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맥락
아래 지문은 『판단력 비판』의 제1부, “미적 판단력 비판”의 도입부에 등장하는 절이다. 칸트는 취미 판단을* 성격, 양, 관계, 양태의 네 가지 면으로 나누어 논의하는데, 1절에서는 취미 판단은 감성적 판단이라는 기본 성격을 다룬다. 여기서 감성적 판단이라는 것은, 그것이 대상의 인식에 기여하는 논리적 판단이 아니라 오로지 주관의 감정에 대한 판단이라는 뜻이다. 예를 들어 어떤 건물을 볼 때 그 건물이 용도에 부합하는 구조와 강도를 가지고 있는가에 대한 판단은 인식의 차원에서 행해지는 대상의 속성에 대한 판단이지만 그 건물이 아름다운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판단은 그 건물을 보는 주관이 쾌감을 느끼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대한 판단이다.
다음으로 지문으로 제시된 2절에서는 취미 판단에서 비롯되는 만족감은 대상의 현존에 대한 관심과는 무관한 것임을 주장하고, 이어지는 절들에서 대상이 감각적인 쾌에 대한 욕구를 만족시킴으로써 산출되는 (예컨대 단순한 색상이 주는) 쾌, 대상이 (수단으로서 유용한 것이든 그 자체로서 좋은 것이든) 좋음의 개념에 부합하는 데서 산출되는 쾌는 취미 판단과 달리 대상의 현존에 대한 관심과 결합되어 있는 것임을 밝힌다. 이 같은 성격으로부터 도출되는 설명은 다음과 같다. “취미란 대상이나 그 표상방식을 아무런 관심 없이만족이나 불만족을 통해 판단하는 능력이다. 그런 만족을 주는 대상을 아름답다고 칭한다.”
* 취미(趣味)는 독일어 Geschmack을 옮긴 것으로, 기본적인 의미는 입맛, 취향 등이다. ‘맛을 보다’라는 뜻의 동사에서 나온 말이며 영어로는 주로 taste로 번역한다. 여기에서는 아름다움을 감상하고 판정하는 능력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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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본문
§2 취미 판단을 규정하는 만족은 무관심적이다.
어떤 대상의 현존의 표상과 결합되는 만족을 관심이라 칭한다. 그런 만족은 늘 욕구 능력과 연관된다. 욕구 능력을 규정하는 토대로서든, 그 토대와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서든 말이다. 그런데, 어떤 것이 아름다운가 아닌가 하는 문제에 있어 우리가 알고자 하는 것은 우리에게든 다른 누구에게든 그 사물의 현존이 중요한가 혹은 중요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순전히 바라봄에 (직관 혹은 반성함에 있어) 그것을 어떻게 판단하는가 하는 것이다. 누군가 내게 내 앞에 있는 궁전이 아름답다고 여기는지 물으면, 그저 감탄하며 보라고 만든 것은 좋아하지 않는다고 답할 수 있을 것이다. 혹은 파리에서 식당이 제일 마음에 들었다는 이로쿼이족 추장처럼 답할 수도 있겠다. 아니면 루소 식으로 저런 불필요한 것에 인민의 땀을 낭비하는 권세가들의 허영을 질책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내가 만약 다시는 다른 사람을 만날 가망 없이 무인도에서 홀로 살고 있다면, 마법으로 그런 화려한 건물을 지을 수 있다고 한다 해도, 충분히 편안한 오두막 한 채만 있으면 그런 귀찮은 일은 시도조차 하지 않으리라고 쉽게 확신할 수 있다. 이런 말들은 모두 사람들의 승인과 동의를 얻을 수 있겠지만 지금의 화두는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가 알고자 하는 것은 다만, 대상의 순전한 표상이 내가 그것의 실존에 관해서는 아무리 무관심하다 해도 내 안에 만족을 가져오는가 어떤가 하는 것이다. 그것이 아름답다고 말하고 내게 취미가 있음을 보여줌에 있어 내게 중요한 것은 나로 하여금 대상의 실존에 의존하게 하는 무언가가 아니라 그 표상으로부터 내가 내 속에 만들어내는 어떤 것이라는 점은 쉽게 알 수 있다. 미에 관한 판단은, 약간이라도 관심이 섞여 있다면 매우 편파적이며 순전한 취미 판단이 아니라는 점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취미에 있어 판관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사물의 실존에 대해서는 조금도 마음이 기울어서는 아니 되며, 이 점에 있어서 더없이 무관심해야 한다.
그러나, 지극히 중요한 이 명제를 가장 잘 해명하는 방법은 취미 판단에 있어 순수한 무관심적 만족을 관심과 결합되어 있는 만족과 대비시켜 보는 것이다. 우리가 관심에는 이제부터 따져 볼 종류 말고는 다른 것이 없다고 확신할 수 있다면 특히나 그러할 것이다.
[출전] 임마누엘 칸트, 『판단력 비판』제1부
토론하기
(1) 칸트가 ‘이 궁전이 아름다운가’ 하는 질문에 대한 예시로 제시한 답변들은 어떤 점에서 “관심”을 수반하는지 생각해 보자.
(2) 칸트는 여기서 그 어떤 관심과도 결부되지 않는 “순전한 취미 판단”을 논의한다. 이것이 가능하거나 바람직한지 생각해 보자.
(3) 소설 속 사회에 대한 관심이나 배경지식이 있다면 소설의 서사 구조에 대한 미적 판단을 더 깊이 있게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에 대한 자신의 입장과 비슷한 사례를 생각해 보자.
해설읽기
무관심성은 근대 미학의 성립 초기에 미적 판단의 기본 조건으로서 주로 논의되었다. 예컨대 숲을 보면서 그곳에서 농사를 짓거나 나무를 베어내고 건물을 지어서 돈을 버는 데에만 관심이 쏠려 있다면 숲의 아름다움을 알지 못할 것이다. 그 아름다움을 알고 보존하기를 원한다 하더라도 숲을 보는 것, 즉 숲의 표상을 갖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숲 자체를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을 품는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이런 점에서 무관심성은 다른 종류의 관심과 미에 대한 관심을 구분하는 기준이자 순수한 미적 판단을 가능케 하는 조건이 된다.
여기에서 칸트는 궁전은 ⓐ 아무런 지식도 주지도 않고 자신이 사용할 수도 없는 눈요깃거리일 뿐이라는 사람 ⓑ 맛있는 음식이 주는 감각적 쾌락에 비하면 만족감이 덜하다는 사람 ⓒ 권력자의 횡포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는 사람을 대상의 현존에 관심이 있는 사람의 예로 제시한다.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대상을 직접 살필 수 있어야 하고 무언가를 사용하기 위해서도 그것이 실제로 있어야 한다. 감각적 쾌락을 얻기 위해서도 실제 대상이 있어야 그것을 감각할 수 있다. 또한 윤리적 판단은 그것이 실제로 행해져야 함을 전제한다. 이런 면에서 이들은 단순히 궁전의 표상이 아니라 궁전 혹은 그것이 놓인 사회적 현실에 대한 관심이 있어 순수한 미적 판단을 하지 못하거나 할 수는 있다 하더라도 자신의 관심을 우위에 두는 사람들이다.
이런 논의는 순수한 미적 판단을 다른 종류의 판단과 구분하는 면에 있어서는 타당할 수 있으나, 현실의 문제는 보다 복잡하다. 첫째로, 인간이 욕망하는 동물이라고 할 때 순수한 미적 판단이 가능한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미적 판단을 할 수 있고 심지어는 그것을 중시한다 하더라도 동시에 다른 종류의 관심과 욕망을 갖는다면, 그 미적 판단의 순수성을 확신할 수 있을까? 또한 칸트 자신의 지적대로 대부분의 예술은 어떤 사건이나 개념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순수한 미적 판단은 사실상 자연물에 대해서만 가능하다고도 할 수 있다. 자연물 중에서도 인간의 삶과 밀접한 대상, 예컨대 인체나 말이나 소처럼 일상에서 특정한 용도로 쓰이는 동물들에 대한 판단은 대개 건강이나 능력 등의 개념을 수반한다는 점에서 순수한 미적 판단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자연물은 제한적이다.
둘째로, 미적 판단의 가치 자체에 대한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여기서 칸트가 순수한 미적 판단이 그 자체로 다른 모든 관심을 버려야 할 만큼 중요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관점은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개념의 토대를 제공한다. 사회 현실에 무관심한 예술, 심지어는 범죄를 찬양하는 예술도 도덕에 대한 관심을 배제하고 볼 때 아름다울 수는 있을 것이다. 우리가 그런 식의 순수한 미적 판단을 옹호해야 하거나 할 수 있을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특정한 관심이 오히려 깊이 있는 미적 판단을 가능케 하는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미적 판단의 대상은 작품의 내용이 아니라 형식, 즉 조형이나 구성 등이 된다. 소설을 예로 들자면, 우리는 어떤 작품 하나만을 두고 그것의 서사 구조나 서술 방식을 감상할 수도 있겠지만 작품의 배경이 되는 사회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방식이나 다른 소설들의 형식과 비교하면서 그 소설의 구조를 더 잘 감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키워드
무관심성, 미학, 취미 판단, 판단력 비판, 칸트
전후맥락
아래 지문은 『판단력 비판』의 제1부, “미적 판단력 비판”의 도입부에 등장하는 절이다. 칸트는 취미 판단을* 성격, 양, 관계, 양태의 네 가지 면으로 나누어 논의하는데, 1절에서는 취미 판단은 감성적 판단이라는 기본 성격을 다룬다. 여기서 감성적 판단이라는 것은, 그것이 대상의 인식에 기여하는 논리적 판단이 아니라 오로지 주관의 감정에 대한 판단이라는 뜻이다. 예를 들어 어떤 건물을 볼 때 그 건물이 용도에 부합하는 구조와 강도를 가지고 있는가에 대한 판단은 인식의 차원에서 행해지는 대상의 속성에 대한 판단이지만 그 건물이 아름다운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판단은 그 건물을 보는 주관이 쾌감을 느끼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대한 판단이다.
다음으로 지문으로 제시된 2절에서는 취미 판단에서 비롯되는 만족감은 대상의 현존에 대한 관심과는 무관한 것임을 주장하고, 이어지는 절들에서 대상이 감각적인 쾌에 대한 욕구를 만족시킴으로써 산출되는 (예컨대 단순한 색상이 주는) 쾌, 대상이 (수단으로서 유용한 것이든 그 자체로서 좋은 것이든) 좋음의 개념에 부합하는 데서 산출되는 쾌는 취미 판단과 달리 대상의 현존에 대한 관심과 결합되어 있는 것임을 밝힌다. 이 같은 성격으로부터 도출되는 설명은 다음과 같다. “취미란 대상이나 그 표상방식을 아무런 관심 없이만족이나 불만족을 통해 판단하는 능력이다. 그런 만족을 주는 대상을 아름답다고 칭한다.”
* 취미(趣味)는 독일어 Geschmack을 옮긴 것으로, 기본적인 의미는 입맛, 취향 등이다. ‘맛을 보다’라는 뜻의 동사에서 나온 말이며 영어로는 주로 taste로 번역한다. 여기에서는 아름다움을 감상하고 판정하는 능력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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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본문
§2 취미 판단을 규정하는 만족은 무관심적이다.
어떤 대상의 현존의 표상과 결합되는 만족을 관심이라 칭한다. 그런 만족은 늘 욕구 능력과 연관된다. 욕구 능력을 규정하는 토대로서든, 그 토대와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서든 말이다. 그런데, 어떤 것이 아름다운가 아닌가 하는 문제에 있어 우리가 알고자 하는 것은 우리에게든 다른 누구에게든 그 사물의 현존이 중요한가 혹은 중요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순전히 바라봄에 (직관 혹은 반성함에 있어) 그것을 어떻게 판단하는가 하는 것이다. 누군가 내게 내 앞에 있는 궁전이 아름답다고 여기는지 물으면, 그저 감탄하며 보라고 만든 것은 좋아하지 않는다고 답할 수 있을 것이다. 혹은 파리에서 식당이 제일 마음에 들었다는 이로쿼이족 추장처럼 답할 수도 있겠다. 아니면 루소 식으로 저런 불필요한 것에 인민의 땀을 낭비하는 권세가들의 허영을 질책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내가 만약 다시는 다른 사람을 만날 가망 없이 무인도에서 홀로 살고 있다면, 마법으로 그런 화려한 건물을 지을 수 있다고 한다 해도, 충분히 편안한 오두막 한 채만 있으면 그런 귀찮은 일은 시도조차 하지 않으리라고 쉽게 확신할 수 있다. 이런 말들은 모두 사람들의 승인과 동의를 얻을 수 있겠지만 지금의 화두는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가 알고자 하는 것은 다만, 대상의 순전한 표상이 내가 그것의 실존에 관해서는 아무리 무관심하다 해도 내 안에 만족을 가져오는가 어떤가 하는 것이다. 그것이 아름답다고 말하고 내게 취미가 있음을 보여줌에 있어 내게 중요한 것은 나로 하여금 대상의 실존에 의존하게 하는 무언가가 아니라 그 표상으로부터 내가 내 속에 만들어내는 어떤 것이라는 점은 쉽게 알 수 있다. 미에 관한 판단은, 약간이라도 관심이 섞여 있다면 매우 편파적이며 순전한 취미 판단이 아니라는 점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취미에 있어 판관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사물의 실존에 대해서는 조금도 마음이 기울어서는 아니 되며, 이 점에 있어서 더없이 무관심해야 한다.
그러나, 지극히 중요한 이 명제를 가장 잘 해명하는 방법은 취미 판단에 있어 순수한 무관심적 만족을 관심과 결합되어 있는 만족과 대비시켜 보는 것이다. 우리가 관심에는 이제부터 따져 볼 종류 말고는 다른 것이 없다고 확신할 수 있다면 특히나 그러할 것이다.
[출전] 임마누엘 칸트, 『판단력 비판』제1부
토론하기
(1) 칸트가 ‘이 궁전이 아름다운가’ 하는 질문에 대한 예시로 제시한 답변들은 어떤 점에서 “관심”을 수반하는지 생각해 보자.
(2) 칸트는 여기서 그 어떤 관심과도 결부되지 않는 “순전한 취미 판단”을 논의한다. 이것이 가능하거나 바람직한지 생각해 보자.
(3) 소설 속 사회에 대한 관심이나 배경지식이 있다면 소설의 서사 구조에 대한 미적 판단을 더 깊이 있게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에 대한 자신의 입장과 비슷한 사례를 생각해 보자.
해설읽기
무관심성은 근대 미학의 성립 초기에 미적 판단의 기본 조건으로서 주로 논의되었다. 예컨대 숲을 보면서 그곳에서 농사를 짓거나 나무를 베어내고 건물을 지어서 돈을 버는 데에만 관심이 쏠려 있다면 숲의 아름다움을 알지 못할 것이다. 그 아름다움을 알고 보존하기를 원한다 하더라도 숲을 보는 것, 즉 숲의 표상을 갖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숲 자체를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을 품는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이런 점에서 무관심성은 다른 종류의 관심과 미에 대한 관심을 구분하는 기준이자 순수한 미적 판단을 가능케 하는 조건이 된다.
여기에서 칸트는 궁전은 ⓐ 아무런 지식도 주지도 않고 자신이 사용할 수도 없는 눈요깃거리일 뿐이라는 사람 ⓑ 맛있는 음식이 주는 감각적 쾌락에 비하면 만족감이 덜하다는 사람 ⓒ 권력자의 횡포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는 사람을 대상의 현존에 관심이 있는 사람의 예로 제시한다.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대상을 직접 살필 수 있어야 하고 무언가를 사용하기 위해서도 그것이 실제로 있어야 한다. 감각적 쾌락을 얻기 위해서도 실제 대상이 있어야 그것을 감각할 수 있다. 또한 윤리적 판단은 그것이 실제로 행해져야 함을 전제한다. 이런 면에서 이들은 단순히 궁전의 표상이 아니라 궁전 혹은 그것이 놓인 사회적 현실에 대한 관심이 있어 순수한 미적 판단을 하지 못하거나 할 수는 있다 하더라도 자신의 관심을 우위에 두는 사람들이다.
이런 논의는 순수한 미적 판단을 다른 종류의 판단과 구분하는 면에 있어서는 타당할 수 있으나, 현실의 문제는 보다 복잡하다. 첫째로, 인간이 욕망하는 동물이라고 할 때 순수한 미적 판단이 가능한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미적 판단을 할 수 있고 심지어는 그것을 중시한다 하더라도 동시에 다른 종류의 관심과 욕망을 갖는다면, 그 미적 판단의 순수성을 확신할 수 있을까? 또한 칸트 자신의 지적대로 대부분의 예술은 어떤 사건이나 개념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순수한 미적 판단은 사실상 자연물에 대해서만 가능하다고도 할 수 있다. 자연물 중에서도 인간의 삶과 밀접한 대상, 예컨대 인체나 말이나 소처럼 일상에서 특정한 용도로 쓰이는 동물들에 대한 판단은 대개 건강이나 능력 등의 개념을 수반한다는 점에서 순수한 미적 판단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자연물은 제한적이다.
둘째로, 미적 판단의 가치 자체에 대한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여기서 칸트가 순수한 미적 판단이 그 자체로 다른 모든 관심을 버려야 할 만큼 중요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관점은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개념의 토대를 제공한다. 사회 현실에 무관심한 예술, 심지어는 범죄를 찬양하는 예술도 도덕에 대한 관심을 배제하고 볼 때 아름다울 수는 있을 것이다. 우리가 그런 식의 순수한 미적 판단을 옹호해야 하거나 할 수 있을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특정한 관심이 오히려 깊이 있는 미적 판단을 가능케 하는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미적 판단의 대상은 작품의 내용이 아니라 형식, 즉 조형이나 구성 등이 된다. 소설을 예로 들자면, 우리는 어떤 작품 하나만을 두고 그것의 서사 구조나 서술 방식을 감상할 수도 있겠지만 작품의 배경이 되는 사회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방식이나 다른 소설들의 형식과 비교하면서 그 소설의 구조를 더 잘 감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키워드
무관심성, 미학, 취미 판단, 판단력 비판, 칸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