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맥락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쇼펜하우어는 우리가 아는 세계는 모두 표상 즉 우리의 주관적 인식이며, 그 너머 진짜 세계의 근원에는 맹목적인 의지가 있다고 보았다. 여기서 의지란 단순히 인간의 의지만이 아니라 모든 유기체의 생명력은 물론 무생물의 물리적인 힘까지 포함하는 개념이다. 인간의 경우 끊임없는 욕망과 생존의 몸부림으로 나타나는 이 의지는 만족을 모르기에 삶을 그 자체 고통으로 만든다. 욕망을 충족시켜 행복해질 수는 없는 이 삶에서, 우리에게는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아무런 이해관계를 따지지 않고 아름다움을 느끼는 미적 관조를 통해 잠시나마 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보다 의식적인 수행을 통해 욕망을 부정하고 의지를 잠재워 평온을 얻는 것이다.
따라서 이 책에서 미와 숭고에 대한 논의는 큰 중요성을 가지며 앞부분에 배치된다. 근대 미학에서 대개 미와 숭고를 서로 다른 원리를 갖는 감정으로 다루는 데 반해 쇼펜하우어는 둘 사이에 단계적인 차이만이 있는 것으로 본다. 대상이 얼마나 위협적인지에 따라 비교적 쉽게 관조에 이를 수 있는 미와 의식적인 투쟁을 요하는 숭고로 구분하는 것이다. 이는 미와 숭고 모두 결국 의지를 억제하고 평온으로 나아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는 우리가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를 상기시키는 풍경에서 비롯되는 역학적 숭고와 우리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를 상기시키는 풍경에서 비롯되는 수학적 숭고를 구분하는데, 아래 지문은 역학적 숭고를 논하는 부분의 마지막에 해당한다. 그는 그 자체로 크게 위협적이지는 않지만 생명력과 온기의 부재를 상기시키는 쓸쓸한 풍경에서 시작해 조금씩 강도를 높여가며 논의를 전개해 아래 대목에서 아무런 생명의 흔적도 찾을 수 없는 사막, 나아가 직접적인 위협을 가하는 폭풍 등을 다룬다.
고전본문
그러나 초목조차 없이 오직 바윗덩이만 늘어서 있는 광경을 생각해 보자. 존재에 필수적인 유기체가 전혀 없기에 의지는 곧장 불편해진다. 사막은 끔찍한 곳이고, 우리는 더더욱 비탄에 잠긴다. 순수한 인식의 상태로 고양되려면 우리 자신이 의지의 관심과 더 온전히 멀어져야 한다. 우리가 계속해서 순수한 인식의 상태에 머물러야 숭고의 감각이 뚜렷해진다.
다음과 같은 상황은 이런 느낌을 한층 더 높일 수도 있다. 폭풍에 휘청거리는 자연, 위협적인 먹구름으로 어둑해진 하늘, 풀 한 포기 없이 그저 높이 솟아 시야를 완전히 가리는 거대한 절벽, 포말을 일으키며 내달리는 급류, 광활한 사막, 바위틈에서 울부짖은 바람 소리 같은 것들 말이다. 우리의 의존성, 적대적인 자연과의 불화, 싸움 속에 꺾이는 우리의 의지가 이제 눈에 보이게 된다. 하지만 개인적인 곤경에 지지 않고 미적 관조를 이어가면, 순수한 인식 주체의 흔들림 없고 무심한 응시는 자연의 불화와 꺾인 의지의 모습을 꿰뚫어 보고 의지에게는 위협이자 공포인 대상들에서까지도 그 이념을 파악한다. 숭고의 감각은 이 같은 대비 속에 존재한다.
그런데 세차게 떨어지는 폭포 소리에 묻혀 우리 자신의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때 같이 격렬한 자연의 싸움을 눈앞에서 마주하면, 혹은 바다에 나가 태산 같은 파도가 세차게 절벽을 때리고 하늘 높이 물보라를 뿌리는 거센 풍랑을 만나면, 그런 인상이 한층 더 강력해진다. 폭풍이 울부짖고 바다가 들끓고 먹구름에서 번개가 내리치고 천둥소리가 폭풍과 바다의 소리를 집어삼키는 그런 곳에서는, 의연한 관찰자의 속에서 그의 의식의 이중적인 성격이 최고도로 선명히 구분된다. 그는 한편으로는 자신을 개별자로, 이런 힘들이 살짝만 스쳐도 완전히 파괴되어버릴, 강력한 자연 앞에서 아무런 힘도 없고 그저 의존적인, 의지의 허약한 [불변하는 본질이 아닌] 현상으로, 세계에 미약한 영향조차 미치지 못하고 그저 당하는 자로, 거대한 위력이 닥쳐오면 스러져 버릴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느낀다. 다른 한편으로는 영원한, 온화한, 인식의 주체로, 대상의 존재 조건으로, 따라서 온 세계를 떠받치는 자로 느낀다. 자연의 무시무시한 불화는 그저 그의 관념일 뿐이며 고요히 이념을 파악하는 주체 자신은 그 어떤 욕망과 필요에도 묶이지 않아 자유롭다. 이것이 숭고의 완전한 인상 ― 개체의 파멸을 위협하는, 개체에 비길 수 없이 월등한 힘을 볼 때 생기는 인상이다.
[출처]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토론하기
(1) 윗글에서 의지와 인식의 관계를 이해해 보자.
(2) 위에서 제시되는 숭고의 경험이 도덕적 함의를 가질 수 있을지 생각해 보자.
(3) 위와 같은 내적 투쟁을 통해 의지를 잠재우고 삶의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것이 현실의 삶에서 궁극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지 생각해 보자.
해설읽기
여기서 쇼펜하우어는 눈앞의 광경이 가하는 위협의 강도를 조금씩 높여가며 “숭고의 완전한 인상”을 서술하는 데로 나아간다. 그에게 있어 숭고는 다른 근대 철학자들에게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대상이 관찰자의 생명에 가하는 위협에서 비롯되지만, 그 위협에서 벗어남으로써 혹은 그것에 위협당하지 않는 자신의 일부를 발견함으로써 얻어지는 쾌는 아니다. “폭풍이 울부짖고 바다가 들끓고 먹구름에서 번개가 내리치고 천둥소리가 폭풍과 바다의 소리를 집어삼키는 그런 곳에서는, 의연한 관찰자의 속에서 그의 의식의 이중적인 성격이 최고도로 선명히 구분”된다는 말에서 드러나듯, 숭고는 오히려 직면한 위협 앞에서도 그것을 벗어나 생명을 보존하고자 하는 의지를 잠재우는 의식적인 수행을 통해 의지의 차원에서 인식의 차원으로 넘어감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다.
쇼펜하우어 철학에서 ‘인식’에는 여러 층위가 있지만 여기서 인식은 세계의 내용을 속속들이 알거나 세계에 대한 인간의 우월성을 아는 것이라기보다는 세계 혹은 세계가 우리에게 미치는 힘이 오로지 우리의 의식 속에서만 존재함을 아는 것에 가깝다. 거대한 위력 앞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하찮은 존재이지만, 역으로 그 위력 또한 우리의 의식 속에 존재하는 아무것도 아닌 하찮은 것임을 아는 ― 그리하여 그 위력에 맞서고자 하지만 결코 온전히 성공하지 못하는 생에의 의지를 잠재우는 ― 과정에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숭고이다.
이런 면에서 숭고의 경험은 금욕주의적인 수행이라고 할 수 있으며, 삶의 다른 영역에도 영향을 미친다. 예컨대, 흉포한 자연의 위협 앞에서도 의지를 잠재우고 사태를 관조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일상에서도 자신이나 타인의 욕구에 휘둘리지 않고 물러서서 침착하게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숭고의 경험은 의지의 힘에 휘둘려 경솔한 행동을 하거나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도덕적인 판단을 내리는 훈련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쇼펜하우어가 추구하는 것이 단순히 일시적인 숭고의 경험이 아니라 의지의 궁극적인 부정이라는 점에서 추가적인 문제가 제기된다. 의지를 끝끝내 부정한다면 과연 어떤 판단을 내릴 수 있을까? 애초에 이 세계가 중요하지 않은데 무엇이든 판단을 내리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을까? 특정한 의지가 아니라 생에의 의지 전부를 부정한다는 점에서 이 구도에는 결국 생에 대한 부정밖에는 남지 않을 위험이 있다. 실제로 니체는 이성 중심의 철학 전통을 탈피한 점에서는 쇼펜하우어를 높이 샀지만 그의 금욕주의적 관점이 결국은 “무無에의 의지”로 이어진다는 점을 강력히 비판하고 오히려 삶을 긍정할 길을 찾는 논의를 전개했다.
키워드
관조, 금욕, 숭고, 욕망, 의지, 쇼펜하우어
전후맥락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쇼펜하우어는 우리가 아는 세계는 모두 표상 즉 우리의 주관적 인식이며, 그 너머 진짜 세계의 근원에는 맹목적인 의지가 있다고 보았다. 여기서 의지란 단순히 인간의 의지만이 아니라 모든 유기체의 생명력은 물론 무생물의 물리적인 힘까지 포함하는 개념이다. 인간의 경우 끊임없는 욕망과 생존의 몸부림으로 나타나는 이 의지는 만족을 모르기에 삶을 그 자체 고통으로 만든다. 욕망을 충족시켜 행복해질 수는 없는 이 삶에서, 우리에게는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아무런 이해관계를 따지지 않고 아름다움을 느끼는 미적 관조를 통해 잠시나마 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보다 의식적인 수행을 통해 욕망을 부정하고 의지를 잠재워 평온을 얻는 것이다.
따라서 이 책에서 미와 숭고에 대한 논의는 큰 중요성을 가지며 앞부분에 배치된다. 근대 미학에서 대개 미와 숭고를 서로 다른 원리를 갖는 감정으로 다루는 데 반해 쇼펜하우어는 둘 사이에 단계적인 차이만이 있는 것으로 본다. 대상이 얼마나 위협적인지에 따라 비교적 쉽게 관조에 이를 수 있는 미와 의식적인 투쟁을 요하는 숭고로 구분하는 것이다. 이는 미와 숭고 모두 결국 의지를 억제하고 평온으로 나아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는 우리가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를 상기시키는 풍경에서 비롯되는 역학적 숭고와 우리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를 상기시키는 풍경에서 비롯되는 수학적 숭고를 구분하는데, 아래 지문은 역학적 숭고를 논하는 부분의 마지막에 해당한다. 그는 그 자체로 크게 위협적이지는 않지만 생명력과 온기의 부재를 상기시키는 쓸쓸한 풍경에서 시작해 조금씩 강도를 높여가며 논의를 전개해 아래 대목에서 아무런 생명의 흔적도 찾을 수 없는 사막, 나아가 직접적인 위협을 가하는 폭풍 등을 다룬다.
고전본문
그러나 초목조차 없이 오직 바윗덩이만 늘어서 있는 광경을 생각해 보자. 존재에 필수적인 유기체가 전혀 없기에 의지는 곧장 불편해진다. 사막은 끔찍한 곳이고, 우리는 더더욱 비탄에 잠긴다. 순수한 인식의 상태로 고양되려면 우리 자신이 의지의 관심과 더 온전히 멀어져야 한다. 우리가 계속해서 순수한 인식의 상태에 머물러야 숭고의 감각이 뚜렷해진다.
다음과 같은 상황은 이런 느낌을 한층 더 높일 수도 있다. 폭풍에 휘청거리는 자연, 위협적인 먹구름으로 어둑해진 하늘, 풀 한 포기 없이 그저 높이 솟아 시야를 완전히 가리는 거대한 절벽, 포말을 일으키며 내달리는 급류, 광활한 사막, 바위틈에서 울부짖은 바람 소리 같은 것들 말이다. 우리의 의존성, 적대적인 자연과의 불화, 싸움 속에 꺾이는 우리의 의지가 이제 눈에 보이게 된다. 하지만 개인적인 곤경에 지지 않고 미적 관조를 이어가면, 순수한 인식 주체의 흔들림 없고 무심한 응시는 자연의 불화와 꺾인 의지의 모습을 꿰뚫어 보고 의지에게는 위협이자 공포인 대상들에서까지도 그 이념을 파악한다. 숭고의 감각은 이 같은 대비 속에 존재한다.
그런데 세차게 떨어지는 폭포 소리에 묻혀 우리 자신의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때 같이 격렬한 자연의 싸움을 눈앞에서 마주하면, 혹은 바다에 나가 태산 같은 파도가 세차게 절벽을 때리고 하늘 높이 물보라를 뿌리는 거센 풍랑을 만나면, 그런 인상이 한층 더 강력해진다. 폭풍이 울부짖고 바다가 들끓고 먹구름에서 번개가 내리치고 천둥소리가 폭풍과 바다의 소리를 집어삼키는 그런 곳에서는, 의연한 관찰자의 속에서 그의 의식의 이중적인 성격이 최고도로 선명히 구분된다. 그는 한편으로는 자신을 개별자로, 이런 힘들이 살짝만 스쳐도 완전히 파괴되어버릴, 강력한 자연 앞에서 아무런 힘도 없고 그저 의존적인, 의지의 허약한 [불변하는 본질이 아닌] 현상으로, 세계에 미약한 영향조차 미치지 못하고 그저 당하는 자로, 거대한 위력이 닥쳐오면 스러져 버릴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느낀다. 다른 한편으로는 영원한, 온화한, 인식의 주체로, 대상의 존재 조건으로, 따라서 온 세계를 떠받치는 자로 느낀다. 자연의 무시무시한 불화는 그저 그의 관념일 뿐이며 고요히 이념을 파악하는 주체 자신은 그 어떤 욕망과 필요에도 묶이지 않아 자유롭다. 이것이 숭고의 완전한 인상 ― 개체의 파멸을 위협하는, 개체에 비길 수 없이 월등한 힘을 볼 때 생기는 인상이다.
[출처]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토론하기
(1) 윗글에서 의지와 인식의 관계를 이해해 보자.
(2) 위에서 제시되는 숭고의 경험이 도덕적 함의를 가질 수 있을지 생각해 보자.
(3) 위와 같은 내적 투쟁을 통해 의지를 잠재우고 삶의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것이 현실의 삶에서 궁극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지 생각해 보자.
해설읽기
여기서 쇼펜하우어는 눈앞의 광경이 가하는 위협의 강도를 조금씩 높여가며 “숭고의 완전한 인상”을 서술하는 데로 나아간다. 그에게 있어 숭고는 다른 근대 철학자들에게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대상이 관찰자의 생명에 가하는 위협에서 비롯되지만, 그 위협에서 벗어남으로써 혹은 그것에 위협당하지 않는 자신의 일부를 발견함으로써 얻어지는 쾌는 아니다. “폭풍이 울부짖고 바다가 들끓고 먹구름에서 번개가 내리치고 천둥소리가 폭풍과 바다의 소리를 집어삼키는 그런 곳에서는, 의연한 관찰자의 속에서 그의 의식의 이중적인 성격이 최고도로 선명히 구분”된다는 말에서 드러나듯, 숭고는 오히려 직면한 위협 앞에서도 그것을 벗어나 생명을 보존하고자 하는 의지를 잠재우는 의식적인 수행을 통해 의지의 차원에서 인식의 차원으로 넘어감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다.
쇼펜하우어 철학에서 ‘인식’에는 여러 층위가 있지만 여기서 인식은 세계의 내용을 속속들이 알거나 세계에 대한 인간의 우월성을 아는 것이라기보다는 세계 혹은 세계가 우리에게 미치는 힘이 오로지 우리의 의식 속에서만 존재함을 아는 것에 가깝다. 거대한 위력 앞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하찮은 존재이지만, 역으로 그 위력 또한 우리의 의식 속에 존재하는 아무것도 아닌 하찮은 것임을 아는 ― 그리하여 그 위력에 맞서고자 하지만 결코 온전히 성공하지 못하는 생에의 의지를 잠재우는 ― 과정에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숭고이다.
이런 면에서 숭고의 경험은 금욕주의적인 수행이라고 할 수 있으며, 삶의 다른 영역에도 영향을 미친다. 예컨대, 흉포한 자연의 위협 앞에서도 의지를 잠재우고 사태를 관조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일상에서도 자신이나 타인의 욕구에 휘둘리지 않고 물러서서 침착하게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숭고의 경험은 의지의 힘에 휘둘려 경솔한 행동을 하거나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도덕적인 판단을 내리는 훈련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쇼펜하우어가 추구하는 것이 단순히 일시적인 숭고의 경험이 아니라 의지의 궁극적인 부정이라는 점에서 추가적인 문제가 제기된다. 의지를 끝끝내 부정한다면 과연 어떤 판단을 내릴 수 있을까? 애초에 이 세계가 중요하지 않은데 무엇이든 판단을 내리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을까? 특정한 의지가 아니라 생에의 의지 전부를 부정한다는 점에서 이 구도에는 결국 생에 대한 부정밖에는 남지 않을 위험이 있다. 실제로 니체는 이성 중심의 철학 전통을 탈피한 점에서는 쇼펜하우어를 높이 샀지만 그의 금욕주의적 관점이 결국은 “무無에의 의지”로 이어진다는 점을 강력히 비판하고 오히려 삶을 긍정할 길을 찾는 논의를 전개했다.
키워드
관조, 금욕, 숭고, 욕망, 의지, 쇼펜하우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