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맥락
이 책에서 롱기누스는 숭고라는 말 자체를 직접 정의하는 대신, 주로 그 효과에 대한 규정을 토대로 논의를 전개한다. 저자가 생각하는 숭고의 효과는 “[숭고미가 있는] 고결한 구절은 독자의 이성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을 바꾼다 […] 숭고는 압도적이고 저항할 수 없는 힘을 미쳐 독자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뒤흔들리게 만든다”라는 말에 집약되어 있다. 단순한 설득은 맞설 수도 있고 그저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데 그칠 수도 있지만, 숭고는 독자에게 그 같은 피할 곳을 주지 않고 전적으로 동의하도록, 행동으로 나아가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이처럼 그는 숭고를 미적인 차원의 쾌감 중 하나가 아니라 연설가, 다시 말해 공적인 영역에서 다른 이들을 움직이게 하고자 하는 이가 갖추어야 할 가장 강력한 덕목으로 여기고 있다.
이 덕목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발휘될 수 있는지를 밝히기 위해 저자는 기존에 나와 있는 논문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해 숭고의 산출을 가로막는 잘못들, 숭고를 산출하는 요소들, 숭고의 효과, 숭고와 관련되는 여러 가지 수사학적 기법 등을 그리스 문학 작품이나 연설문에서 가져온 예시를 곁들여 두루 다룬다. 아래 발췌문은 저자가 전반적인 자신의 관점을 밝히고 숭고의 산출에 실패하는 경우 사례를 제시함으로써 이 논의의 필요성을 재확인한 다음 본격적인 논의로의 진입을 위해 숭고의 기준을 세우기 시작하는 대목에서 가져온 것이다.
고전본문
이처럼 언어가 부적절하게 휘황해지는 원인은 모두 하나의 뿌리에서 찾을 수 있다네 ― 바로 새로운 생각을 추종하기 때문이야. 오늘날 거의 모든 식자가 여기에 휘둘리고 있지. 실은 인간의 덕과 인간의 병폐는 같은 뿌리에서 나오는 게야. 그리고 이것을 문학에 적용해 보자면, 문체상의 장식들, 숭고하거나 즐거움을 주는 심상들 같이 성공에 기여하는 것들은 탁월성의 토대이자 원천이기도 하지만 또한 실패의 토대이자 원천이기도 하지. 전환이나 과장, 단수 대신 복수를 쓰는 것도 마찬가지네. 그에 따르는 위험은 곧 말해주기로 하겠네. 그러려면 우선 숭고와 관련되는 문체의 잘못을 어떻게 피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논해야 할 걸세.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참된 숭고의 이론과 기준을 마련해야 할 테지. 문체를 판정하는 능력은 오랜 경험 끝에야 얻을 수 있는 결실이므로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말이네. 그래도 내가 뒤에서 말할 방법을 통해 우리가 참된 숭고와 그릇된 숭고를 구분할 수 있게 되리라 믿네.
인간사의 그 무엇도 위대한 정신들이 경멸하는 것이라면 참으로 위대하지는 않다고 보아야 할 것이네. 예컨대 사리를 아는 사람이라면 부, 명예, 영예, 권력, 혹은 그 밖에 거창한 허례허식으로 둘러싸여 있는 것들을 지고의 덕으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그런 것들을 보면 절로 경멸감이 드는 것을 크나큰 덕으로 생각할 걸세. 분명, 그런 것들을 가진 이보다 가질 기회가 있음에도 무시하는 위대한 영혼의 소유자들이 더 큰 존경을 받지. 이제 이 원칙을 시나 산문에서의 숭고에 적용해 보도록 하세. 허울만 좋은 숭고는 아닌지 하나하나 살펴보는 게지. 이 멋져 보이는 것이 그저 헛되고 어설픈 겉치레일 뿐, 뜯어 보면 그저 텅 빈 속을 감추고 있음이 들통나는 것은 아닌지 말이야. 만약 그러하다면 고귀한 정신을 가진 이는 그것을 우러르는 대신 멸시할 테니까 말이네. 진정한 숭고라면 자연히 우리의 영혼이 고양되는 느낌이 들고, 마치 우리가 읽은 것이 스스로 생각해 낸 것이라도 되는 듯 의기양양해지고 기쁨이 넘치게 마련이야. 어떤 작품이건 간에 날카롭고 박식한 비평가에게 몇 번이고 판정을 받는데도 그의 정신을 저 높은 이념들로 끌어올리지 못한다면, 그것이 제시하는 사상이 실제로 표현되어 있는 것 너머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그리고 더 오래 곱씹어 읽을수록 덜 생각하게 되는 작품이라면, 거기에는 참된 숭고가 있을 수 없지. 공들여 읽는 동안밖에는 아무런 힘도 미치지 못하는 게야. 하지만 어떤 글이 말하는 바에 도무지 떨쳐버리기 힘든 호소력이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기억에 오래도록 선명히 남는다면, 우리가 참된 숭고를 찾은 것이라 확신해도 좋을 걸세. 대개는, 때를 가리지 않고 모든 독자에게 만족감을 주는 그런 말들을 참으로 고귀하고 숭고하다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네. 무엇을 추구하는지, 어떤 생활을 하는지, 어떤 야심을 품고 있는지, 나이는 몇이나 되며 어떤 언어를 쓰는지, 그 모든 차이에도 불구하고 모든 독자에게 똑같은 인상을 남기는 책이라면, 그렇게 서로 전혀 다른 이들이 하나같이 호평한 데에 거부할 수 없는 권위가 실릴 테니 말이야.
[출전] 위 롱기누스, 『숭고에 관하여』
토론하기
(1) 이 글이 제시하는 참된 숭고의 기준은 무엇인지 정리해 보자.
(2) 자신이 아는 작품 중에서 롱기누스가 비판하는 “그저 헛되고 어설픈 겉치레일 뿐, 뜯어 보면 그저 텅 빈 속을 감추고 있음이 들통나는” 사례가 있는지 생각해 보고 그 작품에 대한 감상을 나누어 보자.
(3) 단순히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것을 넘어 독자를 감동시켜 마치 그것이 자신의 생각인 듯한 기분에 빠지게 하는 것은 합리적이고 비판적인 사고를 차단하는 것은 아닐까? 이에 대한 생각을 나누어 보자.
해설읽기
이 발췌문에서 롱기누스는 ‘부적절하게 휘황한 언어’와 대비되는 참된 숭고를 판정할 기준을 논의한다. 이런 논의가 필요한 것은 문체상의 장식이나 강렬한 심상, 혹은 전환이나 과장 같은 기법 등 여러 가지 수사학적 기교들이 잘 사용된 경우에는 독자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그저 요란한 겉치레에 그치고 오히려 독자의 마음을 식게 하기 때문이다. 표면상 동일한 기법이나 심상이라도 글 전체의 구성이나 저자가 글에 담은 사상에 따라 독자에게 다르게 느껴질 수 있기에 그 판단의 기준을 마련하려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크게 세 가지의 기준이 제시된다.
첫째는, 사리를 아는 사람 혹은 고귀한 정신을 가진 이의 판단이다. 저자는 그런 이들은 명예나 부와 같이 세상에서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것들을 오히려 멸시할뿐더러 궁극적으로는 일반인들 역시 그런 이유로 그들을 존경한다는 점을 문학적 기교의 판정에 적용한다. 아무리 유려하고 미려하게 쓴다 하더라도 그것이 그저 텅 빈 속을 감추기 위한 기교에 지나지 않고 글에 아무런 중요한 사상이 담겨 있지 않다면 좋은 글이라고 할 수 없다. 이 기준은 두 가지 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한편으로 숭고는 단순히 기교나 치장의 문제가 아니라 글 속에 담겨 있는 고귀한 정신의 문제이다. 다른 한편으로 숭고의 판정에는 그에 적절한 식견을 갖춘 자, 이를테면 전문가가 필요하다. ("문체를 판정하는 능력은 오랜 경험 끝에야 얻을 수 있는 결실"이다.)
둘째는 그 글이 독자에게, 특히 독자의 감정에 미치는 영향이다. 숭고가 그저 독자의 생각이 아니라 마음을 뒤흔들고 바꾸어 놓는 것이라면, 아무리 고귀한 사상을 담고 있는 글이라 해도 독자를 감동시키지 못한다면 숭고를 논할 여지는 없을 것이다. 롱기누스는 진정한 숭고는 독자에게 영혼의 고양감을, 그리고 글의 내용이 마치 자기 자신의 생각인 듯한 느낌을 준다고 말한다. 단순히 어떤 사상을 논리적으로 제시해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글에 적힌 것 이상으로 확장되는 것, 독자의 영혼을 움직여 그것을 제 것으로 삼게 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도무지 떨쳐버릴 수 없게 하는 것이 저자가 생각하는 참된 숭고의 힘이다.
셋째는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이들의 공통적인 경험이다. 고귀한 정신을 가진 사람, 혹은 그렇지는 않더라도 특정한 성격이나 경험을 가진 사람만이 감동하는 글이라면 그 감동이 정말로 글이 지닌 숭고의 힘인지 그저 독자 스스로가 만들어낸 것일 뿐인지 추가적인 판단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생활 양식도 욕망하는 대상도 심지어 쓰는 언어까지도 서로 다른 이들을 모두 똑같이 감동시킨다면, 그것 자체가 참된 숭고를 판정할 권위 있는 기준이 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상의 내용은 숭고를 단순한 미적 쾌감의 하나가 아니라 도덕, 이성 등 ‘보다 높은’ 영역과 연결 짓거나 타당한 미적 판단의 근거를 전문가의 식견이나 보편적인 동의에서 구하는 근대 이후 미학 이론과도 이어진다는 점에서 이천 년가량이 지난 지금까지도 생각해 볼 만하다. 또한 근대 이후 미학과 예술 분야에서 전개된 작품의 내용을 배제하고 형식 자체가 주는 미적 쾌감에 주목한 ‘미적 무관심성’ 논의나, 압도적인 감동을 통해 합리적 판단을 차단하는 나치 미학 등을 둘러싼 ‘정치의 미학화’ 비판 논의와 비교하며 읽어볼 만한 지점도 있다.
키워드
롱기누스, 문체, 수사학, 숭고
전후맥락
이 책에서 롱기누스는 숭고라는 말 자체를 직접 정의하는 대신, 주로 그 효과에 대한 규정을 토대로 논의를 전개한다. 저자가 생각하는 숭고의 효과는 “[숭고미가 있는] 고결한 구절은 독자의 이성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을 바꾼다 […] 숭고는 압도적이고 저항할 수 없는 힘을 미쳐 독자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뒤흔들리게 만든다”라는 말에 집약되어 있다. 단순한 설득은 맞설 수도 있고 그저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데 그칠 수도 있지만, 숭고는 독자에게 그 같은 피할 곳을 주지 않고 전적으로 동의하도록, 행동으로 나아가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이처럼 그는 숭고를 미적인 차원의 쾌감 중 하나가 아니라 연설가, 다시 말해 공적인 영역에서 다른 이들을 움직이게 하고자 하는 이가 갖추어야 할 가장 강력한 덕목으로 여기고 있다.
이 덕목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발휘될 수 있는지를 밝히기 위해 저자는 기존에 나와 있는 논문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해 숭고의 산출을 가로막는 잘못들, 숭고를 산출하는 요소들, 숭고의 효과, 숭고와 관련되는 여러 가지 수사학적 기법 등을 그리스 문학 작품이나 연설문에서 가져온 예시를 곁들여 두루 다룬다. 아래 발췌문은 저자가 전반적인 자신의 관점을 밝히고 숭고의 산출에 실패하는 경우 사례를 제시함으로써 이 논의의 필요성을 재확인한 다음 본격적인 논의로의 진입을 위해 숭고의 기준을 세우기 시작하는 대목에서 가져온 것이다.
고전본문
이처럼 언어가 부적절하게 휘황해지는 원인은 모두 하나의 뿌리에서 찾을 수 있다네 ― 바로 새로운 생각을 추종하기 때문이야. 오늘날 거의 모든 식자가 여기에 휘둘리고 있지. 실은 인간의 덕과 인간의 병폐는 같은 뿌리에서 나오는 게야. 그리고 이것을 문학에 적용해 보자면, 문체상의 장식들, 숭고하거나 즐거움을 주는 심상들 같이 성공에 기여하는 것들은 탁월성의 토대이자 원천이기도 하지만 또한 실패의 토대이자 원천이기도 하지. 전환이나 과장, 단수 대신 복수를 쓰는 것도 마찬가지네. 그에 따르는 위험은 곧 말해주기로 하겠네. 그러려면 우선 숭고와 관련되는 문체의 잘못을 어떻게 피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논해야 할 걸세.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참된 숭고의 이론과 기준을 마련해야 할 테지. 문체를 판정하는 능력은 오랜 경험 끝에야 얻을 수 있는 결실이므로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말이네. 그래도 내가 뒤에서 말할 방법을 통해 우리가 참된 숭고와 그릇된 숭고를 구분할 수 있게 되리라 믿네.
인간사의 그 무엇도 위대한 정신들이 경멸하는 것이라면 참으로 위대하지는 않다고 보아야 할 것이네. 예컨대 사리를 아는 사람이라면 부, 명예, 영예, 권력, 혹은 그 밖에 거창한 허례허식으로 둘러싸여 있는 것들을 지고의 덕으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그런 것들을 보면 절로 경멸감이 드는 것을 크나큰 덕으로 생각할 걸세. 분명, 그런 것들을 가진 이보다 가질 기회가 있음에도 무시하는 위대한 영혼의 소유자들이 더 큰 존경을 받지. 이제 이 원칙을 시나 산문에서의 숭고에 적용해 보도록 하세. 허울만 좋은 숭고는 아닌지 하나하나 살펴보는 게지. 이 멋져 보이는 것이 그저 헛되고 어설픈 겉치레일 뿐, 뜯어 보면 그저 텅 빈 속을 감추고 있음이 들통나는 것은 아닌지 말이야. 만약 그러하다면 고귀한 정신을 가진 이는 그것을 우러르는 대신 멸시할 테니까 말이네. 진정한 숭고라면 자연히 우리의 영혼이 고양되는 느낌이 들고, 마치 우리가 읽은 것이 스스로 생각해 낸 것이라도 되는 듯 의기양양해지고 기쁨이 넘치게 마련이야. 어떤 작품이건 간에 날카롭고 박식한 비평가에게 몇 번이고 판정을 받는데도 그의 정신을 저 높은 이념들로 끌어올리지 못한다면, 그것이 제시하는 사상이 실제로 표현되어 있는 것 너머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그리고 더 오래 곱씹어 읽을수록 덜 생각하게 되는 작품이라면, 거기에는 참된 숭고가 있을 수 없지. 공들여 읽는 동안밖에는 아무런 힘도 미치지 못하는 게야. 하지만 어떤 글이 말하는 바에 도무지 떨쳐버리기 힘든 호소력이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기억에 오래도록 선명히 남는다면, 우리가 참된 숭고를 찾은 것이라 확신해도 좋을 걸세. 대개는, 때를 가리지 않고 모든 독자에게 만족감을 주는 그런 말들을 참으로 고귀하고 숭고하다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네. 무엇을 추구하는지, 어떤 생활을 하는지, 어떤 야심을 품고 있는지, 나이는 몇이나 되며 어떤 언어를 쓰는지, 그 모든 차이에도 불구하고 모든 독자에게 똑같은 인상을 남기는 책이라면, 그렇게 서로 전혀 다른 이들이 하나같이 호평한 데에 거부할 수 없는 권위가 실릴 테니 말이야.
[출전] 위 롱기누스, 『숭고에 관하여』
토론하기
(1) 이 글이 제시하는 참된 숭고의 기준은 무엇인지 정리해 보자.
(2) 자신이 아는 작품 중에서 롱기누스가 비판하는 “그저 헛되고 어설픈 겉치레일 뿐, 뜯어 보면 그저 텅 빈 속을 감추고 있음이 들통나는” 사례가 있는지 생각해 보고 그 작품에 대한 감상을 나누어 보자.
(3) 단순히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것을 넘어 독자를 감동시켜 마치 그것이 자신의 생각인 듯한 기분에 빠지게 하는 것은 합리적이고 비판적인 사고를 차단하는 것은 아닐까? 이에 대한 생각을 나누어 보자.
해설읽기
이 발췌문에서 롱기누스는 ‘부적절하게 휘황한 언어’와 대비되는 참된 숭고를 판정할 기준을 논의한다. 이런 논의가 필요한 것은 문체상의 장식이나 강렬한 심상, 혹은 전환이나 과장 같은 기법 등 여러 가지 수사학적 기교들이 잘 사용된 경우에는 독자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그저 요란한 겉치레에 그치고 오히려 독자의 마음을 식게 하기 때문이다. 표면상 동일한 기법이나 심상이라도 글 전체의 구성이나 저자가 글에 담은 사상에 따라 독자에게 다르게 느껴질 수 있기에 그 판단의 기준을 마련하려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크게 세 가지의 기준이 제시된다.
첫째는, 사리를 아는 사람 혹은 고귀한 정신을 가진 이의 판단이다. 저자는 그런 이들은 명예나 부와 같이 세상에서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것들을 오히려 멸시할뿐더러 궁극적으로는 일반인들 역시 그런 이유로 그들을 존경한다는 점을 문학적 기교의 판정에 적용한다. 아무리 유려하고 미려하게 쓴다 하더라도 그것이 그저 텅 빈 속을 감추기 위한 기교에 지나지 않고 글에 아무런 중요한 사상이 담겨 있지 않다면 좋은 글이라고 할 수 없다. 이 기준은 두 가지 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한편으로 숭고는 단순히 기교나 치장의 문제가 아니라 글 속에 담겨 있는 고귀한 정신의 문제이다. 다른 한편으로 숭고의 판정에는 그에 적절한 식견을 갖춘 자, 이를테면 전문가가 필요하다. ("문체를 판정하는 능력은 오랜 경험 끝에야 얻을 수 있는 결실"이다.)
둘째는 그 글이 독자에게, 특히 독자의 감정에 미치는 영향이다. 숭고가 그저 독자의 생각이 아니라 마음을 뒤흔들고 바꾸어 놓는 것이라면, 아무리 고귀한 사상을 담고 있는 글이라 해도 독자를 감동시키지 못한다면 숭고를 논할 여지는 없을 것이다. 롱기누스는 진정한 숭고는 독자에게 영혼의 고양감을, 그리고 글의 내용이 마치 자기 자신의 생각인 듯한 느낌을 준다고 말한다. 단순히 어떤 사상을 논리적으로 제시해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글에 적힌 것 이상으로 확장되는 것, 독자의 영혼을 움직여 그것을 제 것으로 삼게 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도무지 떨쳐버릴 수 없게 하는 것이 저자가 생각하는 참된 숭고의 힘이다.
셋째는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이들의 공통적인 경험이다. 고귀한 정신을 가진 사람, 혹은 그렇지는 않더라도 특정한 성격이나 경험을 가진 사람만이 감동하는 글이라면 그 감동이 정말로 글이 지닌 숭고의 힘인지 그저 독자 스스로가 만들어낸 것일 뿐인지 추가적인 판단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생활 양식도 욕망하는 대상도 심지어 쓰는 언어까지도 서로 다른 이들을 모두 똑같이 감동시킨다면, 그것 자체가 참된 숭고를 판정할 권위 있는 기준이 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상의 내용은 숭고를 단순한 미적 쾌감의 하나가 아니라 도덕, 이성 등 ‘보다 높은’ 영역과 연결 짓거나 타당한 미적 판단의 근거를 전문가의 식견이나 보편적인 동의에서 구하는 근대 이후 미학 이론과도 이어진다는 점에서 이천 년가량이 지난 지금까지도 생각해 볼 만하다. 또한 근대 이후 미학과 예술 분야에서 전개된 작품의 내용을 배제하고 형식 자체가 주는 미적 쾌감에 주목한 ‘미적 무관심성’ 논의나, 압도적인 감동을 통해 합리적 판단을 차단하는 나치 미학 등을 둘러싼 ‘정치의 미학화’ 비판 논의와 비교하며 읽어볼 만한 지점도 있다.
키워드
롱기누스, 문체, 수사학, 숭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