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맥락
이 책은 호기심에서부터 고독, 공감, 야망 등에 이르는 여러 가지 정념의 종류에 대한 개략적인 고찰, 숭고의 근원, 미의 근원, 감각의 효과, 언어와 정념의 관계를 다루는 다섯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버크는 가장 원초적인 감정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호기심에서 출발해 단순한 고통과 쾌, 쾌의 감소로서의 고통과 고통의 감소로서와 쾌 … 같은 식으로 논의를 쌓아 나간다. 발췌문은 책의 첫 번째 부분에서 숭고의 경험을 개관하는 대목이다.
앞에서 버크는 우선 쾌와 고통에 있어 “적극적이고(positive) 독립적인 성격의 쾌와 고통”과 고통이나 쾌가 줄어들 때 생겨나는 상대적인 쾌감/불쾌감을 구분한다. 그중에서도 고통이 줄어들 때 느껴지는 상대적인 쾌, “많은 경우에 쾌적하지만 본성상 적극적인 쾌와는 전혀 다른” 감정을 가리켜 “유적(delight)”이라 칭한다. 또한 이어서 어느 정도 이상의 강도를 갖는 관념은 대부분 고통이나 쾌 혹은 그 완화, 그리고 자기보존과 사회라는 양축으로 환원된다고 지적하는데, 숭고는 고통의 완화에서 비롯되는 유적의, 그리고 자기보존과 연관되는 감정의 가장 강력한 사례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제목의 순서와 마찬가지로 숭고보다 조금 뒤에서 처음 언급되며, 숭고와 달리 사회와 연관되는 감정으로 제시된다.
고전본문
어떤 식으로든 고통과 위험의 관념을 촉발하는 데에 적합한 것, 어떤 식으로든 공포스러운 것 혹은 공포와 유사한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은 무엇이든 숭고의 원천이다. 다시 말해, 정신이 느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감정을 생산한다. 가장 강력한 감정이라고 한 것은 고통의 관념들이 쾌(pleasure) 쪽에 들어가는 것들보다 훨씬 더 강력하기 때문이다. 의심의 여지 없이, 우리가 겪게 되는 괴로움들이 몸과 정신에 미치는 영향은, 최상의 식견이나 더없이 생생한 상상력을 갖춘 쾌락주의자가 말할 수 있을 그 어떤 쾌보다도, 가장 건강하고 감각이 예민한 몸이 즐길 수 있을 쾌보다도 훨씬 크다. 아닌 게 아니라, 지난번의 안타까운 프랑스 국왕 시해 미수 사건에 대해 법원이 내린 몇 시간에 걸친 [공개 처형이라는] 괴로움을 겪는 대가를 치르면서까지 더없이 완벽하게 만족스러운 삶을 택할 사람이 있을지는 심히 의심스럽다. 그런데, 고통이 쾌보다 강력하게 작동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죽음은 일반적으로 고통보다 훨씬 큰 충격을 준다. 아무리 격렬한 고통이라 해도 죽음보다는 낫다고 여겨지지 않는 고통은 거의 없으니 말이다. 애초에, 감히 말하자면, 고통이 고통스러운 것은 그것이 이 [죽음이라는] 공포의 왕의 사자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위험이나 고통은 너무 가까이에서 압박을 가할 때는 아무런 유적도 주지 못하며 그저 공포스러울 뿐이다. 하지만 어느 정도 거리를 두면, 그리고 어느 정도 완화되면,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듯 위험이나 고통은 유적을 줄 수 있으며 실제로 그리한다.
[출전] 버크, 『숭고와 미의 기원에 관한 철학적 탐구』제1부
토론하기
(1) 위험이나 고통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면 유적, 즉 모종의 쾌를 경험할 수 있다는 말의 의미를 실제 사례를 들어 생각해 보자.
(2) “위험이나 고통은 너무 가까이에서 압박을 가할 때는 아무런 유적도 주지 못하며 그저 공포스러울 뿐”이라는 말의 반례를 생각해 보자.
(3) 고통과 위험의 관념을 촉발하는 대상 앞에서 “유적” 이외의 쾌를 느낄 수 있는 경우가 있을지 생각해 보자.
해설읽기
여기서 버크는 숭고의 원천으로 고통과 위험, 그에 대한 공포를 지목한다. 그가 보기에 이런 것들은 우리에게 쾌보다 훨씬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데, 이런 것들은 궁극적으로 죽음에 대한 공포, 바꾸어 말하자면 자기보존이라는 근본 욕구와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면에서 완벽한 삶, 즉 우리가 꿈꿀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이라도 특히 고통스러운 죽음과 맞바꿀 만한 가치는 없다고 여긴다.
따라서 고통이나 위험은 그 자체로는 물론이고 실질적인 위협을 가하는 동안에는 그 어떤 쾌감도 줄 수 없다. 고통을 그 자체로 즐길 수는 없을뿐더러 몸으로는 크나큰 위험을 겪으면서도 속으로는 다른 무언가를 생각하며 쾌감을 느끼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따라서 버크의 논의에서 숭고의 쾌, “유적”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위험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고통이 “어느 정도 완화되”어야만 한다. 위험과 고통을 실제로 겪을 때가 아니라 안전한 거리를 확보하고서야 비로소 숭고를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거리를 둔다고 해서 공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 위협은 언제든 실제로 덮쳐올 수 있는 것이기에 우리는 멀리서도 공포를 느끼며, 강력한 공포가 일으키는 마음의 동요는 유적, 즉 (거리를 둠으로써 얻어진) 고통의 감소에 따른 간접적인 쾌와 함께 숭고라는 감정으로 변모한다.
코앞에서 거대한 파도가 치면 언제든 휩쓸려 갈 수 있다는 공포에 압도되어 도망을 가겠지만 적당히 떨어진 곳에서는 파도의 힘이나 웅장함 또한 감상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 혹은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일은 그저 생명에의 위협으로 느껴질 뿐이지만 낙하산을 메고 스카이다이빙을 한다면 공포와 함께 즐거움 또한 느낄 수 있는 것 등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금 더 복잡한 사태 또한 생각해 볼 수 있다. 자신은 목숨을 잃더라도 물에 빠진 사람의 목숨을 구하기로 결심하고 파도에 뛰어든 사람이 그를 구하는 데에 성공했고, 이제 힘이 빠져 자신의 안위는 장담할 수 없는 지경이지만 안도감과 뿌듯함 같은 긍정적인 감정들을 느끼는 상황을 가정해 보자. 물론 이것은 파도가 가하는 위협과 그로부터의 안전에서 곧장 비롯되는 것은 아니지만, 고통스러운 죽음의 공포에 비하면 아무리 값진 삶도 의미가 없으며 직면한 고통은 아무런 유적도 주지 못한다는 이 논의의 기본 구도에 균열을 내는 사례가 될 수 있다.
키워드
미학, 버크, 숭고, 아름다움, 자연미
전후맥락
이 책은 호기심에서부터 고독, 공감, 야망 등에 이르는 여러 가지 정념의 종류에 대한 개략적인 고찰, 숭고의 근원, 미의 근원, 감각의 효과, 언어와 정념의 관계를 다루는 다섯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버크는 가장 원초적인 감정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호기심에서 출발해 단순한 고통과 쾌, 쾌의 감소로서의 고통과 고통의 감소로서와 쾌 … 같은 식으로 논의를 쌓아 나간다. 발췌문은 책의 첫 번째 부분에서 숭고의 경험을 개관하는 대목이다.
앞에서 버크는 우선 쾌와 고통에 있어 “적극적이고(positive) 독립적인 성격의 쾌와 고통”과 고통이나 쾌가 줄어들 때 생겨나는 상대적인 쾌감/불쾌감을 구분한다. 그중에서도 고통이 줄어들 때 느껴지는 상대적인 쾌, “많은 경우에 쾌적하지만 본성상 적극적인 쾌와는 전혀 다른” 감정을 가리켜 “유적(delight)”이라 칭한다. 또한 이어서 어느 정도 이상의 강도를 갖는 관념은 대부분 고통이나 쾌 혹은 그 완화, 그리고 자기보존과 사회라는 양축으로 환원된다고 지적하는데, 숭고는 고통의 완화에서 비롯되는 유적의, 그리고 자기보존과 연관되는 감정의 가장 강력한 사례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제목의 순서와 마찬가지로 숭고보다 조금 뒤에서 처음 언급되며, 숭고와 달리 사회와 연관되는 감정으로 제시된다.
고전본문
어떤 식으로든 고통과 위험의 관념을 촉발하는 데에 적합한 것, 어떤 식으로든 공포스러운 것 혹은 공포와 유사한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은 무엇이든 숭고의 원천이다. 다시 말해, 정신이 느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감정을 생산한다. 가장 강력한 감정이라고 한 것은 고통의 관념들이 쾌(pleasure) 쪽에 들어가는 것들보다 훨씬 더 강력하기 때문이다. 의심의 여지 없이, 우리가 겪게 되는 괴로움들이 몸과 정신에 미치는 영향은, 최상의 식견이나 더없이 생생한 상상력을 갖춘 쾌락주의자가 말할 수 있을 그 어떤 쾌보다도, 가장 건강하고 감각이 예민한 몸이 즐길 수 있을 쾌보다도 훨씬 크다. 아닌 게 아니라, 지난번의 안타까운 프랑스 국왕 시해 미수 사건에 대해 법원이 내린 몇 시간에 걸친 [공개 처형이라는] 괴로움을 겪는 대가를 치르면서까지 더없이 완벽하게 만족스러운 삶을 택할 사람이 있을지는 심히 의심스럽다. 그런데, 고통이 쾌보다 강력하게 작동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죽음은 일반적으로 고통보다 훨씬 큰 충격을 준다. 아무리 격렬한 고통이라 해도 죽음보다는 낫다고 여겨지지 않는 고통은 거의 없으니 말이다. 애초에, 감히 말하자면, 고통이 고통스러운 것은 그것이 이 [죽음이라는] 공포의 왕의 사자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위험이나 고통은 너무 가까이에서 압박을 가할 때는 아무런 유적도 주지 못하며 그저 공포스러울 뿐이다. 하지만 어느 정도 거리를 두면, 그리고 어느 정도 완화되면,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듯 위험이나 고통은 유적을 줄 수 있으며 실제로 그리한다.
[출전] 버크, 『숭고와 미의 기원에 관한 철학적 탐구』제1부
토론하기
(1) 위험이나 고통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면 유적, 즉 모종의 쾌를 경험할 수 있다는 말의 의미를 실제 사례를 들어 생각해 보자.
(2) “위험이나 고통은 너무 가까이에서 압박을 가할 때는 아무런 유적도 주지 못하며 그저 공포스러울 뿐”이라는 말의 반례를 생각해 보자.
(3) 고통과 위험의 관념을 촉발하는 대상 앞에서 “유적” 이외의 쾌를 느낄 수 있는 경우가 있을지 생각해 보자.
해설읽기
여기서 버크는 숭고의 원천으로 고통과 위험, 그에 대한 공포를 지목한다. 그가 보기에 이런 것들은 우리에게 쾌보다 훨씬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데, 이런 것들은 궁극적으로 죽음에 대한 공포, 바꾸어 말하자면 자기보존이라는 근본 욕구와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면에서 완벽한 삶, 즉 우리가 꿈꿀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이라도 특히 고통스러운 죽음과 맞바꿀 만한 가치는 없다고 여긴다.
따라서 고통이나 위험은 그 자체로는 물론이고 실질적인 위협을 가하는 동안에는 그 어떤 쾌감도 줄 수 없다. 고통을 그 자체로 즐길 수는 없을뿐더러 몸으로는 크나큰 위험을 겪으면서도 속으로는 다른 무언가를 생각하며 쾌감을 느끼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따라서 버크의 논의에서 숭고의 쾌, “유적”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위험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고통이 “어느 정도 완화되”어야만 한다. 위험과 고통을 실제로 겪을 때가 아니라 안전한 거리를 확보하고서야 비로소 숭고를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거리를 둔다고 해서 공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 위협은 언제든 실제로 덮쳐올 수 있는 것이기에 우리는 멀리서도 공포를 느끼며, 강력한 공포가 일으키는 마음의 동요는 유적, 즉 (거리를 둠으로써 얻어진) 고통의 감소에 따른 간접적인 쾌와 함께 숭고라는 감정으로 변모한다.
코앞에서 거대한 파도가 치면 언제든 휩쓸려 갈 수 있다는 공포에 압도되어 도망을 가겠지만 적당히 떨어진 곳에서는 파도의 힘이나 웅장함 또한 감상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 혹은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일은 그저 생명에의 위협으로 느껴질 뿐이지만 낙하산을 메고 스카이다이빙을 한다면 공포와 함께 즐거움 또한 느낄 수 있는 것 등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금 더 복잡한 사태 또한 생각해 볼 수 있다. 자신은 목숨을 잃더라도 물에 빠진 사람의 목숨을 구하기로 결심하고 파도에 뛰어든 사람이 그를 구하는 데에 성공했고, 이제 힘이 빠져 자신의 안위는 장담할 수 없는 지경이지만 안도감과 뿌듯함 같은 긍정적인 감정들을 느끼는 상황을 가정해 보자. 물론 이것은 파도가 가하는 위협과 그로부터의 안전에서 곧장 비롯되는 것은 아니지만, 고통스러운 죽음의 공포에 비하면 아무리 값진 삶도 의미가 없으며 직면한 고통은 아무런 유적도 주지 못한다는 이 논의의 기본 구도에 균열을 내는 사례가 될 수 있다.
키워드
미학, 버크, 숭고, 아름다움, 자연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