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맥락
「초현실주의 선언」은 초현실주의에 대한 정의 뿐만 아니라 기존 예술사에서 발견할 수 있는 초현실주의의 단초, 초현실주의가 주되게 활용하는 이미지 등을 폭넓게 담고 있는 글이다. 그 중에서 이 지문은 「초현실주의 선언」에서 초현실주의를 정의하는 대목과 초현실주의의 작법 한 가지를 설명하는 대목을 발췌한 것이다.
앙드레 브르통의 초현실주의는 프로이트의 무의식 이론을 출발점으로 삼은바, 꿈이나 연상작용 등 프로이트 정신분석의 분석 대상들을 창작 원리로 적극적으로 끌어 들인다. 다만 프로이트의 분석기법이 궁극적으로 무의식적 욕망의 적절한 승화를 통해 내담자의 증상을 해소하는 것을 목표로 한 반면, 초현실주의는 그 욕망의 해방을 지향하는 반사회적 지향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브르통이 초현실주의로써 그저 반사회적인 일탈의 공간을 마련하고자 한 것이 아니다. 아래 지문에서 사전의 형식을 차용하고 구체적인 작법을 정립하는 등의 형식을 쓴 것에서도 볼 수 있듯, 초현실주의는 나름대로의 엄격함과 진지함을 갖춘 이론이자 운동으로서 기성 사회에 맞서고자 했다.
고전본문
초현실주의 [남성명사]. 순수한 상태의 심적 자동기술. 이것을 통해 ― 말로든, 글로든, 혹은 다른 어떤 방법으로든 ― 사유의 실제 작용을 표현하고자 한다. 이성이 가하는 어떤 통제도 없이, 그 어떤 미적 혹은 도덕적 고려에도 구속되지 않고 사유가 지시하는 대로 말이다.
철학백과 식으로 말하자면, 초현실주의는 지금까지는 무시되어 온 연상작용의 어떤 형식들이 갖는 우월한 현실에 대한, 꿈의 전능과 사유의 무관심적 활동에 대한 믿음을 기반으로 삼는다. 초현실주의는 다른 모든 심리적 기제들을 단번에 모두 허물고 그것들을 대신해 삶의 주된 문제들을 전부 해결하고자 한다.
[중략]
당신의 정신이 스스로에게 집중하기에 최대한 좋은 장소에 자리 잡고 필기구를 준비하라. 가능한 한 수동적인 혹은 수용적인 상태에 빠져들라. 당신의 천재성도 재능도, 다른 이들의 재능도 모두 잊으라. 문학이란 모든 것으로 이어지는 가장 슬픈 길임을 명심하라. 미리 주제를 생각하지 말고 빠르게 쓰라. 당신이 무엇을 쓰고 있는지조차 기억이 안 나서 쓴 것을 다시 읽어보고 싶어질 정도로 빠르게. 첫 문장은 저절로 나올 것이다. 매분매초 언제나, 우리의 의식은 모르는, 그저 터져 나올 태세를 하고 있는 문장이 있기 때문이다. 다음 문장에 대해 단언하기는 조금 어렵다. 첫 문장을 쓰고나면 조금이나마 인식이 생겨버리므로 두 번째 문장은 우리 의식 활동의 일환이 되니 말이다. 하지만 개의치 않아도 좋다. 대개 여기가 초현실주의 게임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이다. 구두점은 ― 흔들리는 밧줄의 매듭들처럼 반드시 필요해 보이긴 하겠지만 ― 우리의 관건인 흐름의 절대적 연속성에 저항한다는 사실에는 여전히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마음 가는 대로 진행하라. 웅얼거림은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믿으라. 실수 ― 아마도 부주의로 인한 실수 ― 를 해서 침묵이 끼어들려 할 때는 주저말고 더없이 분명한 문장으로 끊으라. 출처가 의심스러워 보이는 단어 뒤에 아무 글자, 예를 들면 “l”을, 무조건 “l”을 덧붙이라. 그리고는 그 글자로 시작하는 말을 다음 단어로 써서 임의성을 되찾으라.
[출처] 브르통, 『초현실주의 선언』
토론하기
(1) 여기서 브르통이 주목하는 꿈, 무의식, 연상작용 등이 공통적으로 의미하는 바를 생각해 보자.
(2) ‘초현실’은 ‘현실 너머’를 뜻하는 말이다. 지문의 내용과 ①에 대한 답을 토대로 이 글이 말하는 초현실이란 어떤 것일지 생각해보자.
(3) “이성이 가하는 어떤 통제도 없이, 그 어떤 미적 혹은 도덕적 고려에도 구속되지 않고” 행해지는 창작과 감상은 오히려 삶을 파괴하는 폭력으로, 혹은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무의미한 말로 이어지지는 않을지 생각해보자.
해설읽기
지문 첫머리의 두 정의는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초현실주의란 이성이나 미, 도덕 등 이성적 개념들의 통제를 거치지 않은 사유의 실제 작용을 자동기술하는 것, 즉 마음에 떠오르는 것을 그대로 받아적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저 지엽적인 유희나 실험이 아니라 그런 연상작용 속에 우리가 아는 현실보다 더 우월한 현실이 있다는 믿음 아래 삶에 새로운 ―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것에 반대하는 ― 원리를 도입하려는 시도다.
‘합리적 존재’로 정의되는 인간의 삶에서 꿈, 무의식, 연상작용 등은 누구에게나 있지만 대개 무의미한 것으로 치부되곤 한다. 인과적으로 설명되지 않거나 아예 자연법칙을 통째로 무시하는 꿈의 내용, 논리적으로 정리되지 않는 말장난이나 말실수에 불과하게 여겨지는 연상, 혹은 부도덕하여 제거되어야 한다고 여겨지는 욕망 등을 떠올려 보라. 초현실주의는 이런 것들에 주목하지만 이를 합리적으로 해석할 방법을 찾거나 모든 것이 허락되는 예술이라는 공간을 마련해 거기에 가두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예술과 삶의 원리로서 받아들이고자 한다.
지문 후반부의 작법은 브르통의 목표가 그저 비현실적이고 공상적인 것을 극한까지 밀어붙이는 것이 아님을 잘 보여준다. 무작위적인 연상에 의존하는 이런 작법을 통해 쓰여진 글은 환상적이기보다는 오히려 지리멸렬하고 비약적일 나열이 되기 쉬우리라고 짐작해 볼 수 있다. 요컨대 이 글이 말하는 초현실은 그저 현실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비현실적인 것이나 지금의 현실보다 나은 이상적인 것이 아니라, 분명히 존재하지만 합리성이 지배하는 이른바 현실에 가려져 있는 것들 일체를 가리키는 말로 읽을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초현실주의가 현실에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재구성하려 하는 시도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가능할지를 말하기는 쉽지 않다. 모두가 이성의 통제를 벗어버린다면 어떤 사회를 만들 수 있을지, 특히 도덕적 고려조차 없을 때 공동체라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지는 적어도 합리성이 지배하는 현실에 적응해 있는 상태에서는 당장 떠올릴 수 없을 것이다. 초현실주의의 작법을 따른 작품이 대개 논리적, 인과적으로 설명될 수 없다는 점, 다시 말해 이해하기 쉽지 않다는 점 역시 독자가 초현실주의가 말하는 해방 혹은 초현실주의 작품이 묘사하는 해방을 받아들이는 데에 장벽이 되기도 한다.
키워드
꿈, 무의식, 당드레 브르통, 아방가르드, 초현실주의
전후맥락
「초현실주의 선언」은 초현실주의에 대한 정의 뿐만 아니라 기존 예술사에서 발견할 수 있는 초현실주의의 단초, 초현실주의가 주되게 활용하는 이미지 등을 폭넓게 담고 있는 글이다. 그 중에서 이 지문은 「초현실주의 선언」에서 초현실주의를 정의하는 대목과 초현실주의의 작법 한 가지를 설명하는 대목을 발췌한 것이다.
앙드레 브르통의 초현실주의는 프로이트의 무의식 이론을 출발점으로 삼은바, 꿈이나 연상작용 등 프로이트 정신분석의 분석 대상들을 창작 원리로 적극적으로 끌어 들인다. 다만 프로이트의 분석기법이 궁극적으로 무의식적 욕망의 적절한 승화를 통해 내담자의 증상을 해소하는 것을 목표로 한 반면, 초현실주의는 그 욕망의 해방을 지향하는 반사회적 지향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브르통이 초현실주의로써 그저 반사회적인 일탈의 공간을 마련하고자 한 것이 아니다. 아래 지문에서 사전의 형식을 차용하고 구체적인 작법을 정립하는 등의 형식을 쓴 것에서도 볼 수 있듯, 초현실주의는 나름대로의 엄격함과 진지함을 갖춘 이론이자 운동으로서 기성 사회에 맞서고자 했다.
고전본문
초현실주의 [남성명사]. 순수한 상태의 심적 자동기술. 이것을 통해 ― 말로든, 글로든, 혹은 다른 어떤 방법으로든 ― 사유의 실제 작용을 표현하고자 한다. 이성이 가하는 어떤 통제도 없이, 그 어떤 미적 혹은 도덕적 고려에도 구속되지 않고 사유가 지시하는 대로 말이다.
철학백과 식으로 말하자면, 초현실주의는 지금까지는 무시되어 온 연상작용의 어떤 형식들이 갖는 우월한 현실에 대한, 꿈의 전능과 사유의 무관심적 활동에 대한 믿음을 기반으로 삼는다. 초현실주의는 다른 모든 심리적 기제들을 단번에 모두 허물고 그것들을 대신해 삶의 주된 문제들을 전부 해결하고자 한다.
[중략]
당신의 정신이 스스로에게 집중하기에 최대한 좋은 장소에 자리 잡고 필기구를 준비하라. 가능한 한 수동적인 혹은 수용적인 상태에 빠져들라. 당신의 천재성도 재능도, 다른 이들의 재능도 모두 잊으라. 문학이란 모든 것으로 이어지는 가장 슬픈 길임을 명심하라. 미리 주제를 생각하지 말고 빠르게 쓰라. 당신이 무엇을 쓰고 있는지조차 기억이 안 나서 쓴 것을 다시 읽어보고 싶어질 정도로 빠르게. 첫 문장은 저절로 나올 것이다. 매분매초 언제나, 우리의 의식은 모르는, 그저 터져 나올 태세를 하고 있는 문장이 있기 때문이다. 다음 문장에 대해 단언하기는 조금 어렵다. 첫 문장을 쓰고나면 조금이나마 인식이 생겨버리므로 두 번째 문장은 우리 의식 활동의 일환이 되니 말이다. 하지만 개의치 않아도 좋다. 대개 여기가 초현실주의 게임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이다. 구두점은 ― 흔들리는 밧줄의 매듭들처럼 반드시 필요해 보이긴 하겠지만 ― 우리의 관건인 흐름의 절대적 연속성에 저항한다는 사실에는 여전히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마음 가는 대로 진행하라. 웅얼거림은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믿으라. 실수 ― 아마도 부주의로 인한 실수 ― 를 해서 침묵이 끼어들려 할 때는 주저말고 더없이 분명한 문장으로 끊으라. 출처가 의심스러워 보이는 단어 뒤에 아무 글자, 예를 들면 “l”을, 무조건 “l”을 덧붙이라. 그리고는 그 글자로 시작하는 말을 다음 단어로 써서 임의성을 되찾으라.
[출처] 브르통, 『초현실주의 선언』
토론하기
(1) 여기서 브르통이 주목하는 꿈, 무의식, 연상작용 등이 공통적으로 의미하는 바를 생각해 보자.
(2) ‘초현실’은 ‘현실 너머’를 뜻하는 말이다. 지문의 내용과 ①에 대한 답을 토대로 이 글이 말하는 초현실이란 어떤 것일지 생각해보자.
(3) “이성이 가하는 어떤 통제도 없이, 그 어떤 미적 혹은 도덕적 고려에도 구속되지 않고” 행해지는 창작과 감상은 오히려 삶을 파괴하는 폭력으로, 혹은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무의미한 말로 이어지지는 않을지 생각해보자.
해설읽기
지문 첫머리의 두 정의는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초현실주의란 이성이나 미, 도덕 등 이성적 개념들의 통제를 거치지 않은 사유의 실제 작용을 자동기술하는 것, 즉 마음에 떠오르는 것을 그대로 받아적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저 지엽적인 유희나 실험이 아니라 그런 연상작용 속에 우리가 아는 현실보다 더 우월한 현실이 있다는 믿음 아래 삶에 새로운 ―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것에 반대하는 ― 원리를 도입하려는 시도다.
‘합리적 존재’로 정의되는 인간의 삶에서 꿈, 무의식, 연상작용 등은 누구에게나 있지만 대개 무의미한 것으로 치부되곤 한다. 인과적으로 설명되지 않거나 아예 자연법칙을 통째로 무시하는 꿈의 내용, 논리적으로 정리되지 않는 말장난이나 말실수에 불과하게 여겨지는 연상, 혹은 부도덕하여 제거되어야 한다고 여겨지는 욕망 등을 떠올려 보라. 초현실주의는 이런 것들에 주목하지만 이를 합리적으로 해석할 방법을 찾거나 모든 것이 허락되는 예술이라는 공간을 마련해 거기에 가두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예술과 삶의 원리로서 받아들이고자 한다.
지문 후반부의 작법은 브르통의 목표가 그저 비현실적이고 공상적인 것을 극한까지 밀어붙이는 것이 아님을 잘 보여준다. 무작위적인 연상에 의존하는 이런 작법을 통해 쓰여진 글은 환상적이기보다는 오히려 지리멸렬하고 비약적일 나열이 되기 쉬우리라고 짐작해 볼 수 있다. 요컨대 이 글이 말하는 초현실은 그저 현실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비현실적인 것이나 지금의 현실보다 나은 이상적인 것이 아니라, 분명히 존재하지만 합리성이 지배하는 이른바 현실에 가려져 있는 것들 일체를 가리키는 말로 읽을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초현실주의가 현실에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재구성하려 하는 시도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가능할지를 말하기는 쉽지 않다. 모두가 이성의 통제를 벗어버린다면 어떤 사회를 만들 수 있을지, 특히 도덕적 고려조차 없을 때 공동체라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지는 적어도 합리성이 지배하는 현실에 적응해 있는 상태에서는 당장 떠올릴 수 없을 것이다. 초현실주의의 작법을 따른 작품이 대개 논리적, 인과적으로 설명될 수 없다는 점, 다시 말해 이해하기 쉽지 않다는 점 역시 독자가 초현실주의가 말하는 해방 혹은 초현실주의 작품이 묘사하는 해방을 받아들이는 데에 장벽이 되기도 한다.
키워드
꿈, 무의식, 당드레 브르통, 아방가르드, 초현실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