노력한다. 그는 육체가 아니라 정신을 통해 진리를 바라보아야 한다고 깨닫고, 자신의 내면을 깊이 응시한다. 이때 그는 “내 안에 계시는 하나님”을 직감하게 되며, 진리는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서 만나야 할 대상임을 인식한다. 이러한 인식은 플라톤의 ‘일자’ 사상과도 연결되며, 그는 모든 존재의 근원으로서의 하느님을 철학적으로 수용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철학적 상승은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문제, 즉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한다는 점에서 한계를 드러낸다. 그는 의지가 약하여 선을 알면서도 행하지 못하는 자기 모순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으며, 철학적 통찰만으로는 이 죄된 의지를 치유할 수 없음을 절감한다. 이 지점에서 그는 진정한 진리로의 상승이 단지 인간의 이성과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하며, 하느님의 은총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한 구원이 필요하다는 자각에 이른다.
결국 아우구스티누스는 진리로 향하는 길이 지성의 상승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겸손과 사랑을 통한 전 존재의 전환이어야 함을 깨닫는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 제7권에서 인간 이성의 한계를 통찰하고, 참된 진리이신 하나님께로 나아가기 위해 철학에서 신앙으로 넘어가는 상승의 과정이자, 내면의 눈이 떠지는 결정적 순간을 기록하고 있다.
고전본문
거기서 저는 제 자신에게 돌아가라는 권유를 받았고 당신의 이끄심으로 저의 내면 깊숙이 들어갔는데 그 일이 가능했던 것은 당신께서 저를 돕는 이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들어가고 나서 저는 제 영혼의 어떤 눈으로 보았습니다. 제 영혼의 눈 바로 그 위에, 저의 지성 위에 불변하는 빛을, 모든 육신에 선연한 예사로운 빛이 아니었고, 그런 빛과 종류가 같지만 다만 크기가 훨씬 더해서 무척이나 환하게 반짝이는 그런 빛도 아니었고, 그 크기를 갖고서 만유를 품는 그런 빛도 아니었습니다. 그 빛은 그런 것이 아니었고, 다른 것이었으니 저 모든 빛들과 아주 다른 빛이었습니다. 저의 지성 위에 있다고 해서 기름이 물 위에 뜬 그런 것이 아니었고, 하늘이 땅 위에 있는 그런 것도 아니었고, 오히려 그 빛이 저를 만들었으므로 제 위였고 그 빛에 의해서 만들어졌으므로 제가 그 아래였습니다. 진리를 아는 이는 그를 알고 그를 아는 이는 영원을 압니다. 사랑이 그를 압니다. 오, 영원한 진리여, 참된 사랑이여, 사랑스러운 영원이여! 당신께서 저의 하느님이시니 밤낮으로 당신을 향해 한숨 짓습니다. 그리고 제가 당신을 처음 알았던 때에 당신께서 저를 들어 올려 주셨으며, 제가 봐야 할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게 해 주셨는데 제가 아직 그것을 볼 만한 존재가 아님도 제가 알아보게 하였습니다. 당신께서는 제 안에 세찬 빛을 쏘시어 저의 허약한 시력에 타격을 주셨고, 그래서 저는 사랑과 두려움에 몸을 떨었습니다. 저는 제가 당신께로부터 멀리 떨어져 그야말로 비유사성의 영역에 존재하고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까마득히 높은 데서 당신의 이런 음성이 들리는 듯 했습니다. “나는 다 큰 사람들의 음식이로다. 자라거라! 그러면 나를 먹게 되리라. 네 육신의 음식을 삭이듯이 네가 나를 네 속에서 변화시킬 것이 아니고 네가 내 속에서 변화되리라.” 또한 저는 깨달았습니다. 당신께서는 죄악 때문에 사람을 훈계하셨음을, 저의 영혼을 거미줄처럼 스러지게 만드셨음을, 그래서 저는 말씀드렸습니다. “유한한 공간에도 무한한 공간에도 진리가 퍼져 있지 않으니 진리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그러자 당신께서는 멀리서 외치셨습니다. “그럴 리 없다. 나는 있는 자로다.” 이 말씀을 저는 마음에 들려오는 그대로 들었습니다. 저로서는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만들어진 그것들을 통해서 진리가 파악되어 드러나고 있으니 진리가 존재 않는다고 의심하기보다는 차라리 제가 살아있음을 의심하는 편이 훨씬 쉬웠습니다.
[출전]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제7권
토론하기
(1) 아우구스티누스가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가고 내면으로 돌아가서 발견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2) 아우구스티누스가 물질적인 것에 대한 관심에서 비물질적이고 영원불변한 존재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도록 영향을 미친 사상이 있다면 무엇인지 찾아보고, 어떤 특징이 있는지 생각해보자.
(3) 영원불변하는 진리와 신이 존재한다는 명제가 현대인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보자.
해설읽기
하느님을 향한 사랑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은 단순한 자서전이나 회고록이 아니라, 인간이 어떻게 하느님을 향해 마음을 열고 참된 사랑에 도달하는지를 보여주는 깊은 영적 여정이다. 그 중심에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의 절대적인 중요성과 그 사랑이 실현되는 구체적인 방식이 자리 잡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삶 전체를 통틀어 다양한 사랑의 대상을 추구하며 방황했으나, 결국 그 모든 사랑은 하느님을 향한 사랑으로 통합되어야 비로소 인간 존재의 참된 목적을 이룰 수 있다고 고백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 제1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주께서는 우리를 당신을 향해 살도록 창조하셨고, 우리의 마음은 주 안에서 안식할 때까지 쉼이 없습니다.” 이 문장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과 영성의 핵심을 담고 있으며, 인간 존재는 근원적으로 하느님을 향한 갈망을 품고 창조되었다는 인식을 전제한다. 인간의 모든 사랑은 사실상 하느님을 향한 사랑의 왜곡된 형태이거나, 하나님께로 나아가기 위한 미완성의 단계이다. 인간이 세속적인 쾌락, 명예, 지식, 권력을 사랑하는 것은 그 자체가 악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궁극적인 목적이 될 때 사랑이 잘못된 방향으로 흐르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하나님은 존재 자체이며, 모든 선의 원천이시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단순히 도덕적 의무를 수행하는 것을 넘어서,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질서를 회복하는 일이다. 하느님을 사랑할 때 인간은 자기를 바로 보게 되고, 이웃을 참되게 사랑할 수 있는 기준을 얻게 되며, 세상의 모든 사물들을 그 본래의 질서 속에서 이해하게 된다. 다시 말해,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은 인간이 창조 질서 속에서 자기 자리를 찾는 일이자, 궁극적인 행복과 평화를 누리는 유일한 길이다.
행복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단순히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말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는 그 사랑이 어떻게 가능하고, 어떤 과정을 통해 깊어질 수 있는지를 고뇌와 체험을 통해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첫째,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느님에 대한 참된 지식’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는 젊은 시절 철학과 이교 사상, 마니교, 심지어 성경 자체까지 다양한 사유 체계들을 탐색했지만, 참된 하느님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 사랑도 방향을 잃은 채 방황했다고 고백한다. 특히 하느님을 물질적인 존재로 오해하거나, 인간의 감각에 종속된 대상처럼 인식했던 자신의 무지를 깊이 반성한다. 진리를 향한 내면의 상승을 통해 그는 하느님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영원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제야 사랑이 참된 방향을 찾기 시작한다.
둘째,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인간의 의지나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는 “나는 원하지만, 행하지 못합니다”라는 바울의 고백처럼, 자기 안에 자리 잡은 죄의 힘 앞에서 무력함을 느낀다. 이때 그는 신의 은총의 필요성을 절실히 깨닫는다. 인간이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은 결국 하느님께서 먼저 주시는 사랑에서 비롯되며, 인간은 그것에 응답하는 존재로 부름받는다. 따라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삶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은총에 의존하면서도, 그 은총에 응답하는 ‘자유의 사랑’으로 성숙해 가야 한다.
셋째, 하느님을 사랑하는 구체적인 방법으로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 비움’과 ‘겸손’, 그리고 ‘회개의 삶’을 강조한다. 그는 자신의 교만하고 자만에 찬 과거를 솔직하게 고백하면서,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태도만이 참된 사랑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고 본다. 그는 말한다. “주께서 교만한 자는 멀리하시고, 겸손한 자와 함께하신다.” 인간이 스스로를 신처럼 여기며 자신의 욕망을 절대화할 때, 하느님의 사랑은 그에게 닿지 못한다. 반대로, 자신의 죄와 무능을 인정하고 하느님의 자비를 갈망할 때, 사랑은 시작된다.
넷째,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삶이 곧 이웃 사랑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본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사랑이며, 참된 하느님 사랑은 반드시 구체적인 삶의 행위로 나타나야 한다. 그는 자주 “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원하는 대로 하라”고 말했는데, 이는 방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사랑이 있는 곳에서는 율법이 필요 없다는 의미이다. 하느님을 향한 사랑이 인간의 마음을 지배할 때, 그 사람은 본성적으로 선을 행하게 되며, 자신의 삶 전체가 하느님을 영화롭게 하는 예배가 된다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인간 존재의 핵심이며, 참된 행복의 근원이다. 이 사랑은 단지 감정적 애착이나 도덕적 실천이 아니라, 하느님의 존재 자체를 향한 열망이며, 인간의 전 존재를 하느님께 드리는 응답이다. 그는 자신의 삶을 통해 그 사랑이 얼마나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지를 솔직하게 드러내지만, 동시에 그 사랑이 얼마나 가까이 있으며, 우리 안에서 이미 역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하느님은 항상 우리 안에 계시며, 우리가 진실하게 하나님을 찾고자 할 때, 그분은 우리를 먼저 찾아오시는 사랑이시다. 그리고 이 사랑 안에서 우리는 비로소 자신을 발견하고, 세상과 조화를 이루며, 궁극적인 안식을 누릴 수 있게 된다.
키워드
고백, 사랑, 영원, 은총, 하느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