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소용돌이’라는 대주제 아래 고전 문학과 철학 작품에 나타난 ‘혐오’를 탐구하고자 한다. 공자의 『논어』에서는 혐오를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도덕적 분별력에 기초한 윤리적 판단으로 해석하며, 사회적 조화와 덕의 실천 속에서 감정의 절제가 중요함을 강조한다.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에서는 외모로 인한 사회의 배척이 한 존재를 괴물로 만들어가는 과정을 통해 혐오의 폭력성과 그 사회적 책임을 묻는다. 가스통 르루의 『오페라의 유령』은 혐오가 한 사람의 삶을 송두리째 지우고 왜곡된 사랑과 파괴로 이어지는 비극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너새니얼 호손의 『주홍글씨』는 사회적 낙인이 어떻게 한 여성을 공동체로부터 격리시키는지를 드러낸다. 이처럼 이 셀 묶음은 혐오가 개인의 존재를 규정하고 파괴하는 방식들을 다양한 관점에서 조명하며, 이를 넘어 공감과 윤리적 성찰의 필요성을 제시한다.
빅터 프랑켄슈타인과 그의 피조물이 나누는 대화 장면은 『프랑켄슈타인』의 사상적 핵심을 잘 보여준다. 이 장면은 프랑켄슈타인이 알프스 산맥의 빙하 위에서 자신의 피조물과 우연히 마주치면서 시작된다. 피조물은 자신을 버리고 도망쳤던 창조자를 향해 처음으로 직접 말을 걸고, 절박하게 자신의 존재 이유와 고통, 그리고 인간성과 동정심에 대해 호소한다.
이 만남은 창조자인 프랑켄슈타인의 일방적인 저주와 피조물의 정당한 항변 사이의 충돌로 전개된다. 피조물은 겉모습 때문에 사회로부터 배척당하고, 인간으로서의 존재를 인정받지 못한 채 고립된 삶을 살아왔다. 그는 자신이 태어난 이유조차 모른 채 버림받고, 정체성 혼란과 외로움, 혐오 사이에서 고통 받고 있음을 호소한다. “진정해, 내 얘기를 들어줘. 나는 당신의 피조물이고, 당신의 아담이야.”라는 그의 말은 단순한 감정적 하소연이 아니라, 창조자에게 책임을 물으며, 인간다운 대우를 요구하는 윤리적 호소이다.
이 대화에서 피조물은 자신이 악마처럼 된 것은 본성 때문이 아니라, 사회로부터 받은 혐오와 차별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나는 자비롭고 착했지만, 불행이 나를 악마로 만들었다”고 고백한다. 이는 메리 셸리가 루소적인 관점에서 주장한, 인간은 본래 선하나 환경이 악하게 만든다는 사상과 연결된다. 피조물은 태어날 때부터 흉측한 외모를 지녔지만, 처음에는 따뜻한 인간관계를 갈망했고, 선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인간들은 그를 괴물이라 여겨 쫓아냈고, 창조자인 프랑켄슈타인조차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배척의 연속 속에서 사랑받지 못한 존재가 복수심과 파괴적 욕망에 빠지게 되는 심리적 타락의 경로를 밟게 된다.
프랑켄슈타인은 이러한 호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창조물을 거부한다. 그는 “너와 나 사이에 유대는 없어. 우리는 적이다.”라고 말하며, 물리적 충돌까지 불사하겠다는 강경한 태도를 보인다. 이러한 반응은 단순한 공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위가 초래한 결과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회피하려는 심리로 해석할 수 있다. 그는 생명을 창조했으나, 그 생명에 대해 아무런 보호나 인도도 하지 않았고, 그것이 낳은 파괴에 대해서도 책임을 지려 하지 않는다.
이 장면은 또한 ‘괴물’이라는 낙인이 어떻게 한 존재의 정체성과 행동을 규정하는가를 묘사한다. 피조물은 인간들에게 무차별적인 혐오를 받은 끝에, 결국 자신을 “세상에서 버려진 존재”로 자각하고, 오직 창조자인 프랑켄슈타인에게만 기대를 걸게 된다. 그는 프랑켄슈타인에게 “내 말을 들어 달라”며 간청하며, “인간의 법조차 잔혹한 죄인에게 변명할 기회를 주는데, 당신은 나를 들어보려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는 단순히 목숨을 구걸하는 처지가 아니라, 자기 존재를 정당하게 설명할 기회조차 박탈당한 자의 절박한 저항이다.
또한 이 대화에서 피조물은 자신의 외면이 아닌 내면의 도덕성과 감정을 강조한다. 그는 사랑과 동정, 선의를 지녔으며, 행복한 삶을 원했고, 그것을 얻었다면 절대 악행을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 고백은 피조물이 단순한 괴물이 아니라, 고통을 인식하고 반응하는 도덕적 주체임을 강조하는 대목이다. 메리 셸리는 이러한 방식으로 선과 악의 이분법을 흔들고, 인간다운 외모를 지녔다고 해서 반드시 도덕적이며, 흉측한 외모를 지녔다고 해서 반드시 사악한 것은 아니라는 윤리적 질문을 제기한다.
이 장면은 『프랑켄슈타인』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 중 하나이다. 피조물은 이 대화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직접 들려줄 기회를 얻고, 이후 그가 어떻게 인간 사회에서 배척당했는지, 어떤 과정을 통해 빅터 프랑켄슈타인에게 복수하게 되었는지를 서술한다. 둘 사이의 대화는 『프랑켄슈타인』 전체 주제의 정점에 위치한다. 과학이 생명을 창조할 수 있을지 몰라도, 도덕과 책임, 인간적인 돌봄 없이는 그것이 재앙으로 변할 수밖에 없음을 경고한다. 프랑켄슈타인은 신의 자리에 서서 생명을 창조했지만, 신처럼 사랑하거나 인도하지 못했고, 그 결과로 파멸의 길을 걷게 된다. 피조물 역시 본성보다는 환경에 의해 악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으며, 그는 끝까지 창조자의 사랑과 이해를 원했지만 끝내 얻지 못한다.
이처럼 빙하 위에서 이루어진 창조자와 피조물의 대면은 단순한 갈등의 장면이 아니라, 존재와 책임, 사회적 소외와 도덕적 성찰이라는 복합적인 철학적 사유가 교차하는 공간이다. 메리 셸리는 이를 통해 인간의 과학적 능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능력을 어떻게 책임지고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윤리적 통찰임을 강하게 드러낸다.
고전본문
“진정해, 내 소중한 머리 위에 증오를 쏟아 붓기 전에 제발 내 얘기를 들어줘. 당신은 나를 더 불행하게 만들려고 하지만, 난 이미 충분히 고통을 겪지 않았나? 내 삶에 고통만 쌓일 뿐이지만 생명은 내게도 소중하니까. 나도 내 목숨을 지키려고 애쓸 거야. 내가 당신보다 더 강하게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잊지 마. 나는 당신보다 키도 크고, 관절도 유연하지. 하지만 당신과 적이 되고 싶지는 않아. 난 당신이 만든 생명체이지. 그리고 나의 조물주이자, 왕인 당신에게 더욱 순종할거야. 그대가 내게 빚진, 당신의 의무를 다한다면 말이지. 아, 프랑켄슈타인. 다른 사람에게는 공정하게 대하면서, 나만 짓밟지는 말아 줘. 내게는 당신의 정의, 심지어 관대한 처분과 사랑이 가장 절실하게 필요하니까. 잊지 마, 나는 당신의 피조물이야. 나는 당신의 아담이라고. 아니, 나는 하늘에서 추락한 천사인 셈이지. 난 잘못한 것도 없는데, 당신은 나를 기쁨에서 쫓아냈지. 어디서든 축복을 볼 수 있지만, 나만 소외되어 있어. 나는 자비롭고, 착하지만, 불행이 나를 악마로 만들었어.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면, 나도 미덕을 행하는 존재가 되겠지.”
“저리 꺼져! 네 말은 듣지 않겠어. 너와 나 사이에 유대는 있을 수 없어. 우리는 적이니까. 꺼져 버려! 안 그러면, 어디 한 번, 힘으로 겨뤄 보자. 둘 중 하나는 쓰러지겠지.”
“어떻게 해야 당신 마음을 돌릴 수 있지? 아무리 간청해도 당신이 만든 생명체에서 따뜻한 관심의 눈길 한번 줄 수 없는 것인가? 당신의 선행과 동정을 이렇게 애원하는데도? 프랑켄슈타인, 나를 믿어. 나는 자비를 베풀 줄 알았어. 내 영혼은 사랑과 인간애로 가득했다고. 하지만 지금 나는 혼자이지 않은가? 비참하게도 혼자이지 않은가? 나를 만든 당신조차 나를 끔찍하게 싫어해. 하물며 당신 동료들은 내게 빚진 것도 없는데, 내가 그들에게 무엇을 바라겠는가? 그들은 나를 쫓아내고 증오하지. 황량한 산과 거친 빙하만이 나의 피난처일 뿐이야. 여러 날을 이곳에서 방황했어. 나는 얼음 동굴이 겁나지 않고, 내가 유일하게 머물 수 있는 곳이지. 내가 그곳에서 지내도 인간들은 뭐라고 하지 않으니까. 나는 이 음울한 하늘을 기쁘게 맞지. 당신의 동료들보다 내게 친절하니까. 많은 사람이 나의 존재를 안다면 그들도 당신과 똑같이 행동하고, 나를 파괴하기 위해 자신들을 무장하겠지. 나를 혐오하는 사람들을 내가 어찌 증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적들과 어떤 관계도 맺고 싶지 않아. 내가 비참하니 그들도 나의 비참함을 느끼게 할거야. 하지만 당신만이 내 불행을 보상할 수 있는 힘이 있고, 그들을 악에서 구할 수 있어. 그런 악을 크게 만드는 일은 오직 당신 손에 달려 있지. 내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면 당신과 당신의 가족들뿐 아니라, 수천 명의 사람들이 분노의 소용돌이에 휩쓸리게 될 거야. 나를 동정하되, 무시하지 마. 네 얘기를 들어줘. 일단 내 얘기를 다 듣고 나서 당신 판단에 따라 나를 포기하든 위로하든 마음대로 해. 하지만 내 말을 끝까지 들어 봐. 인간의 법에 따르면 아무리 잔혹한 죄인이라 하더라도 판결을 받기 전에는 자신을 변호할 기회가 있다고 들었어. 프랑켄슈타인, 내 말을 들어 봐. 당신은 나를 살인자라 비난했지만, 정작 자신은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당신이 만든 생명을 파괴하려 하고 있어.“
[출전] 메리 셸리, 『프랑켄슈타인』 중에서
토론하기
(1) 피조물이 자신의 창조자인 프랑켄슈타인에게 하는 말의 핵심적인 내용이 무엇인지 정리해보자.
(2)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의 피조물이 하는 부탁을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 그 이유는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3) 우리 사회에서 한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정리해 보자. 또한 그 기준이 정당하다고 생각하는지 판단해 보자.
해설읽기
혐오가 만든 괴물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은 단지 과학의 오만과 창조의 결과에 대한 윤리적 성찰만을 다룬 작품이 아니다. 이 소설은 외면적 차이와 낯섦에 대한 인간 사회의 반응, 특히 혐오와 배척이 어떻게 한 존재를 ‘괴물’로 만들어가는가를 다루고 있다. 작품 속 피조물은 본래 인간과 같은 감정과 도덕성을 지닌 존재였지만, 끊임없이 자신을 향해 가해지는 혐오의 시선과 폭력적 배척 속에서 점차 복수심과 파괴의 충동으로 물들어 간다. 이 과정은 혐오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인간관계를 왜곡시키고 존재의 방향을 바꾸는 강력한 사회적 힘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작품에서 과학자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죽은 자의 신체 조각을 조합해 생명을 창조하지만, 그 외모의 흉측함에 놀라 피조물을 버리고 도망친다. 창조물은 깨어난 순간부터 사랑과 보호를 받기는커녕, 자신의 존재 자체가 거부당하는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자신을 낳은 창조자조차 자신을 외면하고 두려워하며 혐오한다는 사실은 그에게 깊은 상처와 혼란을 안겨준다. 그는 인간들과 관계를 맺으려 시도하지만, 모든 시도는 폭력과 추방으로 이어진다. 어느 마을에서는 그를 본 사람들이 몽둥이로 내쫓고, 어떤 가족은 그가 도움을 주려는 순간 공포에 질려 쓰러진다. 그의 모습 하나만으로 그는 사회로부터 ‘괴물’로 낙인찍힌다.
이러한 반복된 혐오의 경험은 피조물에게 정체성의 혼란과 인간에 대한 절망을 불러온다. 그는 스스로를 “착했지만 불행이 나를 악마로 만들었다”고 진술하며, 자신의 악함조차도 사회로부터 강요된 결과라고 인식한다. 이는 혐오가 어떻게 대상의 본성을 변질시키고, 악을 낳는 토양이 되는지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피조물은 선의를 품고 태어났으나, 반복된 배척과 증오의 시선 속에서 결국 인간에 대한 신뢰를 잃고 복수를 선택하게 된다.
특히 주목할 점은 피조물이 프랑켄슈타인에게 동정과 이해를 호소하는 장면이다. 그는 창조자를 향해 자신도 사랑받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며, “나는 당신의 아담이자, 당신의 책임”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프랑켄슈타인은 그를 “악마”라 부르며 완전히 거부하고, 어떤 가능성도 열어주지 않는다. 이러한 거절은 피조물에게 마지막 희망의 문이 닫히는 순간이며, 사회로부터 완전히 추방된 자의 절망이 어떻게 폭력으로 전이되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후 그는 프랑켄슈타인의 가족과 친구들을 하나하나 죽이며 복수를 실행하게 되고, 이는 단지 개인의 복수가 아니라 혐오가 낳은 비극의 연쇄를 의미한다.
혐오가 아닌 공감과 이해와 사랑이 필요하다
메리 셸리는 『프랑켄슈타인』을 통해 혐오의 감정이 단지 대상에 대한 비호감이나 거부를 넘어, 그 존재를 실질적으로 사회적 타자, 더 나아가 괴물화된 존재로 전락시키는 폭력의 기제임을 고발한다. 이 소설에서 괴물은 태어나면서부터 괴물이었던 것이 아니라, 사회가 그를 그렇게 규정하고 몰아간 결과로 괴물이 되어버린 것이다. 외모에 대한 공포와 배척은 단지 개인의 취향이나 감정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공유하는 규범과 질서 안에서 만들어진 구조적 혐오로 나타난다.
또한 피조물의 경험은 단지 개인적인 불행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창조자를 원망하고 인간 전체를 향한 증오로 나아가게 된다. 그는 인간들에게 받은 고통을 다시 인간들에게 되돌려주고자 하며, 결국 수많은 죽음을 불러온다. 이는 혐오가 증폭되었을 때 얼마나 치명적인 결과를 낳는지, 그리고 그것이 공감과 책임의 결여로부터 시작되었음을 경고한다. 메리 셸리는 이를 통해 현대 사회가 무심코 퍼붓는 ‘타자에 대한 혐오’가 얼마나 위험한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를 암시한다.
프랑켄슈타인의 창조물은 외적 형태로 인해 ‘괴물’이라 불렸지만, 진정한 괴물은 오히려 그를 만들어 놓고 책임지지 않았던 프랑켄슈타인일지도 모른다. 메리 셸리는 이 작품을 통해 과학과 기술, 창조의 힘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에 따르는 도덕적 책임과 인간에 대한 공감임을 강조한다. 과학이 생명을 만들 수는 있지만, 그 생명이 인간이 되기 위해선 사랑, 존중, 이해라는 윤리적 태도가 필수적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혐오는 이처럼 단순한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를 규정하고, 정체성을 짓밟으며, 결국에는 악을 낳는 토양이 될 수 있다.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은 이러한 혐오의 구조와 그 위험성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현대 사회에서도 외모, 인종, 성별, 신념, 장애 등의 이유로 혐오와 배척이 만연하고 있다. 괴물은 언제나 우리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의 편견과 혐오, 그리고 책임 회피 속에서 태어난다. 결국 『프랑켄슈타인』은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과연 누군가를 단지 낯설다는 이유로, 다르다는 이유로 괴물로 만들고 있지는 않은가? 그리고 우리가 만든 그 ‘괴물’의 책임은 과연 누구에게 있는가?
키워드
괴물, 사랑, 존재, 책임, 혐오
전후맥락
빅터 프랑켄슈타인과 그의 피조물이 나누는 대화 장면은 『프랑켄슈타인』의 사상적 핵심을 잘 보여준다. 이 장면은 프랑켄슈타인이 알프스 산맥의 빙하 위에서 자신의 피조물과 우연히 마주치면서 시작된다. 피조물은 자신을 버리고 도망쳤던 창조자를 향해 처음으로 직접 말을 걸고, 절박하게 자신의 존재 이유와 고통, 그리고 인간성과 동정심에 대해 호소한다.
이 만남은 창조자인 프랑켄슈타인의 일방적인 저주와 피조물의 정당한 항변 사이의 충돌로 전개된다. 피조물은 겉모습 때문에 사회로부터 배척당하고, 인간으로서의 존재를 인정받지 못한 채 고립된 삶을 살아왔다. 그는 자신이 태어난 이유조차 모른 채 버림받고, 정체성 혼란과 외로움, 혐오 사이에서 고통 받고 있음을 호소한다. “진정해, 내 얘기를 들어줘. 나는 당신의 피조물이고, 당신의 아담이야.”라는 그의 말은 단순한 감정적 하소연이 아니라, 창조자에게 책임을 물으며, 인간다운 대우를 요구하는 윤리적 호소이다.
이 대화에서 피조물은 자신이 악마처럼 된 것은 본성 때문이 아니라, 사회로부터 받은 혐오와 차별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나는 자비롭고 착했지만, 불행이 나를 악마로 만들었다”고 고백한다. 이는 메리 셸리가 루소적인 관점에서 주장한, 인간은 본래 선하나 환경이 악하게 만든다는 사상과 연결된다. 피조물은 태어날 때부터 흉측한 외모를 지녔지만, 처음에는 따뜻한 인간관계를 갈망했고, 선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인간들은 그를 괴물이라 여겨 쫓아냈고, 창조자인 프랑켄슈타인조차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배척의 연속 속에서 사랑받지 못한 존재가 복수심과 파괴적 욕망에 빠지게 되는 심리적 타락의 경로를 밟게 된다.
프랑켄슈타인은 이러한 호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창조물을 거부한다. 그는 “너와 나 사이에 유대는 없어. 우리는 적이다.”라고 말하며, 물리적 충돌까지 불사하겠다는 강경한 태도를 보인다. 이러한 반응은 단순한 공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위가 초래한 결과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회피하려는 심리로 해석할 수 있다. 그는 생명을 창조했으나, 그 생명에 대해 아무런 보호나 인도도 하지 않았고, 그것이 낳은 파괴에 대해서도 책임을 지려 하지 않는다.
이 장면은 또한 ‘괴물’이라는 낙인이 어떻게 한 존재의 정체성과 행동을 규정하는가를 묘사한다. 피조물은 인간들에게 무차별적인 혐오를 받은 끝에, 결국 자신을 “세상에서 버려진 존재”로 자각하고, 오직 창조자인 프랑켄슈타인에게만 기대를 걸게 된다. 그는 프랑켄슈타인에게 “내 말을 들어 달라”며 간청하며, “인간의 법조차 잔혹한 죄인에게 변명할 기회를 주는데, 당신은 나를 들어보려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는 단순히 목숨을 구걸하는 처지가 아니라, 자기 존재를 정당하게 설명할 기회조차 박탈당한 자의 절박한 저항이다.
또한 이 대화에서 피조물은 자신의 외면이 아닌 내면의 도덕성과 감정을 강조한다. 그는 사랑과 동정, 선의를 지녔으며, 행복한 삶을 원했고, 그것을 얻었다면 절대 악행을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 고백은 피조물이 단순한 괴물이 아니라, 고통을 인식하고 반응하는 도덕적 주체임을 강조하는 대목이다. 메리 셸리는 이러한 방식으로 선과 악의 이분법을 흔들고, 인간다운 외모를 지녔다고 해서 반드시 도덕적이며, 흉측한 외모를 지녔다고 해서 반드시 사악한 것은 아니라는 윤리적 질문을 제기한다.
이 장면은 『프랑켄슈타인』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 중 하나이다. 피조물은 이 대화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직접 들려줄 기회를 얻고, 이후 그가 어떻게 인간 사회에서 배척당했는지, 어떤 과정을 통해 빅터 프랑켄슈타인에게 복수하게 되었는지를 서술한다. 둘 사이의 대화는 『프랑켄슈타인』 전체 주제의 정점에 위치한다. 과학이 생명을 창조할 수 있을지 몰라도, 도덕과 책임, 인간적인 돌봄 없이는 그것이 재앙으로 변할 수밖에 없음을 경고한다. 프랑켄슈타인은 신의 자리에 서서 생명을 창조했지만, 신처럼 사랑하거나 인도하지 못했고, 그 결과로 파멸의 길을 걷게 된다. 피조물 역시 본성보다는 환경에 의해 악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으며, 그는 끝까지 창조자의 사랑과 이해를 원했지만 끝내 얻지 못한다.
이처럼 빙하 위에서 이루어진 창조자와 피조물의 대면은 단순한 갈등의 장면이 아니라, 존재와 책임, 사회적 소외와 도덕적 성찰이라는 복합적인 철학적 사유가 교차하는 공간이다. 메리 셸리는 이를 통해 인간의 과학적 능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능력을 어떻게 책임지고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윤리적 통찰임을 강하게 드러낸다.
고전본문
“진정해, 내 소중한 머리 위에 증오를 쏟아 붓기 전에 제발 내 얘기를 들어줘. 당신은 나를 더 불행하게 만들려고 하지만, 난 이미 충분히 고통을 겪지 않았나? 내 삶에 고통만 쌓일 뿐이지만 생명은 내게도 소중하니까. 나도 내 목숨을 지키려고 애쓸 거야. 내가 당신보다 더 강하게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잊지 마. 나는 당신보다 키도 크고, 관절도 유연하지. 하지만 당신과 적이 되고 싶지는 않아. 난 당신이 만든 생명체이지. 그리고 나의 조물주이자, 왕인 당신에게 더욱 순종할거야. 그대가 내게 빚진, 당신의 의무를 다한다면 말이지. 아, 프랑켄슈타인. 다른 사람에게는 공정하게 대하면서, 나만 짓밟지는 말아 줘. 내게는 당신의 정의, 심지어 관대한 처분과 사랑이 가장 절실하게 필요하니까. 잊지 마, 나는 당신의 피조물이야. 나는 당신의 아담이라고. 아니, 나는 하늘에서 추락한 천사인 셈이지. 난 잘못한 것도 없는데, 당신은 나를 기쁨에서 쫓아냈지. 어디서든 축복을 볼 수 있지만, 나만 소외되어 있어. 나는 자비롭고, 착하지만, 불행이 나를 악마로 만들었어.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면, 나도 미덕을 행하는 존재가 되겠지.”
“저리 꺼져! 네 말은 듣지 않겠어. 너와 나 사이에 유대는 있을 수 없어. 우리는 적이니까. 꺼져 버려! 안 그러면, 어디 한 번, 힘으로 겨뤄 보자. 둘 중 하나는 쓰러지겠지.”
“어떻게 해야 당신 마음을 돌릴 수 있지? 아무리 간청해도 당신이 만든 생명체에서 따뜻한 관심의 눈길 한번 줄 수 없는 것인가? 당신의 선행과 동정을 이렇게 애원하는데도? 프랑켄슈타인, 나를 믿어. 나는 자비를 베풀 줄 알았어. 내 영혼은 사랑과 인간애로 가득했다고. 하지만 지금 나는 혼자이지 않은가? 비참하게도 혼자이지 않은가? 나를 만든 당신조차 나를 끔찍하게 싫어해. 하물며 당신 동료들은 내게 빚진 것도 없는데, 내가 그들에게 무엇을 바라겠는가? 그들은 나를 쫓아내고 증오하지. 황량한 산과 거친 빙하만이 나의 피난처일 뿐이야. 여러 날을 이곳에서 방황했어. 나는 얼음 동굴이 겁나지 않고, 내가 유일하게 머물 수 있는 곳이지. 내가 그곳에서 지내도 인간들은 뭐라고 하지 않으니까. 나는 이 음울한 하늘을 기쁘게 맞지. 당신의 동료들보다 내게 친절하니까. 많은 사람이 나의 존재를 안다면 그들도 당신과 똑같이 행동하고, 나를 파괴하기 위해 자신들을 무장하겠지. 나를 혐오하는 사람들을 내가 어찌 증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적들과 어떤 관계도 맺고 싶지 않아. 내가 비참하니 그들도 나의 비참함을 느끼게 할거야. 하지만 당신만이 내 불행을 보상할 수 있는 힘이 있고, 그들을 악에서 구할 수 있어. 그런 악을 크게 만드는 일은 오직 당신 손에 달려 있지. 내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면 당신과 당신의 가족들뿐 아니라, 수천 명의 사람들이 분노의 소용돌이에 휩쓸리게 될 거야. 나를 동정하되, 무시하지 마. 네 얘기를 들어줘. 일단 내 얘기를 다 듣고 나서 당신 판단에 따라 나를 포기하든 위로하든 마음대로 해. 하지만 내 말을 끝까지 들어 봐. 인간의 법에 따르면 아무리 잔혹한 죄인이라 하더라도 판결을 받기 전에는 자신을 변호할 기회가 있다고 들었어. 프랑켄슈타인, 내 말을 들어 봐. 당신은 나를 살인자라 비난했지만, 정작 자신은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당신이 만든 생명을 파괴하려 하고 있어.“
[출전] 메리 셸리, 『프랑켄슈타인』 중에서
토론하기
(1) 피조물이 자신의 창조자인 프랑켄슈타인에게 하는 말의 핵심적인 내용이 무엇인지 정리해보자.
(2)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의 피조물이 하는 부탁을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 그 이유는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3) 우리 사회에서 한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정리해 보자. 또한 그 기준이 정당하다고 생각하는지 판단해 보자.
해설읽기
혐오가 만든 괴물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은 단지 과학의 오만과 창조의 결과에 대한 윤리적 성찰만을 다룬 작품이 아니다. 이 소설은 외면적 차이와 낯섦에 대한 인간 사회의 반응, 특히 혐오와 배척이 어떻게 한 존재를 ‘괴물’로 만들어가는가를 다루고 있다. 작품 속 피조물은 본래 인간과 같은 감정과 도덕성을 지닌 존재였지만, 끊임없이 자신을 향해 가해지는 혐오의 시선과 폭력적 배척 속에서 점차 복수심과 파괴의 충동으로 물들어 간다. 이 과정은 혐오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인간관계를 왜곡시키고 존재의 방향을 바꾸는 강력한 사회적 힘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작품에서 과학자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죽은 자의 신체 조각을 조합해 생명을 창조하지만, 그 외모의 흉측함에 놀라 피조물을 버리고 도망친다. 창조물은 깨어난 순간부터 사랑과 보호를 받기는커녕, 자신의 존재 자체가 거부당하는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자신을 낳은 창조자조차 자신을 외면하고 두려워하며 혐오한다는 사실은 그에게 깊은 상처와 혼란을 안겨준다. 그는 인간들과 관계를 맺으려 시도하지만, 모든 시도는 폭력과 추방으로 이어진다. 어느 마을에서는 그를 본 사람들이 몽둥이로 내쫓고, 어떤 가족은 그가 도움을 주려는 순간 공포에 질려 쓰러진다. 그의 모습 하나만으로 그는 사회로부터 ‘괴물’로 낙인찍힌다.
이러한 반복된 혐오의 경험은 피조물에게 정체성의 혼란과 인간에 대한 절망을 불러온다. 그는 스스로를 “착했지만 불행이 나를 악마로 만들었다”고 진술하며, 자신의 악함조차도 사회로부터 강요된 결과라고 인식한다. 이는 혐오가 어떻게 대상의 본성을 변질시키고, 악을 낳는 토양이 되는지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피조물은 선의를 품고 태어났으나, 반복된 배척과 증오의 시선 속에서 결국 인간에 대한 신뢰를 잃고 복수를 선택하게 된다.
특히 주목할 점은 피조물이 프랑켄슈타인에게 동정과 이해를 호소하는 장면이다. 그는 창조자를 향해 자신도 사랑받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며, “나는 당신의 아담이자, 당신의 책임”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프랑켄슈타인은 그를 “악마”라 부르며 완전히 거부하고, 어떤 가능성도 열어주지 않는다. 이러한 거절은 피조물에게 마지막 희망의 문이 닫히는 순간이며, 사회로부터 완전히 추방된 자의 절망이 어떻게 폭력으로 전이되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후 그는 프랑켄슈타인의 가족과 친구들을 하나하나 죽이며 복수를 실행하게 되고, 이는 단지 개인의 복수가 아니라 혐오가 낳은 비극의 연쇄를 의미한다.
혐오가 아닌 공감과 이해와 사랑이 필요하다
메리 셸리는 『프랑켄슈타인』을 통해 혐오의 감정이 단지 대상에 대한 비호감이나 거부를 넘어, 그 존재를 실질적으로 사회적 타자, 더 나아가 괴물화된 존재로 전락시키는 폭력의 기제임을 고발한다. 이 소설에서 괴물은 태어나면서부터 괴물이었던 것이 아니라, 사회가 그를 그렇게 규정하고 몰아간 결과로 괴물이 되어버린 것이다. 외모에 대한 공포와 배척은 단지 개인의 취향이나 감정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공유하는 규범과 질서 안에서 만들어진 구조적 혐오로 나타난다.
또한 피조물의 경험은 단지 개인적인 불행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창조자를 원망하고 인간 전체를 향한 증오로 나아가게 된다. 그는 인간들에게 받은 고통을 다시 인간들에게 되돌려주고자 하며, 결국 수많은 죽음을 불러온다. 이는 혐오가 증폭되었을 때 얼마나 치명적인 결과를 낳는지, 그리고 그것이 공감과 책임의 결여로부터 시작되었음을 경고한다. 메리 셸리는 이를 통해 현대 사회가 무심코 퍼붓는 ‘타자에 대한 혐오’가 얼마나 위험한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를 암시한다.
프랑켄슈타인의 창조물은 외적 형태로 인해 ‘괴물’이라 불렸지만, 진정한 괴물은 오히려 그를 만들어 놓고 책임지지 않았던 프랑켄슈타인일지도 모른다. 메리 셸리는 이 작품을 통해 과학과 기술, 창조의 힘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에 따르는 도덕적 책임과 인간에 대한 공감임을 강조한다. 과학이 생명을 만들 수는 있지만, 그 생명이 인간이 되기 위해선 사랑, 존중, 이해라는 윤리적 태도가 필수적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혐오는 이처럼 단순한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를 규정하고, 정체성을 짓밟으며, 결국에는 악을 낳는 토양이 될 수 있다.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은 이러한 혐오의 구조와 그 위험성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현대 사회에서도 외모, 인종, 성별, 신념, 장애 등의 이유로 혐오와 배척이 만연하고 있다. 괴물은 언제나 우리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의 편견과 혐오, 그리고 책임 회피 속에서 태어난다. 결국 『프랑켄슈타인』은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과연 누군가를 단지 낯설다는 이유로, 다르다는 이유로 괴물로 만들고 있지는 않은가? 그리고 우리가 만든 그 ‘괴물’의 책임은 과연 누구에게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