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맥락
드메아는 전통적인 신학적 입장을 대변하며 신앙의 권위를 강조하고, 클레안테스는 경험적 근거에 바탕을 둔 ‘설계 논증’을 옹호한다. 반면 필로는 회의주의자의 입장에서 두 입장을 모두 비판하면서, 인간 이성의 한계를 강조한다. 작품 전체는 세 사람의 논쟁이 교차하는 형식을 띠지만, 결론으로 갈수록 필로의 회의주의적 입장이 점점 더 설득력을 얻게 된다.
클레안테스는 우리가 경험적으로 아는 바와 같이 기계에는 설계자가 있듯, 정교한 질서와 조화를 갖춘 세계 역시 반드시 설계자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맞서 필로는 첫째, 기계와 우주는 성격상 비교할 수 없으므로 유비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둘째, 만약 세계가 완전한 신의 작품이라면 이토록 많은 악과 불완전함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느냐는 ‘악의 문제’를 제기한다. 셋째, 세계가 꼭 한 명의 전능한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가정할 이유는 없으며, 여러 신의 협력이나 미숙한 존재의 시도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넷째, 인간의 경험은 부분적 인과관계에 한정되어 있으므로, 우주의 기원이나 본성에 대해 확실한 지식을 얻을 수 없다고 강조한다. 따라서 신의 존재와 속성에 관한 논의는 필연적으로 추측일 뿐이며, 가장 현명한 태도는 판단을 유보하는 회의주의라는 것이다.
드메아와 클레안테스가 신 존재 증명의 전통적 논증들을 제시하는 동안, 필로는 차분하게 그 한계를 드러내며 인간 이성이 경험의 한계를 넘어서는 영역에 대해 확실한 결론을 내릴 수 없음을 부각시킨다. 발췌문에 담긴 비판들은 고대와 중세의 전통적인 신 존재 논증에 대한 근대적 회의주의를 대표하며, 동시에 근대 경험론 철학의 핵심을 집약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작품의 마지막에서도 흄은 결국 신의 존재를 이성적으로 증명하거나 부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결론내리며, 신 개념에 대해 철학은 겸허한 보류의 태도를 취해야 함을 강조한다.
고전본문
[...] 우리가 세상에서 관찰하는 질서와 조화가 반드시 하나의 지성적 설계자에 의해 생겨났다고 말할 수는 없다. 기계는 인간의 설계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아는 것이지만, 우주 전체에 대해서는 그런 경험을 전혀 갖고 있지 않다. 유비가 정당화되려면 두 사물 사이에 충분한 유사성이 있어야 하지만, 하나는 인간의 작은 작품이고 다른 하나는 무한히 방대한 우주이니, 이 둘을 단순히 비교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우리는 세계가 어떠한 방식으로 생겨났는지 직접 목격한 적이 없으며, 그 기원에 대한 확실한 지식을 얻을 수도 없다. 따라서 우주가 설계자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결론은 기껏해야 추측에 불과하다. [...]
[...] 만일 세계가 전능하고 완전히 선한 존재의 작품이라면, 어째서 자연 속에는 이토록 많은 고통과 악이 존재하는가? 인간의 삶은 불행과 재난으로 가득 차 있으며, 자연 질서 자체도 고통을 피할 수 없도록 짜여 있다. 이 모든 불완전함은 세계의 원인이 무한히 선하고 전능하다는 결론과 양립하기 어렵다. 오히려 우리는 경험을 통해 불완전하고 제한된 원인들만을 본다. 그러므로 세계의 원인을 굳이 완전무결한 존재로 상정할 필요는 없다. [...]
[...] 세계는 어쩌면 아직 완성되지 않은 시범작품이거나, 미숙한 신적 존재가 만든 초벌작품일지도 모른다. 혹은 여러 신들이 협력하여 만든 불완전한 산물일 수도 있다.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의 모습은 그런 추측을 배제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반드시 한 명의 전능한 신을 가정해야 한단 말인가? 우리가 관찰하는 세계의 상태는 그러한 결론을 뒷받침하지 않는다. [...]
[...] 우리가 감각과 경험을 통해 아는 것은 제한된 부분적 인과 관계뿐이다. 그런데 철학자들은 이런 경험적 자료로부터 우주의 전체적 원인을 추론하려 한다. 그러나 세계가 하나의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가정보다, 여러 신들이 협력했거나, 혹은 유한하고 불완전한 존재가 창조했다는 가정도 마찬가지로 가능하다. 우리의 경험은 그 어느 것도 확증하지 않는다. 오히려 세계에 존재하는 불완전함 때문에, 무한히 완전한 존재의 작품이라고 결론내리기는 더욱 어렵다. [...]
[...] 인간의 이성은 경험을 넘어서 확실한 결론에 도달할 수 없다. 그러나 신은 경험을 넘어서는 존재다. 따라서 우리는 신의 존재나 본성에 대해 어떤 확정적인 판단도 내릴 수 없다. 우리가 신에 대해 말할 때 내리는 결론들은 모두 추정이나 가능성에 불과하다. 이런 문제에 대해 가장 현명한 태도는 성급히 단정하지 않고, 회의적 태도로 판단을 보류하는 것이다. 신의 존재와 본성은 인간 이성의 한계를 넘어서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출전] 데이비드 흄, 『자연종교에 관한 대화』, 제2부, 제5부, 제6부, 제9부, 제12부
토론하기
(1) 흄은 왜 “우주와 기계의 유비”가 정당하지 않다고 보았는가? 흄은 인간 경험의 한계를 어떻게 설명하는가?
(2) 흄은 세상에 고통과 악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근거로, 전능하고 완전히 선한 신의 창조라는 결론을 비판했다. 이 논증이 ‘악의 문제’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설명해 보시오.
(3) 흄은 신의 존재와 본성 문제에서 성급한 단정을 피하고 회의적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 지혜라고 했다. 오늘날 과학·종교·사회 문제(예: 인공지능의 미래, 기후변화의 책임, 종교 간 갈등)와 관련해서도 이런 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가? 구체적인 예를 들어 토론해 봅시다.
해설읽기
흄이 『자연종교에 관한 대화』에서 견지하는 입장은 모든 인과 지식은 경험에서 온다는 것과 경험을 넘어선 추론은 ‘가능성’의 영역에 머문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 두 원칙이 설계 논증 비판(제2부), 악의 문제(제5부), 세계 불완전 가설(제6·9부), 그리고 최종 결론인 판단 유보(제12부)까지 일관된다. 흄은 신을 부정한다고 단언하지 않지만, 인간 이성의 한계 때문에 신을 확정적으로 논증할 수 없다고 본다.
제2부에서 흄은 설계 논증에 한계가 있음을 지적한다. 우주가 기계라는 것은 일종의 유비(비유적 유사성)에 의존하는 것인데, 유비가 성립하려면 비교 대상들 사이에 충분히 강한 유사성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시계·집 같은 인공물이 설계자의 산물이라는 경험적 연계를 잘 알고 있지만 우주 전체에 대해서는 그런 경험이 없다. 그러므로 기계에는 설계자가 있다는 습관적 연상(경험)은 우주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제5부에서 흄은 악의 문제를 지적한다. 세계에 고통·불행·재난이 광범하게 존재한다는 경험적 사실은 전능·전선(완전한 선)의 신 개념과 긴장을 빚는다. 세계가 완전한 지혜와 선을 가진 존재의 작품이라면, 왜 불필요해 보이는 잔혹함, 자연재해, 체계적 결핍이 반복되는가? 흄은 악이 존재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신은 없다’를 결론내리려고 한 것은 아니다. 경험이 보여주는 세계의 성격을 고려할 때, 원인을 “무한히 완전한 존재”로 규정하는 추론은 정당화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제6부에서 흄은 불완전한 세계 가설을 제시한다. 설계 가설을 쓰더라도, 가능한 결론은 다양하다는 것이다. 세계는 미숙한 장인의 초벌작일 수 있고, 여러 신의 협업 산물일 수 있으며(다신론적 가능성), 제한된 능력의 존재가 만들었을 수 있다. 이러한 대안들은 “설계자”라는 틀을 쓰되, 전능·전선의 단일한 신을 곧바로 도출하지 않는다. 핵심은: 경험이 허락하는 정보량이 너무 적어서, 하나의 거대한 결론으로 묶어내기 어렵다는 것이다.
제9부에서 흄은 경쟁 가설들 중 경험이 어느 쪽 손도 들어주지 않는다고 논증한다. 단일한 무한자(유일신)뿐 아니라 다신론, 유한신론 등 다양한 가설이 논리적으로 가능하지만 우리의 경험 자료는 그 어느 쪽에도 결정적 증거를 주지 않는다. 여기서 흄은 가설의 과잉을 제시하여 독자로 하여금 왜 꼭 전능·전선의 신이어야 하는지 묻게 한다. 즉, 유비 추론의 빈약함과 경험의 제약을 동시에 부각시킨다. 즉, 가설들은 난립하지만, 경험이 가려주지 않으므로 철학자는 단정을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제12부는 논의의 결말이다. 모든 인간 지식은 확률에 기대며, 그 확률은 경험을 기반으로 하지만, 신은 경험 밖에 있으니 확실한 결론을 내릴 수 없다는 것이 흄의 입장이다. 정리하자면, 흄의 제안은 회의적 중립이다. 성급한 긍정도, 성급한 부정도 피하며, 판단을 보류하고, 인간 이성의 능력 범위를 자각하라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소극적 태도가 아니라, 지적 겸손이자 방법론적 규율로 볼 수 있다. 이는 “경험으로 뒷받침되지 않는 경우, 철학은 한 걸음 물러서야 한다”는 원칙을 보여준다.
키워드
악의 문제, 불완전한 세계, 이성의 한계, 회의주의, 신 존재 증명
전후맥락
드메아는 전통적인 신학적 입장을 대변하며 신앙의 권위를 강조하고, 클레안테스는 경험적 근거에 바탕을 둔 ‘설계 논증’을 옹호한다. 반면 필로는 회의주의자의 입장에서 두 입장을 모두 비판하면서, 인간 이성의 한계를 강조한다. 작품 전체는 세 사람의 논쟁이 교차하는 형식을 띠지만, 결론으로 갈수록 필로의 회의주의적 입장이 점점 더 설득력을 얻게 된다.
클레안테스는 우리가 경험적으로 아는 바와 같이 기계에는 설계자가 있듯, 정교한 질서와 조화를 갖춘 세계 역시 반드시 설계자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맞서 필로는 첫째, 기계와 우주는 성격상 비교할 수 없으므로 유비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둘째, 만약 세계가 완전한 신의 작품이라면 이토록 많은 악과 불완전함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느냐는 ‘악의 문제’를 제기한다. 셋째, 세계가 꼭 한 명의 전능한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가정할 이유는 없으며, 여러 신의 협력이나 미숙한 존재의 시도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넷째, 인간의 경험은 부분적 인과관계에 한정되어 있으므로, 우주의 기원이나 본성에 대해 확실한 지식을 얻을 수 없다고 강조한다. 따라서 신의 존재와 속성에 관한 논의는 필연적으로 추측일 뿐이며, 가장 현명한 태도는 판단을 유보하는 회의주의라는 것이다.
드메아와 클레안테스가 신 존재 증명의 전통적 논증들을 제시하는 동안, 필로는 차분하게 그 한계를 드러내며 인간 이성이 경험의 한계를 넘어서는 영역에 대해 확실한 결론을 내릴 수 없음을 부각시킨다. 발췌문에 담긴 비판들은 고대와 중세의 전통적인 신 존재 논증에 대한 근대적 회의주의를 대표하며, 동시에 근대 경험론 철학의 핵심을 집약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작품의 마지막에서도 흄은 결국 신의 존재를 이성적으로 증명하거나 부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결론내리며, 신 개념에 대해 철학은 겸허한 보류의 태도를 취해야 함을 강조한다.
고전본문
[...] 우리가 세상에서 관찰하는 질서와 조화가 반드시 하나의 지성적 설계자에 의해 생겨났다고 말할 수는 없다. 기계는 인간의 설계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아는 것이지만, 우주 전체에 대해서는 그런 경험을 전혀 갖고 있지 않다. 유비가 정당화되려면 두 사물 사이에 충분한 유사성이 있어야 하지만, 하나는 인간의 작은 작품이고 다른 하나는 무한히 방대한 우주이니, 이 둘을 단순히 비교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우리는 세계가 어떠한 방식으로 생겨났는지 직접 목격한 적이 없으며, 그 기원에 대한 확실한 지식을 얻을 수도 없다. 따라서 우주가 설계자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결론은 기껏해야 추측에 불과하다. [...]
[...] 만일 세계가 전능하고 완전히 선한 존재의 작품이라면, 어째서 자연 속에는 이토록 많은 고통과 악이 존재하는가? 인간의 삶은 불행과 재난으로 가득 차 있으며, 자연 질서 자체도 고통을 피할 수 없도록 짜여 있다. 이 모든 불완전함은 세계의 원인이 무한히 선하고 전능하다는 결론과 양립하기 어렵다. 오히려 우리는 경험을 통해 불완전하고 제한된 원인들만을 본다. 그러므로 세계의 원인을 굳이 완전무결한 존재로 상정할 필요는 없다. [...]
[...] 세계는 어쩌면 아직 완성되지 않은 시범작품이거나, 미숙한 신적 존재가 만든 초벌작품일지도 모른다. 혹은 여러 신들이 협력하여 만든 불완전한 산물일 수도 있다.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의 모습은 그런 추측을 배제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반드시 한 명의 전능한 신을 가정해야 한단 말인가? 우리가 관찰하는 세계의 상태는 그러한 결론을 뒷받침하지 않는다. [...]
[...] 우리가 감각과 경험을 통해 아는 것은 제한된 부분적 인과 관계뿐이다. 그런데 철학자들은 이런 경험적 자료로부터 우주의 전체적 원인을 추론하려 한다. 그러나 세계가 하나의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가정보다, 여러 신들이 협력했거나, 혹은 유한하고 불완전한 존재가 창조했다는 가정도 마찬가지로 가능하다. 우리의 경험은 그 어느 것도 확증하지 않는다. 오히려 세계에 존재하는 불완전함 때문에, 무한히 완전한 존재의 작품이라고 결론내리기는 더욱 어렵다. [...]
[...] 인간의 이성은 경험을 넘어서 확실한 결론에 도달할 수 없다. 그러나 신은 경험을 넘어서는 존재다. 따라서 우리는 신의 존재나 본성에 대해 어떤 확정적인 판단도 내릴 수 없다. 우리가 신에 대해 말할 때 내리는 결론들은 모두 추정이나 가능성에 불과하다. 이런 문제에 대해 가장 현명한 태도는 성급히 단정하지 않고, 회의적 태도로 판단을 보류하는 것이다. 신의 존재와 본성은 인간 이성의 한계를 넘어서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출전] 데이비드 흄, 『자연종교에 관한 대화』, 제2부, 제5부, 제6부, 제9부, 제12부
토론하기
(1) 흄은 왜 “우주와 기계의 유비”가 정당하지 않다고 보았는가? 흄은 인간 경험의 한계를 어떻게 설명하는가?
(2) 흄은 세상에 고통과 악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근거로, 전능하고 완전히 선한 신의 창조라는 결론을 비판했다. 이 논증이 ‘악의 문제’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설명해 보시오.
(3) 흄은 신의 존재와 본성 문제에서 성급한 단정을 피하고 회의적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 지혜라고 했다. 오늘날 과학·종교·사회 문제(예: 인공지능의 미래, 기후변화의 책임, 종교 간 갈등)와 관련해서도 이런 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가? 구체적인 예를 들어 토론해 봅시다.
해설읽기
흄이 『자연종교에 관한 대화』에서 견지하는 입장은 모든 인과 지식은 경험에서 온다는 것과 경험을 넘어선 추론은 ‘가능성’의 영역에 머문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 두 원칙이 설계 논증 비판(제2부), 악의 문제(제5부), 세계 불완전 가설(제6·9부), 그리고 최종 결론인 판단 유보(제12부)까지 일관된다. 흄은 신을 부정한다고 단언하지 않지만, 인간 이성의 한계 때문에 신을 확정적으로 논증할 수 없다고 본다.
제2부에서 흄은 설계 논증에 한계가 있음을 지적한다. 우주가 기계라는 것은 일종의 유비(비유적 유사성)에 의존하는 것인데, 유비가 성립하려면 비교 대상들 사이에 충분히 강한 유사성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시계·집 같은 인공물이 설계자의 산물이라는 경험적 연계를 잘 알고 있지만 우주 전체에 대해서는 그런 경험이 없다. 그러므로 기계에는 설계자가 있다는 습관적 연상(경험)은 우주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제5부에서 흄은 악의 문제를 지적한다. 세계에 고통·불행·재난이 광범하게 존재한다는 경험적 사실은 전능·전선(완전한 선)의 신 개념과 긴장을 빚는다. 세계가 완전한 지혜와 선을 가진 존재의 작품이라면, 왜 불필요해 보이는 잔혹함, 자연재해, 체계적 결핍이 반복되는가? 흄은 악이 존재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신은 없다’를 결론내리려고 한 것은 아니다. 경험이 보여주는 세계의 성격을 고려할 때, 원인을 “무한히 완전한 존재”로 규정하는 추론은 정당화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제6부에서 흄은 불완전한 세계 가설을 제시한다. 설계 가설을 쓰더라도, 가능한 결론은 다양하다는 것이다. 세계는 미숙한 장인의 초벌작일 수 있고, 여러 신의 협업 산물일 수 있으며(다신론적 가능성), 제한된 능력의 존재가 만들었을 수 있다. 이러한 대안들은 “설계자”라는 틀을 쓰되, 전능·전선의 단일한 신을 곧바로 도출하지 않는다. 핵심은: 경험이 허락하는 정보량이 너무 적어서, 하나의 거대한 결론으로 묶어내기 어렵다는 것이다.
제9부에서 흄은 경쟁 가설들 중 경험이 어느 쪽 손도 들어주지 않는다고 논증한다. 단일한 무한자(유일신)뿐 아니라 다신론, 유한신론 등 다양한 가설이 논리적으로 가능하지만 우리의 경험 자료는 그 어느 쪽에도 결정적 증거를 주지 않는다. 여기서 흄은 가설의 과잉을 제시하여 독자로 하여금 왜 꼭 전능·전선의 신이어야 하는지 묻게 한다. 즉, 유비 추론의 빈약함과 경험의 제약을 동시에 부각시킨다. 즉, 가설들은 난립하지만, 경험이 가려주지 않으므로 철학자는 단정을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제12부는 논의의 결말이다. 모든 인간 지식은 확률에 기대며, 그 확률은 경험을 기반으로 하지만, 신은 경험 밖에 있으니 확실한 결론을 내릴 수 없다는 것이 흄의 입장이다. 정리하자면, 흄의 제안은 회의적 중립이다. 성급한 긍정도, 성급한 부정도 피하며, 판단을 보류하고, 인간 이성의 능력 범위를 자각하라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소극적 태도가 아니라, 지적 겸손이자 방법론적 규율로 볼 수 있다. 이는 “경험으로 뒷받침되지 않는 경우, 철학은 한 걸음 물러서야 한다”는 원칙을 보여준다.
키워드
악의 문제, 불완전한 세계, 이성의 한계, 회의주의, 신 존재 증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