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맥락
칸트의 숭고론은 『판단력 비판』 제1부 “미적 판단력 비판”의 제2장에서 제시된다. 분량이나 위치상, 그리고 아름다움과 달리 숭고는 간접적이고 소극적인 쾌감이라는 점에서 숭고론은 칸트 미학의 부록 같은 인상을 주기도 하지만 칸트 철학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를 담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칸트가 말하는 숭고란 대상의 속성이 아니라 결국 인간 자신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칸트는 먼저 대상의 형식과 인간의 인식 능력이 조화를 이루는 데서 생겨나는 아름다움의 쾌감을 논의한 후 반대로 몰형식적이고 무한정한 대상, 인간의 인식 능력을 넘어서는 대상에서 비롯되는 쾌로서의 숭고를 논의한다. 인간의 인식 능력, 구체적으로 대상의 모습을 정신 속에 그려내는 상상력은 광활한 바다나 드높은 산과 같이 크나큰 대상은 충분히 파악하거나 기억해 재구성하지 못하고 좌절한다. 그러나 이윽고 인간은 자신이 비록 그런 커다란 사물 앞에서 무력하다 할지라도 그보다도 더 큰 것, 무한성이나 절대성 같은 것들을 사유할 수 있음을 깨닫고 모종의 기쁨을 느낀다. 자연 앞에서 인간은 작고 무능할 뿐이라는 좌절감에서 이성이 있다는 기쁨으로 전환되는 이것이 바로 칸트가 말하는 숭고이다.
이처럼 커다란 대상을 통해 촉발되는 것은 수학적 숭고, 목숨을 위협할 정도로 강력하거나 그런 힘을 떠오르게 하는 대상을 통해 촉발되는 것은 역학적 숭고로 구분한다. 아래 발췌문은 역학적 숭고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가져온 것으로, 무시무시한 자연의 파괴력으로도 해할 수 없는 인간 이성의 힘을 깨달음으로써 숭고를 느끼는 과정을 보여준다.
고전본문
두려우리만치 험준하게 솟아오른 바위. 천둥번개를 일으키는 짙은 먹구름. 무시무시한 파괴력의 화산. 모든 것을 휩쓸며 지나가는 폭풍. 요동치는 끝없는 바다. 커다란 강 끝의 높다란 폭포. 이런 것들은 우리의 저항하는 힘을 그 위력에 비추어 볼 때 하찮을 정도로 작아 보이게 한다. 하지만 우리가 안전한 곳에 있기만 하면, 더 두려운 것일수록 그 광경이 더 매력적이어진다. 우리는 그런 대상을 기꺼이 숭고하다고 부르는데, 이는 그것이 영혼의 힘을 평소보다 높이 고양시키고 우리 속에서 전혀 다른 종류의 저항하는 힘을 찾아내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전능해 보이는 자연의 힘에 비추어 스스로를 측량해 볼 용기를 내게 한다.
이제 우리는, 자연의 광대함 속에서, 그리고 우리의 능력으로는 그 영역의 거대함을 감성으로 평가하기에 적절한 기준을 세울 수 없다는 우리의 부족함 속에서 스스로의 한계를 보게 된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자신의 이성 능력 속에서 다른 종류의, 비감각적인 기준, 무한성 자체를 단위로 삼기에 그에 비하면 자연의 모든 것이 작아지고 마는 그런 기준을 발견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의 정신이 그 어떤 광대한 자연보다도 우월함을 알게 된다. 또한 도무지 저항할 수 없는 자연의 위력은, 자연에 속하는 존재인 우리 자신의 무력함을 인식하게 하면서도, 우리에게 자연과는 독립적이며 자연보다 우월한 판단 능력을 발견케 한다. 그 능력은 외적 자연이 공격하고 위험에 처하게 할 수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자기보존의 토대가 된다. 즉, 우리가 압도적인 힘의 지배에 굴복할 수는 있을지언정, 우리 인격 속의 인간성은 굴욕당하지 않는다. 이렇게 볼 때, 자연이 우리의 감성적 판단에서 숭고하다는 판정을 받는 것은 공포를 일으키기 때문이 아니라 (자연이 아닌) 우리 속의 힘을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재산, 건강, 생명같이) 우리가 염려하는 것들을 사소하게 여기게 하는 힘, (그런 면에서 의심의 여지 없이 우리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자연의 위력도 최고의 근본 원칙을 고수할 것인가 버릴 것인가가 문제 될 때에 우리 자신이나 우리의 인격이 굴복할 수밖에 없는 힘은 전혀 아니라고 여기게 하는 힘 말이다. 따라서 여기서 자연이 숭고하다고 불리는 것은 [정말로 자연 그 자체가 숭고해서가 아니라] 그저 우리의 정신이 자신의 고유한 숭고성을 느낄 수 있게 하는 사례들을 현시할 수 있도록 상상력을 고양시키기 때문이다.
[출처] 칸트, 『판단력 비판』
토론하기
(1) 지문의 내용을 읽고 자연에 대한 공포가 숭고라는 쾌감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정리해 보자.
(2) 숭고의 경험을 통해 새삼 확인하게 되는 이성의 가치를 자연에 대한 우월성과 자율적인 도덕성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보자.
(3) 사회 제도나 첨단 기술 등 인간의 이성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지만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며 인간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는 강력한 힘과 관련해서 숭고 개념이 가질 수 있는 의미를 생각해 보자.
해설읽기
여기서 칸트는 숭고를 단순히 강력한 자연의 힘에 대한 감탄이나 그 위협에서 벗어나는 안도감이 아니라 그 아무리 강력한 힘이라도 결코 해할 수 없는 우리 내면의 힘, 즉 이성의 힘을 확인하면서 생겨나는 쾌감으로 설명한다. 궁극적으로 말하자면 숭고한 것은 자연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 인간 자신인 것이다.
“두려우리만치 험준하게 솟아오른 바위. 천둥번개를 일으키는 짙은 먹구름. 무시무시한 파괴력의 화산. 모든 것을 휩쓸며 지나가는 폭풍. 요동치는 끝없는 바다. 커다란 강 끝의 높다란 폭포” 같이 자연의 힘을 보여주는 대상들 앞에서 우리 스스로가 하찮게 느껴지고 두려움이 드는 것은 인간에게 생명을 유지하고 고통을 피하고자 하는 자기보존 본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본능이, 그리고 그것을 추구하는 데 쓸 완력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자연의 위력을 이길 수는 없다. 이 구도에서는 기껏해야 일시적으로 위험을 피하는 안도감만이 가능하지만, 칸트는 “전혀 다른 종류의 자기보존”으로, “우리가 압도적인 힘의 지배에 굴복할 수는 있을지언정, 우리 인격 속의 인간성은 굴욕당하지 않는다”라는 사실로 시선을 돌린다.
여기서 말하는 인간성 즉 인간 고유의 특성이 바로 이성이다. 자연의 위력은 우리의 몸에 상처를 입히거나 우리 목숨을 앗아갈 수는 있지만 진정으로 우리의 생각을 꺾을 수는 없다. 마음만 먹는다면 우리는 죽음을 각오하고도 정의와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존재, 이성과 도덕의 존재라는 깨달음에서 숭고라는 감정이 생겨난다.
이런 구도에서 숭고는 자연의 위협이든 혹은 다른 인간의 위협이든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법칙을 준수하며 살 수 있는 인간의 도덕적 지위를 확인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재산, 건강, 생명” 같은 일차적 자기보존에 복무하는 것들에 대한 관심에 구속되지 않는, 이성의 자유를 갖는 존재로서의 지위 말이다.
칸트는 이를 두고 “우리의 정신이 그 어떤 광대한 자연보다도 우월”하다고 표현했다. 그런데 이런 자신감이 근현대 역사에서 도덕의 영역에 머물지 않고 과학기술을 위시한 도구적 이성의 영역에서까지 펼쳐지면서 발생한 문제들이 있다. 이성이 자연의 지배를 받지 않는 것을 넘어 자연을 지배하고 파괴하는 데로 나아가게 된 것이다.
또한 이성을 사용해 만들어 낸 것들이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 과거에 자연이 그랬던 것만큼이나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경우, 또 다른 복잡한 문제가 제기된다. 예컨대 부정의를 강요하는 독재 정부의 힘 앞에서 위와 같은 숭고의 구도는 한편으로는 정권의 강압에 굴하지 않는 이성의 힘을 확인하고 새로운 사회를 추구하는 힘을 주지만 기존의 제도 또한 인간의 이성이 만들어 낸 것인 한 그 책임에 대해서도, 똑같은 이성이 새로 만들어 낼 사회에 대해서도 별개의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이성이 파괴한 자연이 다시금 인간에게 위협이 되는 기후 위기 같은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의 것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키워드
도덕, 숭고, 아름다움, 이성, 칸트
전후맥락
칸트의 숭고론은 『판단력 비판』 제1부 “미적 판단력 비판”의 제2장에서 제시된다. 분량이나 위치상, 그리고 아름다움과 달리 숭고는 간접적이고 소극적인 쾌감이라는 점에서 숭고론은 칸트 미학의 부록 같은 인상을 주기도 하지만 칸트 철학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를 담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칸트가 말하는 숭고란 대상의 속성이 아니라 결국 인간 자신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칸트는 먼저 대상의 형식과 인간의 인식 능력이 조화를 이루는 데서 생겨나는 아름다움의 쾌감을 논의한 후 반대로 몰형식적이고 무한정한 대상, 인간의 인식 능력을 넘어서는 대상에서 비롯되는 쾌로서의 숭고를 논의한다. 인간의 인식 능력, 구체적으로 대상의 모습을 정신 속에 그려내는 상상력은 광활한 바다나 드높은 산과 같이 크나큰 대상은 충분히 파악하거나 기억해 재구성하지 못하고 좌절한다. 그러나 이윽고 인간은 자신이 비록 그런 커다란 사물 앞에서 무력하다 할지라도 그보다도 더 큰 것, 무한성이나 절대성 같은 것들을 사유할 수 있음을 깨닫고 모종의 기쁨을 느낀다. 자연 앞에서 인간은 작고 무능할 뿐이라는 좌절감에서 이성이 있다는 기쁨으로 전환되는 이것이 바로 칸트가 말하는 숭고이다.
이처럼 커다란 대상을 통해 촉발되는 것은 수학적 숭고, 목숨을 위협할 정도로 강력하거나 그런 힘을 떠오르게 하는 대상을 통해 촉발되는 것은 역학적 숭고로 구분한다. 아래 발췌문은 역학적 숭고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가져온 것으로, 무시무시한 자연의 파괴력으로도 해할 수 없는 인간 이성의 힘을 깨달음으로써 숭고를 느끼는 과정을 보여준다.
고전본문
두려우리만치 험준하게 솟아오른 바위. 천둥번개를 일으키는 짙은 먹구름. 무시무시한 파괴력의 화산. 모든 것을 휩쓸며 지나가는 폭풍. 요동치는 끝없는 바다. 커다란 강 끝의 높다란 폭포. 이런 것들은 우리의 저항하는 힘을 그 위력에 비추어 볼 때 하찮을 정도로 작아 보이게 한다. 하지만 우리가 안전한 곳에 있기만 하면, 더 두려운 것일수록 그 광경이 더 매력적이어진다. 우리는 그런 대상을 기꺼이 숭고하다고 부르는데, 이는 그것이 영혼의 힘을 평소보다 높이 고양시키고 우리 속에서 전혀 다른 종류의 저항하는 힘을 찾아내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전능해 보이는 자연의 힘에 비추어 스스로를 측량해 볼 용기를 내게 한다.
이제 우리는, 자연의 광대함 속에서, 그리고 우리의 능력으로는 그 영역의 거대함을 감성으로 평가하기에 적절한 기준을 세울 수 없다는 우리의 부족함 속에서 스스로의 한계를 보게 된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자신의 이성 능력 속에서 다른 종류의, 비감각적인 기준, 무한성 자체를 단위로 삼기에 그에 비하면 자연의 모든 것이 작아지고 마는 그런 기준을 발견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의 정신이 그 어떤 광대한 자연보다도 우월함을 알게 된다. 또한 도무지 저항할 수 없는 자연의 위력은, 자연에 속하는 존재인 우리 자신의 무력함을 인식하게 하면서도, 우리에게 자연과는 독립적이며 자연보다 우월한 판단 능력을 발견케 한다. 그 능력은 외적 자연이 공격하고 위험에 처하게 할 수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자기보존의 토대가 된다. 즉, 우리가 압도적인 힘의 지배에 굴복할 수는 있을지언정, 우리 인격 속의 인간성은 굴욕당하지 않는다. 이렇게 볼 때, 자연이 우리의 감성적 판단에서 숭고하다는 판정을 받는 것은 공포를 일으키기 때문이 아니라 (자연이 아닌) 우리 속의 힘을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재산, 건강, 생명같이) 우리가 염려하는 것들을 사소하게 여기게 하는 힘, (그런 면에서 의심의 여지 없이 우리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자연의 위력도 최고의 근본 원칙을 고수할 것인가 버릴 것인가가 문제 될 때에 우리 자신이나 우리의 인격이 굴복할 수밖에 없는 힘은 전혀 아니라고 여기게 하는 힘 말이다. 따라서 여기서 자연이 숭고하다고 불리는 것은 [정말로 자연 그 자체가 숭고해서가 아니라] 그저 우리의 정신이 자신의 고유한 숭고성을 느낄 수 있게 하는 사례들을 현시할 수 있도록 상상력을 고양시키기 때문이다.
[출처] 칸트, 『판단력 비판』
토론하기
(1) 지문의 내용을 읽고 자연에 대한 공포가 숭고라는 쾌감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정리해 보자.
(2) 숭고의 경험을 통해 새삼 확인하게 되는 이성의 가치를 자연에 대한 우월성과 자율적인 도덕성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보자.
(3) 사회 제도나 첨단 기술 등 인간의 이성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지만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며 인간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는 강력한 힘과 관련해서 숭고 개념이 가질 수 있는 의미를 생각해 보자.
해설읽기
여기서 칸트는 숭고를 단순히 강력한 자연의 힘에 대한 감탄이나 그 위협에서 벗어나는 안도감이 아니라 그 아무리 강력한 힘이라도 결코 해할 수 없는 우리 내면의 힘, 즉 이성의 힘을 확인하면서 생겨나는 쾌감으로 설명한다. 궁극적으로 말하자면 숭고한 것은 자연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 인간 자신인 것이다.
“두려우리만치 험준하게 솟아오른 바위. 천둥번개를 일으키는 짙은 먹구름. 무시무시한 파괴력의 화산. 모든 것을 휩쓸며 지나가는 폭풍. 요동치는 끝없는 바다. 커다란 강 끝의 높다란 폭포” 같이 자연의 힘을 보여주는 대상들 앞에서 우리 스스로가 하찮게 느껴지고 두려움이 드는 것은 인간에게 생명을 유지하고 고통을 피하고자 하는 자기보존 본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본능이, 그리고 그것을 추구하는 데 쓸 완력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자연의 위력을 이길 수는 없다. 이 구도에서는 기껏해야 일시적으로 위험을 피하는 안도감만이 가능하지만, 칸트는 “전혀 다른 종류의 자기보존”으로, “우리가 압도적인 힘의 지배에 굴복할 수는 있을지언정, 우리 인격 속의 인간성은 굴욕당하지 않는다”라는 사실로 시선을 돌린다.
여기서 말하는 인간성 즉 인간 고유의 특성이 바로 이성이다. 자연의 위력은 우리의 몸에 상처를 입히거나 우리 목숨을 앗아갈 수는 있지만 진정으로 우리의 생각을 꺾을 수는 없다. 마음만 먹는다면 우리는 죽음을 각오하고도 정의와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존재, 이성과 도덕의 존재라는 깨달음에서 숭고라는 감정이 생겨난다.
이런 구도에서 숭고는 자연의 위협이든 혹은 다른 인간의 위협이든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법칙을 준수하며 살 수 있는 인간의 도덕적 지위를 확인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재산, 건강, 생명” 같은 일차적 자기보존에 복무하는 것들에 대한 관심에 구속되지 않는, 이성의 자유를 갖는 존재로서의 지위 말이다.
칸트는 이를 두고 “우리의 정신이 그 어떤 광대한 자연보다도 우월”하다고 표현했다. 그런데 이런 자신감이 근현대 역사에서 도덕의 영역에 머물지 않고 과학기술을 위시한 도구적 이성의 영역에서까지 펼쳐지면서 발생한 문제들이 있다. 이성이 자연의 지배를 받지 않는 것을 넘어 자연을 지배하고 파괴하는 데로 나아가게 된 것이다.
또한 이성을 사용해 만들어 낸 것들이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 과거에 자연이 그랬던 것만큼이나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경우, 또 다른 복잡한 문제가 제기된다. 예컨대 부정의를 강요하는 독재 정부의 힘 앞에서 위와 같은 숭고의 구도는 한편으로는 정권의 강압에 굴하지 않는 이성의 힘을 확인하고 새로운 사회를 추구하는 힘을 주지만 기존의 제도 또한 인간의 이성이 만들어 낸 것인 한 그 책임에 대해서도, 똑같은 이성이 새로 만들어 낼 사회에 대해서도 별개의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이성이 파괴한 자연이 다시금 인간에게 위협이 되는 기후 위기 같은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의 것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키워드
도덕, 숭고, 아름다움, 이성, 칸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