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맥락
크리올(creole)은 16세기 이후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이나 다른 식민지에서 낳은 후손들을 일컫는 말로, 스페인어로 크리오요(Criollo)라고 한다. 비유적으로 설명하면 일제 강점기 기간에 일본 본토에서 한반도로 이주한 일본인이 자녀를 낳아 그들이 한반도에서 성장하면 일종의 크리올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전통적으로 민족과 민족주의에 관한 여러 연구는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 민족의식이 고조되고, 독일과 이탈리아 등이 하나의 통일 국가로 등장하는 사례에 주목하였다. 베네딕트 앤더슨은 그런 대표적 사례 외에, 그리고 시기적으로 더 앞서서 라틴 아메리카의 여러 지방이 스페인, 포르투갈 제국으로부터 독립하면서 나타난 민족국가에 주목하였다.
앤더슨은 『상상된 공동체』 4장에서 아메리카 민족 형성에서 크리올의 역할에 주목한 이후 5장으로 넘어가면서 유럽의 민족주의 시대를 다룬다. ‘구세계’의 민족주의는 ‘신세계’의 민족주의에 비해 민족 활자어가 핵심적인 중요성을 띄었고, ‘신세계’ 그리고 프랑스 혁명의 모델을 참고로 하여 출발할 수 있었다는 차이가 있었다. 앤더슨이 책의 1장에서 민족의 형태가 ‘모듈식’으로 형성되어 전혀 다른 공간에서 이식될 수 있었음을 지적한 것처럼 민족, 그리고 민족을 바탕으로 새로이 주조될 민족국가는 근대 이후 세계의 표준이 되었다.
고전본문
그러면 여기에 수수께끼가 있다. 왜 크리올 공동체들이 유럽의 대부분 지역보다 훨씬 일찍 그들의 민족다움에 대한 개념을 발전시켰는가? 왜 보통 크고 억압받으며 비(非)스페인어 사용 인구를 포함했던 그런 식민지 지방들이, 그 인구들을 동료 민족으로 의식적으로 재정의하는 크리올을 만들어냈는가? 그리고 그들이 여러모로 애착을 가졌던 스페인을 왜 적대적인 외세로 규정했는가? 거의 3세기 동안 조용히 존재했던 스페인령 아메리카 제국이 왜 갑자기 18개의 개별 국가로 분열되었는가? (중략)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해답의 시작은 ‘각각의 새로운 남아메리카 공화국들이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 행정 단위였다’는 놀라운 사실에 있다. 이런 면에서 그들은 20세기 중반 아프리카와 아시아 일부 지역의 신생국을 예고했으며,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유럽의 신생국들과는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아메리카 행정 구역의 원래 형태는 어느 정도 자의적이고 우연적이었고, 특정 군사 정복의 공간적 한계를 드러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지리적, 정치적, 경제적 요인의 영향으로 더 확고한 실체를 갖게 되었다. (중략)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어떤 크리올이 스페인 본토에서 공식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오르는 일은 거의 들어보지 못했다. 더구나 크리올 관리들의 순례는 단지 수직적으로만 막혀있지 않았다. 만약 반도 출신 관리들이 사라고사에서 카르타헤나, 마드리드, 리마, 그리고 다시 마드리드로 가는 길을 여행할 수 있었다면, ‘멕시코’나 ‘칠레’ 크리올들은 보통 식민지 멕시코나 칠레의 영토에서만 근무했다. 그들의 수평적 이동은 수직적 상승만큼이나 한정적이었다. 이런 식으로, 그들의 순환적인 상승의 정점, 즉 그가 배정될 수 있었던 가장 높은 행정 중심지는 그가 속한 제국 행정 단위의 수도였다. 하지만 이 제한된 순례에서 그는 여행 동료들을 만났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동료애가 순례의 특정 영역뿐만 아니라 대서양 너머에서 태어났다는 공통된 운명에 기반하고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그의 아버지가 이주한 지 일주일 안에 그가 태어났더라도, 아메리카 대륙에서 태어났다는 우연은 그를 종속적인 지위에 위치시켰다. 심지어 언어, 종교, 선조, 혹은 예절 면에서 그가 스페인에서 태어난 스페인 사람과 거의 구별할 수 없었음에도 말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구제할 수 없는 크리올이었다. 하지만 그의 배제가 얼마나 비이성적으로 느껴졌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불합리성 안에는 이러한 논리가 숨어 있었다. 아메리카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는 진정한 스페인 사람이 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스페인에서 태어난 반도인(the peninsular)은 진정한 아메리카 사람이 될 수 없었다. (중략)
우리의 관심은 지금까지 아메리카 대륙 관료들의 세계에 초점을 맞춰졌다. 그곳은 전략적으로 중요했지만, 여전히 작은 세계였다. 게다가 그 세계는 반도 출신과 크리올 사이의 갈등으로 인해, 18세기 말 아메리카 민족의식이 나타나기 전부터 존재했다. 제한된 부왕령 순례는 그 영토적 범위가 민족으로 상상될 수 있을 때까지, 다시 말해 인쇄 자본주의가 도달할 때까지 결정적인 결과를 낳지 못했다. (중략)
잠정적인 결론으로, 지금까지의 주장이 가진 제한적이고 구체적인 핵심을 다시 강조하는 것이 적절할 것 같다. 이 주장은 1760년에서 1830년 사이에 서반구에서 발생한 식민 본국에 대한 저항의 사회경제적 기반을 설명하려는 의도라기보다는, 왜 그 저항이 다른 형태가 아닌 복수적인 ‘민족’ 형태로 구상되었는지를 설명하려는 의도다. 걸려 있었던 경제적 이해관계는 잘 알려져 있고, 분명히 근본적으로 중요하다. 자유주의와 계몽주의는 무엇보다 제국과 구체제에 대한 이념적 비판의 무기고를 제공하면서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내가 제안하는 것은 경제적 이해관계, 자유주의, 계몽주의 중 어느 것도 그러한 체제의 약탈로부터 방어해야 할 상상된 공동체의 종류나 형태를 스스로 만들 수 없었고, 만들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달리 말해, 그 어느 것도 존경이나 혐오의 대상이 되는 중앙의 사물들과는 대조적으로, 새로운 의식의 틀, 즉 거의 보이지 않는 시야의 주변부를 제공하지 못했다. 이 특정한 과제를 달성하는 데에는 순례하는 크리올 관료들과 지방의 크리올 인쇄업자들이 결정적인 역사적 역할을 했다.
[출처] 베네딕트 앤더슨, 『상상된 공동체』
토론하기
(1) 행정 구역은 왜 크리올에게 특별한 의미를 가졌으며, 이것이 어떻게 그들이 자신들의 공동체를 하나의 ‘민족’으로 인식하게 만들었는지 설명해보자.
(2) 자신이 태어난 장소나 출신 배경 때문에 기회나 지위에서 제한받는다면, 그것이 개인의 소속감과 정체성 형성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3) 오늘날의 디지털 시대에 ‘인쇄 자본주의’에 해당하는 새로운 기술이나 매체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며, 이들이 현대 사회의 새로운 공동체나 집단 정체성을 어떻게 형성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해설읽기
크리올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보거나 들을 수 있는 단어는 아니다. 단어의 기원 자체가 스페인이 제국으로서 현재의 아메리카, 그 중 특히 라틴 아메리카를 지배했을 때 그곳에서 태어난 유럽인의 직계 혈통을 지칭하기 때문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현재 라틴 아메리카의 국가들은 유럽인이 도래하기 이전의 원주민과 이주한 유럽인 그리고 그들의 혼혈 후손들이 뒤섞인 인구 집단이 대부분이다. 여기에 아프리카에서 온 노예 및 그들과 다른 인종의 혼혈 후손까지 추가된다. 크리올은 백인이고 출생지를 제외하면 유럽, 즉 스페인의 백인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고 하겠다. 앤더슨이 극단적인 사례로 설명한 것처럼 어떤 사람이 스페인에서 어머니의 뱃속에서 태어나기 직전까지 있었더라도 스페인령 아메리카에서 태어났다면 그는 스페인 사람이 아니라 크리올이 된다. 그렇게 되면 그는 스페인 백인에 비해 일생에 걸쳐 큰 차별을 겪게 되고, 그것이 라틴 아메리카에서 민족주의가 선구적으로 발생하게 된 큰 이유가 된다는 것이 앤더슨이 이전의 다른 민족주의 연구와 차별화되는 지점이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유럽 국가 중 선구적인 해양 제국이었고, 그들의 해외 식민지 확장 경쟁은 교황의 중재가 필요했다. 그래서 1494년 교황의 중재 하에 토르데시야스 조약이 맺어져 라틴 아메리카에서 현재의 브라질이 포르투갈의 영토가 되고 그 왼쪽은 스페인의 영토가 되었다. 즉 라틴 아메리카는 원래 크게 두 개의 영역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대략 3백 년의 시간이 지났는데 갑자기 19세기가 되면 이 지역에 수많은 독립 국가들이 형성되었고, 이는 민족적 열정의 결과였다. 이베리아반도의 스페인 사람에 비해 차별을 받아온 크리올들이 이때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이 앤더슨의 생각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지점은 새롭게 생겨난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이 스페인령 아메리카 시절의 행정 구역을 경계로 형성되었다는 대목이다. 스페인, 포르투갈인이 도래하기 이전 아메리카에 원주민들이 살았고, 이들에게는 잉카 제국 같은 나름의 독특한 국가 형태가 있었지만 현재 국경처럼 구분되어 살지는 않았다. 스페인 제국이 자의적이고 우연하게 만들어낸 라틴 아메리카의 경계가 오랜 시간이 지나며 하나의 실체가 되어 결국 독립의 시기가 왔을 때 그 경계에 따라 별개의 국가들이 만들어졌다. 이렇게 된 이유 중 하나는 나중에 개별 국가가 될 각 행정구역의 크리올 관리들이 다른 지역으로 자유롭게 이동할 수 없었던 장벽 때문이었다. 가령 멕시코 지역의 크리올 관리면 평생을 멕시코 지역 내에서 근무하게 되었고, 거의 자연스럽게 그 지역에 얽매인 정체성을 형성하게 되었으리라는 추측이다. 그리고 크리올은 스페인 본토에서 태어난 백인과 자신이 여러 부분에서 거의 차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자신이 멕시코 지역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더 좋은 자리인 스페인 본토의 관리가 될 수 없다는 불만을 쌓아가며 나중에 민족적 감정을 행정단위에 따라 형성하는 동력을 만들었다.
하지만 앤더슨은 크리올의 유리천장 같은 승진의 한계와 드넓은 스페인령 아메리카 중 특정 지역 내에서만 순환 근무가 가능한 지역적 한계만으로 민족 의식이 형성되었다고 보지 않는다. 그가 『상상된 공동체』에서 계속 강조하는 인쇄 자본주의가 아메리카 지역에서도 민족 의식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우리는 루터의 종교개혁이 인쇄술의 발달에 힘입었다는 점을 알고 있다. 같은 글을 빠른 시간 안에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은 근대가 이전과 크게 달라진 점이다. 글 중에서도 신문의 등장이 앤더슨의 인쇄 자본주의 논의에서 중요하게 다뤄진다. 지금도 신문에는 해당 국가의 소식 외에 세계 각지의 뉴스가 포함되지만, 신문이 기본적으로 다루는 범위는 국가 단위인 경우가 많다. 독립 이전 스페인령 아메리카에서는 18세기 후반에 처음 현지 언론이 등장했고, 앤더슨은 이 신문들에서 다루는 식민지의 정치·경제 상황을 통해 같은 신문을 읽는 동료 독자들이 상상된 공동체를 형성하였다고 본다.
키워드
베네딕트 앤더슨, 민족, 스페인, 아메리카, 인쇄 자본주의, 크리올
전후맥락
크리올(creole)은 16세기 이후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이나 다른 식민지에서 낳은 후손들을 일컫는 말로, 스페인어로 크리오요(Criollo)라고 한다. 비유적으로 설명하면 일제 강점기 기간에 일본 본토에서 한반도로 이주한 일본인이 자녀를 낳아 그들이 한반도에서 성장하면 일종의 크리올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전통적으로 민족과 민족주의에 관한 여러 연구는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 민족의식이 고조되고, 독일과 이탈리아 등이 하나의 통일 국가로 등장하는 사례에 주목하였다. 베네딕트 앤더슨은 그런 대표적 사례 외에, 그리고 시기적으로 더 앞서서 라틴 아메리카의 여러 지방이 스페인, 포르투갈 제국으로부터 독립하면서 나타난 민족국가에 주목하였다.
앤더슨은 『상상된 공동체』 4장에서 아메리카 민족 형성에서 크리올의 역할에 주목한 이후 5장으로 넘어가면서 유럽의 민족주의 시대를 다룬다. ‘구세계’의 민족주의는 ‘신세계’의 민족주의에 비해 민족 활자어가 핵심적인 중요성을 띄었고, ‘신세계’ 그리고 프랑스 혁명의 모델을 참고로 하여 출발할 수 있었다는 차이가 있었다. 앤더슨이 책의 1장에서 민족의 형태가 ‘모듈식’으로 형성되어 전혀 다른 공간에서 이식될 수 있었음을 지적한 것처럼 민족, 그리고 민족을 바탕으로 새로이 주조될 민족국가는 근대 이후 세계의 표준이 되었다.
고전본문
그러면 여기에 수수께끼가 있다. 왜 크리올 공동체들이 유럽의 대부분 지역보다 훨씬 일찍 그들의 민족다움에 대한 개념을 발전시켰는가? 왜 보통 크고 억압받으며 비(非)스페인어 사용 인구를 포함했던 그런 식민지 지방들이, 그 인구들을 동료 민족으로 의식적으로 재정의하는 크리올을 만들어냈는가? 그리고 그들이 여러모로 애착을 가졌던 스페인을 왜 적대적인 외세로 규정했는가? 거의 3세기 동안 조용히 존재했던 스페인령 아메리카 제국이 왜 갑자기 18개의 개별 국가로 분열되었는가? (중략)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해답의 시작은 ‘각각의 새로운 남아메리카 공화국들이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 행정 단위였다’는 놀라운 사실에 있다. 이런 면에서 그들은 20세기 중반 아프리카와 아시아 일부 지역의 신생국을 예고했으며,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유럽의 신생국들과는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아메리카 행정 구역의 원래 형태는 어느 정도 자의적이고 우연적이었고, 특정 군사 정복의 공간적 한계를 드러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지리적, 정치적, 경제적 요인의 영향으로 더 확고한 실체를 갖게 되었다. (중략)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어떤 크리올이 스페인 본토에서 공식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오르는 일은 거의 들어보지 못했다. 더구나 크리올 관리들의 순례는 단지 수직적으로만 막혀있지 않았다. 만약 반도 출신 관리들이 사라고사에서 카르타헤나, 마드리드, 리마, 그리고 다시 마드리드로 가는 길을 여행할 수 있었다면, ‘멕시코’나 ‘칠레’ 크리올들은 보통 식민지 멕시코나 칠레의 영토에서만 근무했다. 그들의 수평적 이동은 수직적 상승만큼이나 한정적이었다. 이런 식으로, 그들의 순환적인 상승의 정점, 즉 그가 배정될 수 있었던 가장 높은 행정 중심지는 그가 속한 제국 행정 단위의 수도였다. 하지만 이 제한된 순례에서 그는 여행 동료들을 만났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동료애가 순례의 특정 영역뿐만 아니라 대서양 너머에서 태어났다는 공통된 운명에 기반하고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그의 아버지가 이주한 지 일주일 안에 그가 태어났더라도, 아메리카 대륙에서 태어났다는 우연은 그를 종속적인 지위에 위치시켰다. 심지어 언어, 종교, 선조, 혹은 예절 면에서 그가 스페인에서 태어난 스페인 사람과 거의 구별할 수 없었음에도 말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구제할 수 없는 크리올이었다. 하지만 그의 배제가 얼마나 비이성적으로 느껴졌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불합리성 안에는 이러한 논리가 숨어 있었다. 아메리카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는 진정한 스페인 사람이 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스페인에서 태어난 반도인(the peninsular)은 진정한 아메리카 사람이 될 수 없었다. (중략)
우리의 관심은 지금까지 아메리카 대륙 관료들의 세계에 초점을 맞춰졌다. 그곳은 전략적으로 중요했지만, 여전히 작은 세계였다. 게다가 그 세계는 반도 출신과 크리올 사이의 갈등으로 인해, 18세기 말 아메리카 민족의식이 나타나기 전부터 존재했다. 제한된 부왕령 순례는 그 영토적 범위가 민족으로 상상될 수 있을 때까지, 다시 말해 인쇄 자본주의가 도달할 때까지 결정적인 결과를 낳지 못했다. (중략)
잠정적인 결론으로, 지금까지의 주장이 가진 제한적이고 구체적인 핵심을 다시 강조하는 것이 적절할 것 같다. 이 주장은 1760년에서 1830년 사이에 서반구에서 발생한 식민 본국에 대한 저항의 사회경제적 기반을 설명하려는 의도라기보다는, 왜 그 저항이 다른 형태가 아닌 복수적인 ‘민족’ 형태로 구상되었는지를 설명하려는 의도다. 걸려 있었던 경제적 이해관계는 잘 알려져 있고, 분명히 근본적으로 중요하다. 자유주의와 계몽주의는 무엇보다 제국과 구체제에 대한 이념적 비판의 무기고를 제공하면서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내가 제안하는 것은 경제적 이해관계, 자유주의, 계몽주의 중 어느 것도 그러한 체제의 약탈로부터 방어해야 할 상상된 공동체의 종류나 형태를 스스로 만들 수 없었고, 만들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달리 말해, 그 어느 것도 존경이나 혐오의 대상이 되는 중앙의 사물들과는 대조적으로, 새로운 의식의 틀, 즉 거의 보이지 않는 시야의 주변부를 제공하지 못했다. 이 특정한 과제를 달성하는 데에는 순례하는 크리올 관료들과 지방의 크리올 인쇄업자들이 결정적인 역사적 역할을 했다.
[출처] 베네딕트 앤더슨, 『상상된 공동체』
토론하기
(1) 행정 구역은 왜 크리올에게 특별한 의미를 가졌으며, 이것이 어떻게 그들이 자신들의 공동체를 하나의 ‘민족’으로 인식하게 만들었는지 설명해보자.
(2) 자신이 태어난 장소나 출신 배경 때문에 기회나 지위에서 제한받는다면, 그것이 개인의 소속감과 정체성 형성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3) 오늘날의 디지털 시대에 ‘인쇄 자본주의’에 해당하는 새로운 기술이나 매체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며, 이들이 현대 사회의 새로운 공동체나 집단 정체성을 어떻게 형성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해설읽기
크리올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보거나 들을 수 있는 단어는 아니다. 단어의 기원 자체가 스페인이 제국으로서 현재의 아메리카, 그 중 특히 라틴 아메리카를 지배했을 때 그곳에서 태어난 유럽인의 직계 혈통을 지칭하기 때문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현재 라틴 아메리카의 국가들은 유럽인이 도래하기 이전의 원주민과 이주한 유럽인 그리고 그들의 혼혈 후손들이 뒤섞인 인구 집단이 대부분이다. 여기에 아프리카에서 온 노예 및 그들과 다른 인종의 혼혈 후손까지 추가된다. 크리올은 백인이고 출생지를 제외하면 유럽, 즉 스페인의 백인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고 하겠다. 앤더슨이 극단적인 사례로 설명한 것처럼 어떤 사람이 스페인에서 어머니의 뱃속에서 태어나기 직전까지 있었더라도 스페인령 아메리카에서 태어났다면 그는 스페인 사람이 아니라 크리올이 된다. 그렇게 되면 그는 스페인 백인에 비해 일생에 걸쳐 큰 차별을 겪게 되고, 그것이 라틴 아메리카에서 민족주의가 선구적으로 발생하게 된 큰 이유가 된다는 것이 앤더슨이 이전의 다른 민족주의 연구와 차별화되는 지점이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유럽 국가 중 선구적인 해양 제국이었고, 그들의 해외 식민지 확장 경쟁은 교황의 중재가 필요했다. 그래서 1494년 교황의 중재 하에 토르데시야스 조약이 맺어져 라틴 아메리카에서 현재의 브라질이 포르투갈의 영토가 되고 그 왼쪽은 스페인의 영토가 되었다. 즉 라틴 아메리카는 원래 크게 두 개의 영역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대략 3백 년의 시간이 지났는데 갑자기 19세기가 되면 이 지역에 수많은 독립 국가들이 형성되었고, 이는 민족적 열정의 결과였다. 이베리아반도의 스페인 사람에 비해 차별을 받아온 크리올들이 이때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이 앤더슨의 생각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지점은 새롭게 생겨난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이 스페인령 아메리카 시절의 행정 구역을 경계로 형성되었다는 대목이다. 스페인, 포르투갈인이 도래하기 이전 아메리카에 원주민들이 살았고, 이들에게는 잉카 제국 같은 나름의 독특한 국가 형태가 있었지만 현재 국경처럼 구분되어 살지는 않았다. 스페인 제국이 자의적이고 우연하게 만들어낸 라틴 아메리카의 경계가 오랜 시간이 지나며 하나의 실체가 되어 결국 독립의 시기가 왔을 때 그 경계에 따라 별개의 국가들이 만들어졌다. 이렇게 된 이유 중 하나는 나중에 개별 국가가 될 각 행정구역의 크리올 관리들이 다른 지역으로 자유롭게 이동할 수 없었던 장벽 때문이었다. 가령 멕시코 지역의 크리올 관리면 평생을 멕시코 지역 내에서 근무하게 되었고, 거의 자연스럽게 그 지역에 얽매인 정체성을 형성하게 되었으리라는 추측이다. 그리고 크리올은 스페인 본토에서 태어난 백인과 자신이 여러 부분에서 거의 차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자신이 멕시코 지역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더 좋은 자리인 스페인 본토의 관리가 될 수 없다는 불만을 쌓아가며 나중에 민족적 감정을 행정단위에 따라 형성하는 동력을 만들었다.
하지만 앤더슨은 크리올의 유리천장 같은 승진의 한계와 드넓은 스페인령 아메리카 중 특정 지역 내에서만 순환 근무가 가능한 지역적 한계만으로 민족 의식이 형성되었다고 보지 않는다. 그가 『상상된 공동체』에서 계속 강조하는 인쇄 자본주의가 아메리카 지역에서도 민족 의식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우리는 루터의 종교개혁이 인쇄술의 발달에 힘입었다는 점을 알고 있다. 같은 글을 빠른 시간 안에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은 근대가 이전과 크게 달라진 점이다. 글 중에서도 신문의 등장이 앤더슨의 인쇄 자본주의 논의에서 중요하게 다뤄진다. 지금도 신문에는 해당 국가의 소식 외에 세계 각지의 뉴스가 포함되지만, 신문이 기본적으로 다루는 범위는 국가 단위인 경우가 많다. 독립 이전 스페인령 아메리카에서는 18세기 후반에 처음 현지 언론이 등장했고, 앤더슨은 이 신문들에서 다루는 식민지의 정치·경제 상황을 통해 같은 신문을 읽는 동료 독자들이 상상된 공동체를 형성하였다고 본다.
키워드
베네딕트 앤더슨, 민족, 스페인, 아메리카, 인쇄 자본주의, 크리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