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맥락
아테네 성 밖 강가에서 파이드로스가 리시아스의 연애 연설을 들려주자, 소크라테스는 첫 연설로 “사랑하지 않는 자가 유리하다”는 논지를 풍자적으로 따라 했다가(능변의 모방), 두 번째 연설(팔리노디아)에서 이를 취소하고 ‘신적 광기’—특히 에로스—가 영혼을 진리에로 이끈다고 주장한다(244a–257b). 이어 소크라테스는 수사학 논의로 넘어가, 당시의 수사학 교본(티시아스류)이 기교만 가르친다고 비판하며, 참된 수사학은 (i) 대상에 대한 참지식과 (ii) 영혼의 유형에 대한 지식을 결합해 적절한 말-배분을 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 기술의 핵심이 바로 ‘수집과 분할’(synagōgē/diairesis), 곧 정의 내리고, 자연의 마디를 따라 가르는 방법(265c)이다. 이 방법론적 전환이 정리되자, 소크라테스는 “그렇다면 글로 된 것과 말로 된 것은 어떻게 다뤄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곧장 문자·글쓰기 비판(274b–)으로 들어간다. 즉, ‘좋은 연설’의 조건을 탐색하다가, 이제 그 연설을 담는 매체의 규범을 따지는 대목으로 넘어온 것이다.
문자 비판이 곧 금지를 뜻하지는 않는다. 소크라테스는 글의 정당한 용도를 “놀이·기념·상기”로 위치 조정하고, 진지한 교육은 대화적 변증에 두라고 정리한다(278b). 이어 당대 말 잘하는 이들—리시아스 같은 로고그래포스(연설문 작가)—에게 참된 철학적 수련을 권한다. 특히 이소크라테스에 대해선 “말의 덕을 지녔을 뿐 아니라 마음씨도 훌륭하니, 그는 장차 수사학을 넘어 철학에 이를 수 있다”는 예언적 평가를 덧붙인다(278e–279a). 마지막으로 두 사람은 도시로 돌아가기 전 판 신에게 기도하며(279b–c), 밖에서의 대화를 마무리한다. 이렇게 『파이드로스』는 연애 연설의 미학에서 출발해 영혼론, 수사학의 방법, 그리고 매체(문자) 규범을 거쳐 철학적 말하기의 윤리로 귀결된다. 중심 장면(274b–278b)은 그 중에서도 “말의 기술화”가 낳는 이득과 손실을 가늠하고, 글쓰기의 자리를 재배치하는 결절점이다.
고전본문
- 소크라테스: […] 그러니 이제 글쓰기(문자)와 말하기(연설)에 관해 남은 일을 살펴보자. 글로 된 것과 말로 된 것, 그리고 그것들이 어떻게 적절히 사용되어야 하는지 말이다.
이집트에서 전해지는 옛 이야기가 있다네. 그곳의 나우크라리스(Naukratis)라는 도시 근처에 테우트(Theuth)라는 신이 있었는데, 그는 수·계산·기하·천문뿐 아니라 장기·주사위, 그리고 무엇보다 문자(글자)를 발명했다네. 그가 자신의 발명을 이집트의 왕 타무스(Thamus)에게 보여 주며 가르침으로 삼게 해 달라고 하자, 특히 문자에 관해 이렇게 말했지. “왕이여, 이 지혜는 이집트 사람들을 더 현명하게 만들고, 기억을 강하게 해 줄 것입니다. 내가 발견한 처방은 기억과 지혜의 약(φάρμακον) 입니다.”
그러자 타무스가 대답했지. “오 테우트여, 각 기술의 아버지는 그 기술이 사람들에게 가져올 이익이 무엇인지 말하기 쉬우나, 그 해악이 무엇인지는 판단자가 더 잘 아는 법이오. 그대는 문자에 관하여, 그것이 배우는 자들의 기억을 증진시킨다고 말했으나, 실상 그것은 영혼 속의 기억을 잊게 하는 것일 것이오. 사람들은 필사(글자)에 의존하여 바깥의 표시를 통해 기억하려 들고, 자기 자신 안에서 기억을 훈련하지 않을 것이오. 그러니 그대가 발견한 것은 기억의 약이 아니라 상기(ὑπόμνησις)에 불과하오. 또한 그대는 제자들에게 지혜를 주리라 했으나, 그들은 많은 것을 배웠다는 외형만 갖추게 될 뿐이오. 그들은 실제로는 대부분 아무 것도 알지 못하면서, 여러 말들을 쉽게 접했기 때문에 지혜로운 체하는 사람들이 될 것이오.”
게다가 글쓰기는 그림과 같네. 그림은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누가 묻더라도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듯, 글도 그러하네. 한 번 쓰여진 글은 한 가지 말만 되풀이할 뿐, 읽는 이가 무엇을 묻든 스스로 해명하지 못하지. 또 글은 누구에게나 굴러가(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제 뜻을 모르는 이들 앞에도 나타나네. 그들이 글을 모욕하든 부당하게 비난하든, 글은 자기 자신을 도와줄 수 없고, 늘 그 글을 쓴 아버지의 도움이 필요하네.
그러나 다른 종류의 말이 있네. 글보다 나은 것, 곧 배우는 자의 영혼에 앎과 함께 써 넣어지는 말이오. 그런 말은 스스로를 변호할 줄 알고, 누구에게 말해야 하고 누구에겐 침묵해야 하는지도 분별하지. 현명한 농부는 애도니스의 정원처럼 얕은 흙에 급히 발아했다 곧 시드는 밭에 씨를 뿌리지 않네. 그는 적절한 계절과 기후를 기다려 적합한 땅에 씨앗을 심고, 거기서 열매를 거두네. 마찬가지로 현자는 종이에다 글을 심어 즐길 거리나 상기의 표로 삼을 뿐, 진지한 가르침은 영혼의 밭에 변증(변론)으로 씨를 심어 자라게 하네.
그러니 참된 글쓰기란 문자에 쓰는 것이 아니라 영혼에 쓰는 것이네. 그것도 앎을 동반하여, 배우는 이의 내면에 산 말씀(ζῶν λόγος)으로 심어지는 것 말일세. 이런 말은 자기 자신도 말할 줄 알고, 또한 심은 이(스승)도 도울 줄 알지. 내가 ‘글쓰기’와 ‘가르침’이라고 부를 만한 것은 바로 이런 종류의 작업일세. 반대로, 문자에 쓰는 글은 그저 상기의 도구요, 그가 자기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이들을 위해 남겨 둔 놀이 같은 것이네—자기를 잊지 않도록, 나중에 되돌아보게 하려는 표지일 뿐. 그런 글은 공중의 호응을 얻으려는 것이 아니네. 마치 미술가가 ‘무엇이 아름다움인가’를 작품으로 주장할 수는 있어도, 반문에 응답하며 설명할 수는 없듯이 말일세.
[출전] 플라톤, 『파이드로스』 274b–278b
토론하기
(1) 소크라테스가 말한 글쓰기의 장점과 단점을 각각 한 가지씩 적어 보시오. 그리고 “글은 그림과 같다”라는 비유가 뜻하는 글의 한계를 한 문장으로 설명하시오.
(2) 평소에 쓰는 외부기억 도구(메모앱, 사진 캡처, 북마크, 요약본 등) 중 하나를 골라, 그것이 공부에 주는 도움 한 가지와 부작용 한 가지를 적으시오. 부작용을 줄이기 위한 ‘살아 있는 말’ 활동(예: 친구에게 설명하기, 5문제 퀴즈 만들기, 짧은 발표) 중 오늘 바로 할 수 있는 실천 한 가지를 구체적으로 적으시오.
(3) 학교나 온라인에서 공지/과제 안내 같은 글이 오해되기 쉬운 이유를 한 가지 쓰고, 그 오해를 줄이기 위해 글에 ‘살아 있는 말’ 요소를 보태는 방법 두 가지를 제안하시오. (예: 질의응답 시간 확보, 댓글 규칙과 답변 마감 표시, 요약 확인란 추가, 대표 질문 예시 제공 등).
해설읽기
앞부분(수사학 비판)에서 소크라테스는 ‘좋은 연설’의 조건을 대상에 대한 참지식과 청자의 영혼에 대한 지식(누구에게, 언제, 어떻게 말할지)로 규정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제 그 지식을 실어 나르는 매체(말/글)의 규범을 따지는 대목으로 넘어간다. 즉 이 단락은 내용의 진리성과 수사적 기교 이후, 매체의 적합성을 심문한다.
새 기술은 스스로 효용을 과장하기 쉽고, 판단자는 효용과 해악을 함께 헤아려야 한다는 교훈을 전한다. 문자 발명자는 ‘지혜·기억의 약’이라 주장하지만, 왕은 기억을 약화시키고 지혜의 외양만 준다고 반박한다. 여기서 핵심어 φάρμακον(파르마콘) 은 ‘약/독/부적’의 양의성을 지닌다. 문자는 상황에 따라 치유가 되기도, 독이 되기도 한다는 점을 전제한다.
왕의 평결은 문자를 ‘내적 기억’의 훈련을 대체할 수 없는 보조기억으로 위치시킨다. 외적 표지(문자·기록)에 의존하면 ‘알고 있다’는 느낌(정보 접근성) 과 진짜 앎(내면화된 통찰) 이 분리된다. 문자의 정당성은 부정되지 않지만, 훈련 없는 의존을 경계한다.
‘그림은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는 비유는 텍스트의 비대화성을 겨냥한다. 글은 항변·해명·수정을 스스로 수행하지 못하고 “항상 같은 말만” 되풀이한다. 또한 텍스트는 임의의 독자에게 무차별 노출되어 오독·남용을 당할 위험이 있다. 여기서 소크라테스가 겨냥하는 것은 고정물로서의 말(γραπτά) 이 갖는 구조적 제약이다.
글은 스스로를 도울 수 없고 저자의 변호를 필요로 한다. 이는 텍스트가 언제나 해석 공동체(저자·교사·주석·대화)를 통해 살아난다는 통찰로도 읽힌다. 주석·대화·코멘터리는 글의 응답 불능성을 부분 보완하는 제도적 장치다.
소크라테스가 제시하는 대안은 영혼에 새겨지는 말(ζῶν λόγος) 이다. 핵심은 누구에게/언제/어떻게 말할지 분별하는 능력(카이로스와 프뢰네시스)과 자기변호·상호작용이 가능한 대화적 말이다. 애도니스의 정원(얕은 흙, 빨리 싹→금세 시듦) 은 겉핥기 학습·즉효의 교술을 가리킨다. 반대로 “영혼의 밭”에 씨를 뿌린다는 은유는 지체·반복·돌봄을 통한 내면화를 뜻한다.
소크라테스는 문자를 전면 부정하지 않는다. “문자에 쓰는 글”은 상기와 기록의 도구, 기념·놀이(paidiá) 로 정당화된다. 반면 진지한 가르침(spoudē) 은 대화적 변증—영혼에 쓰는 글쓰기—에 속한다. 매체 금지가 아니라 용도·목적에 따른 위계 조정이다.
참된 기술은 진리의 식별(정의/비정/중간)과 영혼의 구분(누구에게 어떤 논증을 줄 것인가)을 결합한다. 변증술은 논증 생산 기술이 아니라 영혼 인도(psychagōgia) 의 기술이며, 수집과 분할(synagōgē/diairesis)이라는 방법으로 구체화된다(앞 절 265c와 직결).
‘플라톤은 왜 글을 쓰는가?’라는 전통적 이의제기에 이 대목은 답한다. 플라톤은 글의 존재 이유를 ‘상기·기념·놀이’로 인정하면서도, 철학적 앎의 전달은 대화적 상호작용 없이는 성립하지 않는다고 본다. 따라서 텍스트는 대화로 이어지도록 설계되어야 하며(질문을 촉발하는 구성), 주석·토론·강의가 이를 보완한다.
키워드
기억, 상기, 변증술, 살아있는 말, 글은 그림
전후맥락
아테네 성 밖 강가에서 파이드로스가 리시아스의 연애 연설을 들려주자, 소크라테스는 첫 연설로 “사랑하지 않는 자가 유리하다”는 논지를 풍자적으로 따라 했다가(능변의 모방), 두 번째 연설(팔리노디아)에서 이를 취소하고 ‘신적 광기’—특히 에로스—가 영혼을 진리에로 이끈다고 주장한다(244a–257b). 이어 소크라테스는 수사학 논의로 넘어가, 당시의 수사학 교본(티시아스류)이 기교만 가르친다고 비판하며, 참된 수사학은 (i) 대상에 대한 참지식과 (ii) 영혼의 유형에 대한 지식을 결합해 적절한 말-배분을 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 기술의 핵심이 바로 ‘수집과 분할’(synagōgē/diairesis), 곧 정의 내리고, 자연의 마디를 따라 가르는 방법(265c)이다. 이 방법론적 전환이 정리되자, 소크라테스는 “그렇다면 글로 된 것과 말로 된 것은 어떻게 다뤄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곧장 문자·글쓰기 비판(274b–)으로 들어간다. 즉, ‘좋은 연설’의 조건을 탐색하다가, 이제 그 연설을 담는 매체의 규범을 따지는 대목으로 넘어온 것이다.
문자 비판이 곧 금지를 뜻하지는 않는다. 소크라테스는 글의 정당한 용도를 “놀이·기념·상기”로 위치 조정하고, 진지한 교육은 대화적 변증에 두라고 정리한다(278b). 이어 당대 말 잘하는 이들—리시아스 같은 로고그래포스(연설문 작가)—에게 참된 철학적 수련을 권한다. 특히 이소크라테스에 대해선 “말의 덕을 지녔을 뿐 아니라 마음씨도 훌륭하니, 그는 장차 수사학을 넘어 철학에 이를 수 있다”는 예언적 평가를 덧붙인다(278e–279a). 마지막으로 두 사람은 도시로 돌아가기 전 판 신에게 기도하며(279b–c), 밖에서의 대화를 마무리한다. 이렇게 『파이드로스』는 연애 연설의 미학에서 출발해 영혼론, 수사학의 방법, 그리고 매체(문자) 규범을 거쳐 철학적 말하기의 윤리로 귀결된다. 중심 장면(274b–278b)은 그 중에서도 “말의 기술화”가 낳는 이득과 손실을 가늠하고, 글쓰기의 자리를 재배치하는 결절점이다.
고전본문
- 소크라테스: […] 그러니 이제 글쓰기(문자)와 말하기(연설)에 관해 남은 일을 살펴보자. 글로 된 것과 말로 된 것, 그리고 그것들이 어떻게 적절히 사용되어야 하는지 말이다.
이집트에서 전해지는 옛 이야기가 있다네. 그곳의 나우크라리스(Naukratis)라는 도시 근처에 테우트(Theuth)라는 신이 있었는데, 그는 수·계산·기하·천문뿐 아니라 장기·주사위, 그리고 무엇보다 문자(글자)를 발명했다네. 그가 자신의 발명을 이집트의 왕 타무스(Thamus)에게 보여 주며 가르침으로 삼게 해 달라고 하자, 특히 문자에 관해 이렇게 말했지. “왕이여, 이 지혜는 이집트 사람들을 더 현명하게 만들고, 기억을 강하게 해 줄 것입니다. 내가 발견한 처방은 기억과 지혜의 약(φάρμακον) 입니다.”
그러자 타무스가 대답했지. “오 테우트여, 각 기술의 아버지는 그 기술이 사람들에게 가져올 이익이 무엇인지 말하기 쉬우나, 그 해악이 무엇인지는 판단자가 더 잘 아는 법이오. 그대는 문자에 관하여, 그것이 배우는 자들의 기억을 증진시킨다고 말했으나, 실상 그것은 영혼 속의 기억을 잊게 하는 것일 것이오. 사람들은 필사(글자)에 의존하여 바깥의 표시를 통해 기억하려 들고, 자기 자신 안에서 기억을 훈련하지 않을 것이오. 그러니 그대가 발견한 것은 기억의 약이 아니라 상기(ὑπόμνησις)에 불과하오. 또한 그대는 제자들에게 지혜를 주리라 했으나, 그들은 많은 것을 배웠다는 외형만 갖추게 될 뿐이오. 그들은 실제로는 대부분 아무 것도 알지 못하면서, 여러 말들을 쉽게 접했기 때문에 지혜로운 체하는 사람들이 될 것이오.”
게다가 글쓰기는 그림과 같네. 그림은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누가 묻더라도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듯, 글도 그러하네. 한 번 쓰여진 글은 한 가지 말만 되풀이할 뿐, 읽는 이가 무엇을 묻든 스스로 해명하지 못하지. 또 글은 누구에게나 굴러가(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제 뜻을 모르는 이들 앞에도 나타나네. 그들이 글을 모욕하든 부당하게 비난하든, 글은 자기 자신을 도와줄 수 없고, 늘 그 글을 쓴 아버지의 도움이 필요하네.
그러나 다른 종류의 말이 있네. 글보다 나은 것, 곧 배우는 자의 영혼에 앎과 함께 써 넣어지는 말이오. 그런 말은 스스로를 변호할 줄 알고, 누구에게 말해야 하고 누구에겐 침묵해야 하는지도 분별하지. 현명한 농부는 애도니스의 정원처럼 얕은 흙에 급히 발아했다 곧 시드는 밭에 씨를 뿌리지 않네. 그는 적절한 계절과 기후를 기다려 적합한 땅에 씨앗을 심고, 거기서 열매를 거두네. 마찬가지로 현자는 종이에다 글을 심어 즐길 거리나 상기의 표로 삼을 뿐, 진지한 가르침은 영혼의 밭에 변증(변론)으로 씨를 심어 자라게 하네.
그러니 참된 글쓰기란 문자에 쓰는 것이 아니라 영혼에 쓰는 것이네. 그것도 앎을 동반하여, 배우는 이의 내면에 산 말씀(ζῶν λόγος)으로 심어지는 것 말일세. 이런 말은 자기 자신도 말할 줄 알고, 또한 심은 이(스승)도 도울 줄 알지. 내가 ‘글쓰기’와 ‘가르침’이라고 부를 만한 것은 바로 이런 종류의 작업일세. 반대로, 문자에 쓰는 글은 그저 상기의 도구요, 그가 자기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이들을 위해 남겨 둔 놀이 같은 것이네—자기를 잊지 않도록, 나중에 되돌아보게 하려는 표지일 뿐. 그런 글은 공중의 호응을 얻으려는 것이 아니네. 마치 미술가가 ‘무엇이 아름다움인가’를 작품으로 주장할 수는 있어도, 반문에 응답하며 설명할 수는 없듯이 말일세.
[출전] 플라톤, 『파이드로스』 274b–278b
토론하기
(1) 소크라테스가 말한 글쓰기의 장점과 단점을 각각 한 가지씩 적어 보시오. 그리고 “글은 그림과 같다”라는 비유가 뜻하는 글의 한계를 한 문장으로 설명하시오.
(2) 평소에 쓰는 외부기억 도구(메모앱, 사진 캡처, 북마크, 요약본 등) 중 하나를 골라, 그것이 공부에 주는 도움 한 가지와 부작용 한 가지를 적으시오. 부작용을 줄이기 위한 ‘살아 있는 말’ 활동(예: 친구에게 설명하기, 5문제 퀴즈 만들기, 짧은 발표) 중 오늘 바로 할 수 있는 실천 한 가지를 구체적으로 적으시오.
(3) 학교나 온라인에서 공지/과제 안내 같은 글이 오해되기 쉬운 이유를 한 가지 쓰고, 그 오해를 줄이기 위해 글에 ‘살아 있는 말’ 요소를 보태는 방법 두 가지를 제안하시오. (예: 질의응답 시간 확보, 댓글 규칙과 답변 마감 표시, 요약 확인란 추가, 대표 질문 예시 제공 등).
해설읽기
앞부분(수사학 비판)에서 소크라테스는 ‘좋은 연설’의 조건을 대상에 대한 참지식과 청자의 영혼에 대한 지식(누구에게, 언제, 어떻게 말할지)로 규정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제 그 지식을 실어 나르는 매체(말/글)의 규범을 따지는 대목으로 넘어간다. 즉 이 단락은 내용의 진리성과 수사적 기교 이후, 매체의 적합성을 심문한다.
새 기술은 스스로 효용을 과장하기 쉽고, 판단자는 효용과 해악을 함께 헤아려야 한다는 교훈을 전한다. 문자 발명자는 ‘지혜·기억의 약’이라 주장하지만, 왕은 기억을 약화시키고 지혜의 외양만 준다고 반박한다. 여기서 핵심어 φάρμακον(파르마콘) 은 ‘약/독/부적’의 양의성을 지닌다. 문자는 상황에 따라 치유가 되기도, 독이 되기도 한다는 점을 전제한다.
왕의 평결은 문자를 ‘내적 기억’의 훈련을 대체할 수 없는 보조기억으로 위치시킨다. 외적 표지(문자·기록)에 의존하면 ‘알고 있다’는 느낌(정보 접근성) 과 진짜 앎(내면화된 통찰) 이 분리된다. 문자의 정당성은 부정되지 않지만, 훈련 없는 의존을 경계한다.
‘그림은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는 비유는 텍스트의 비대화성을 겨냥한다. 글은 항변·해명·수정을 스스로 수행하지 못하고 “항상 같은 말만” 되풀이한다. 또한 텍스트는 임의의 독자에게 무차별 노출되어 오독·남용을 당할 위험이 있다. 여기서 소크라테스가 겨냥하는 것은 고정물로서의 말(γραπτά) 이 갖는 구조적 제약이다.
글은 스스로를 도울 수 없고 저자의 변호를 필요로 한다. 이는 텍스트가 언제나 해석 공동체(저자·교사·주석·대화)를 통해 살아난다는 통찰로도 읽힌다. 주석·대화·코멘터리는 글의 응답 불능성을 부분 보완하는 제도적 장치다.
소크라테스가 제시하는 대안은 영혼에 새겨지는 말(ζῶν λόγος) 이다. 핵심은 누구에게/언제/어떻게 말할지 분별하는 능력(카이로스와 프뢰네시스)과 자기변호·상호작용이 가능한 대화적 말이다. 애도니스의 정원(얕은 흙, 빨리 싹→금세 시듦) 은 겉핥기 학습·즉효의 교술을 가리킨다. 반대로 “영혼의 밭”에 씨를 뿌린다는 은유는 지체·반복·돌봄을 통한 내면화를 뜻한다.
소크라테스는 문자를 전면 부정하지 않는다. “문자에 쓰는 글”은 상기와 기록의 도구, 기념·놀이(paidiá) 로 정당화된다. 반면 진지한 가르침(spoudē) 은 대화적 변증—영혼에 쓰는 글쓰기—에 속한다. 매체 금지가 아니라 용도·목적에 따른 위계 조정이다.
참된 기술은 진리의 식별(정의/비정/중간)과 영혼의 구분(누구에게 어떤 논증을 줄 것인가)을 결합한다. 변증술은 논증 생산 기술이 아니라 영혼 인도(psychagōgia) 의 기술이며, 수집과 분할(synagōgē/diairesis)이라는 방법으로 구체화된다(앞 절 265c와 직결).
‘플라톤은 왜 글을 쓰는가?’라는 전통적 이의제기에 이 대목은 답한다. 플라톤은 글의 존재 이유를 ‘상기·기념·놀이’로 인정하면서도, 철학적 앎의 전달은 대화적 상호작용 없이는 성립하지 않는다고 본다. 따라서 텍스트는 대화로 이어지도록 설계되어야 하며(질문을 촉발하는 구성), 주석·토론·강의가 이를 보완한다.
키워드
기억, 상기, 변증술, 살아있는 말, 글은 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