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맥락
데이비드 흄의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 제1권 제3부는 인간이 사실에 대해 어떻게 추론하는지를 집중적으로 다룬다. 발췌문 앞에서는 흄이 ‘관계의 종류들’을 구분하면서, 사실에 관한 모든 추론은 결국 인과 관계에 의존한다고 논증한다. 그는 감각이나 기억이 제공하는 직접적 증거를 넘어서서, 부재한 사실을 추론하는 과정이 반드시 어떤 다른 사실과의 연결을 전제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예컨대 무인도에서 시계를 발견했을 때, 사람은 그것을 만든 이가 존재했을 것이라고 추론하는데, 이런 추론은 단순한 관찰이 아니라 인과적 연결을 가정한 것이다.
발췌문이 끝난 뒤 이어지는 부분에서 흄은 이러한 추론이 왜 필연적이지 않고 단지 습관(habit)에 의해 형성되는지를 더 깊이 파고든다. 그는 귀납적 추론의 근거가 이성이나 논증에 있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인간의 마음이 반복된 경험을 통해 기대와 성향을 형성하는 심리적 메커니즘을 설명한다. 즉, 우리는 ‘어제 빵이 나를 먹여 살렸으니 오늘도 그럴 것이다’라고 믿지만, 이 믿음은 필연적 인과의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단순히 반복 경험에서 오는 정신적 습관에 불과하다.
따라서 흄의 논의 전체 맥락에서, 발췌문은 귀납의 한계와 습관의 역할을 설명하는 핵심 부분이다. 앞에서는 인과 추론이 사실 인식의 필수 조건임을 제시하고, 뒤에서는 그 인과 추론이 논리적 정당화가 아니라 습관에 의해 작동한다는 점을 결론짓는다. 이를 통해 흄은 귀납적 추론의 비합리성을 드러내면서도, 동시에 그것이 인간 인식에 불가피하게 작동하는 본성임을 보여준다.
고전본문
사실에 관한 모든 추론은 인과 관계에 근거하는 것으로 보인다. 오직 그 관계 덕분에 우리는 기억과 감각이 제공하는 증거를 넘어설 수 있다. 어떤 사람에게 왜 그가 부재한 어떤 사실을 믿는지 묻는다면, 이를테면 그의 친구가 시골에 있다거나 프랑스에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지 묻는다면, 그는 그 이유를 제시할 것이다. 그 이유란 또 다른 사실일 텐데, 예컨대 친구에게서 받은 편지라든가, 그가 이전에 내렸던 결심이나 약속에 대한 지식 같은 것이다. 사람이 무인도에서 시계나 다른 기계를 발견했다면, 그 섬에 언젠가 사람이 있었음을 결론지을 것이다. 사실에 관한 모든 우리의 추론은 이런 성격을 갖는다. 그리고 여기서 언제나 전제되는 것은, 현재의 사실과 그것으로부터 추론되는 사실 사이에 어떤 연결이 있다는 점이다. 만약 그 둘을 묶어주는 것이 전혀 없다면, 그 추론은 완전히 불안정할 것이다.
분명한 것은, 아담이 온갖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하더라도, 물의 유동성만으로 그것이 그를 질식시킬 수 있음을 추론할 수 없었을 것이며, 불의 빛과 따뜻함만으로 그것이 그를 태워버릴 것임을 추론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떤 대상도 감각에 나타나는 성질을 통해 그것을 만들어낸 원인이나, 거기서 발생할 결과를 드러내지 않는다. 마음은 아무리 세밀하게 조사하고 검토하더라도, 추정된 원인 속에서 그 효과를 결코 찾아낼 수 없다. 효과는 원인과 전적으로 다르며, 따라서 결코 그 속에서 발견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감각의 현재 증언이나 기억의 기록을 넘어, 실제 존재와 사실을 보증하는 증거의 성격을 알 수 있다. 이 모든 종류의 추론은 자연의 질서가 항상 동일하게 지속될 것이라는 가정에 근거하는 듯하다. 우리는 같은 원인이 같은 상황에서는 항상 같은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어제가 나를 먹여 살린 빵은 오늘도 역시 나를 먹여 살릴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러나 마음이 이런 추론을 할 수 있으려면, 그것이 정말로 이성과 논증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라면, 어떤 매개가 필요하다.
그 매개란 무엇인가? 그것은 과거와 미래의 연결, 양자의 유사성에 근거하는 어떤 일반 원리여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원리에 대해 어떤 논증이 가능할까? 만약 가능하다면, 그것은 기하학의 어떤 논증만큼 확실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감각은 현재를 넘어서는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고, 우리의 기억은 단지 과거의 경험으로만 우리를 데려간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경험한 특정한 경우를 넘어 우리의 경험을 확장해야만 하는가? 혹시 우리가 감각적 성질과 은밀한 힘 사이에서 필연적 연결을 본다고 상상하기 때문인가? 그러나 어떤 대상도 그런 힘을 드러낸 적은 없다.
따라서 이렇게 물어볼 수 있다. 경험으로부터 도출되는 모든 결론의 토대는 무엇인가? 모두가 인정하듯, 그것들은 추론이나 이성의 어떤 과정에 근거하지 않는다. 관습(custom), 혹은 습관(habit)이 인간 삶의 위대한 안내자이다. 오직 이 원리만이 우리의 경험을 우리에게 유용하게 만들고, 과거에 나타난 사건들과 유사한 사건들이 미래에도 이어질 것이라고 기대하게 만든다. 만약 습관의 영향이 없다면, 우리는 기억과 감각에 현재 주어진 사실 너머의 모든 사실에 대해 전적으로 무지할 것이다. 우리는 결코 수단을 목적에 맞추거나, 우리의 자연적 능력을 어떤 효과를 낳는 데 사용할 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어떤 특정한 행위나 작용의 반복이, 이성이나 이해의 어떤 과정에 의해 강제되지 않고, 동일한 행위나 작용을 다시 하도록 기울어지게 만들 때, 우리는 언제나 이 성향을 습관의 효과라고 말한다. 이 단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우리가 그러한 성향의 궁극적인 이유를 제시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단지 보편적으로 인정되고 그 효과로 잘 알려진 인간 본성의 한 원리를 지적할 뿐이다. 어쩌면 우리는 더 이상 탐구를 밀고 나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혹은 이 원인의 원인을 밝힐 수 있다고 가장할 수도 없다. 우리는 그것을 최종 원리로 받아들이고 만족할 수밖에 없다.
[출전] 데이비드 흄,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 제1권 오성의 관하여, 제3부 4절-5절
토론하기
(1) 흄은 “자연은 항상 동일한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가정이 이성적으로 입증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과학적 법칙(예: 물은 100℃에서 끓는다)은 단지 습관의 산물일 뿐일까? 과학적 지식의 확실성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2) 흄은 귀납을 정당화하는 대신, 습관(custom)이라는 심리적 원리에 의존한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인간의 인식은 본질적으로 비이성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면 이는 단지 이성의 한계를 인정하는 겸허한 태도일까?
(3) 흄의 귀납 문제는 칸트의 인식론(선험적 종합판단), 포퍼의 반증주의 등 이후 철학적 전개에 큰 영향을 주었다. 오늘날 빅데이터와 인공지능의 ‘패턴 학습’ 방식도 흄의 습관 개념과 유사한 점이 있는데, 현대 과학·기술의 맥락에서 흄의 통찰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
해설읽기
이 발췌문은 흄의 철학에서 가장 유명한 논점 중 하나인 귀납 문제(the problem of induction)를 잘 보여준다. 흄은 먼저 “사실에 관한 모든 추론은 인과 관계에 의존한다”고 말한다. 우리의 감각과 기억은 직접적으로만 세계를 알려주며, 눈앞에 있지 않은 사실이나 과거·미래에 관한 사실은 오직 인과 추론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내가 지금 친구가 프랑스에 있다고 믿는 것은 직접 보거나 기억해서가 아니라, 그가 보낸 편지나 여행 계획 같은 다른 사실들로부터 추론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흄은 추론이 가능하려면 현재 사실과 결론으로 이끌어내는 사실 사이에 연결(link)이 있다고 가정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만약 그 둘을 이어주는 필연적 고리가 없다면, 우리의 추론은 불안정하고 임의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문제는 바로 이 지점이다. 우리의 감각 경험은 어떤 대상의 “겉으로 드러나는 성질”만을 알려줄 뿐, 그것이 어떤 원인에서 비롯되었는지, 앞으로 어떤 결과를 낳을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물의 유동성을 본다고 해서 그것이 호흡을 막는 성질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없고, 불이 따뜻하고 빛난다고 해서 그것이 살을 태운다는 것을 알아낼 수 없는 것이다. 즉, 원인과 결과는 본질적으로 서로 다른 것이므로, 결과는 원인 속에서 결코 ‘발견’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끊임없이 원인으로부터 결과를 추론하는가? 흄은 그 배후에 있는 전제를 지적한다. 그것은 바로 자연의 일양성(uniformity of nature), 즉 “자연은 항상 같은 방식으로 작동할 것”이라는 가정이다. 우리는 같은 원인이 같은 상황에서는 언제나 같은 결과를 낳는다고 믿는다. 어제 빵이 나를 먹여 살렸다면, 오늘도 빵이 나를 먹여 살릴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기대는 논증이나 논리적 증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감각은 현재만 알려줄 뿐 미래를 보장하지 못하고, 기억은 과거만 소급할 뿐 미래로 확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연이 항상 동일할 것”이라는 가정은 그 자체로 이성적으로 입증될 수 없다.
이 지점에서 흄은 혁신적인 해석을 내놓는다. 그는 우리가 귀납적 추론을 수행하는 것은 습관(custom) 혹은 관습(habit) 때문이라고 말한다. 반복된 경험은 마음에 일정한 성향을 만들어서, 앞으로도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하게 만든다. 불꽃을 여러 번 보면서 따뜻함과 화상을 경험하면, 다음에 불을 볼 때도 자연스럽게 같은 결과를 예상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논증의 결과가 아니라, 단순히 정신이 과거의 반복에 반응하는 방식일 뿐이다.
여기서 흄은 중요한 전환을 제시한다. 인간은 본성상 필연적 인과관계를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경험을 통해 습관을 형성하고, 그것이 삶을 가능하게 한다. 만약 습관이 없다면 우리는 어떤 사실도 예측할 수 없고, 수단과 목적을 연결해 행동할 수도 없다. 따라서 흄에게 습관은 비이성적이지만 불가피한 원리, 인간 인식의 최종적 토대가 된다.
이 해석은 두 가지 함의를 가진다. 첫째, 과학적 지식도 결국 귀납에 의존하기 때문에, 그것은 논리적으로 확실한 토대가 아니라 심리적 습관 위에 세워진 것이라는 점이다. 둘째, 이는 인간 이성의 한계를 인정하고, 대신 심리학적·경험적 토대 위에서 지식을 이해해야 한다는 흄의 경험주의적 전환을 보여준다. 흄은 이로써 근대 철학에서 이성과 논리의 절대성을 해체하고, 인간의 인식 능력을 보다 겸허하게 자리매김한다.
결국 이 발췌문은 “인간은 인과관계를 ‘이성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습관적으로 기대하는 것’”이라는 흄의 통찰을 압축한다. 이는 근대 이후 과학철학과 인식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칸트의 ‘선험적 종합판단’ 논증이나 포퍼의 ‘반증주의’가 모두 흄의 귀납 문제에 대한 대응으로 등장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키워드
귀납, 인과관계, 습관, 경험
전후맥락
데이비드 흄의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 제1권 제3부는 인간이 사실에 대해 어떻게 추론하는지를 집중적으로 다룬다. 발췌문 앞에서는 흄이 ‘관계의 종류들’을 구분하면서, 사실에 관한 모든 추론은 결국 인과 관계에 의존한다고 논증한다. 그는 감각이나 기억이 제공하는 직접적 증거를 넘어서서, 부재한 사실을 추론하는 과정이 반드시 어떤 다른 사실과의 연결을 전제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예컨대 무인도에서 시계를 발견했을 때, 사람은 그것을 만든 이가 존재했을 것이라고 추론하는데, 이런 추론은 단순한 관찰이 아니라 인과적 연결을 가정한 것이다.
발췌문이 끝난 뒤 이어지는 부분에서 흄은 이러한 추론이 왜 필연적이지 않고 단지 습관(habit)에 의해 형성되는지를 더 깊이 파고든다. 그는 귀납적 추론의 근거가 이성이나 논증에 있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인간의 마음이 반복된 경험을 통해 기대와 성향을 형성하는 심리적 메커니즘을 설명한다. 즉, 우리는 ‘어제 빵이 나를 먹여 살렸으니 오늘도 그럴 것이다’라고 믿지만, 이 믿음은 필연적 인과의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단순히 반복 경험에서 오는 정신적 습관에 불과하다.
따라서 흄의 논의 전체 맥락에서, 발췌문은 귀납의 한계와 습관의 역할을 설명하는 핵심 부분이다. 앞에서는 인과 추론이 사실 인식의 필수 조건임을 제시하고, 뒤에서는 그 인과 추론이 논리적 정당화가 아니라 습관에 의해 작동한다는 점을 결론짓는다. 이를 통해 흄은 귀납적 추론의 비합리성을 드러내면서도, 동시에 그것이 인간 인식에 불가피하게 작동하는 본성임을 보여준다.
고전본문
사실에 관한 모든 추론은 인과 관계에 근거하는 것으로 보인다. 오직 그 관계 덕분에 우리는 기억과 감각이 제공하는 증거를 넘어설 수 있다. 어떤 사람에게 왜 그가 부재한 어떤 사실을 믿는지 묻는다면, 이를테면 그의 친구가 시골에 있다거나 프랑스에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지 묻는다면, 그는 그 이유를 제시할 것이다. 그 이유란 또 다른 사실일 텐데, 예컨대 친구에게서 받은 편지라든가, 그가 이전에 내렸던 결심이나 약속에 대한 지식 같은 것이다. 사람이 무인도에서 시계나 다른 기계를 발견했다면, 그 섬에 언젠가 사람이 있었음을 결론지을 것이다. 사실에 관한 모든 우리의 추론은 이런 성격을 갖는다. 그리고 여기서 언제나 전제되는 것은, 현재의 사실과 그것으로부터 추론되는 사실 사이에 어떤 연결이 있다는 점이다. 만약 그 둘을 묶어주는 것이 전혀 없다면, 그 추론은 완전히 불안정할 것이다.
분명한 것은, 아담이 온갖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하더라도, 물의 유동성만으로 그것이 그를 질식시킬 수 있음을 추론할 수 없었을 것이며, 불의 빛과 따뜻함만으로 그것이 그를 태워버릴 것임을 추론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떤 대상도 감각에 나타나는 성질을 통해 그것을 만들어낸 원인이나, 거기서 발생할 결과를 드러내지 않는다. 마음은 아무리 세밀하게 조사하고 검토하더라도, 추정된 원인 속에서 그 효과를 결코 찾아낼 수 없다. 효과는 원인과 전적으로 다르며, 따라서 결코 그 속에서 발견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감각의 현재 증언이나 기억의 기록을 넘어, 실제 존재와 사실을 보증하는 증거의 성격을 알 수 있다. 이 모든 종류의 추론은 자연의 질서가 항상 동일하게 지속될 것이라는 가정에 근거하는 듯하다. 우리는 같은 원인이 같은 상황에서는 항상 같은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어제가 나를 먹여 살린 빵은 오늘도 역시 나를 먹여 살릴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러나 마음이 이런 추론을 할 수 있으려면, 그것이 정말로 이성과 논증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라면, 어떤 매개가 필요하다.
그 매개란 무엇인가? 그것은 과거와 미래의 연결, 양자의 유사성에 근거하는 어떤 일반 원리여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원리에 대해 어떤 논증이 가능할까? 만약 가능하다면, 그것은 기하학의 어떤 논증만큼 확실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감각은 현재를 넘어서는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고, 우리의 기억은 단지 과거의 경험으로만 우리를 데려간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경험한 특정한 경우를 넘어 우리의 경험을 확장해야만 하는가? 혹시 우리가 감각적 성질과 은밀한 힘 사이에서 필연적 연결을 본다고 상상하기 때문인가? 그러나 어떤 대상도 그런 힘을 드러낸 적은 없다.
따라서 이렇게 물어볼 수 있다. 경험으로부터 도출되는 모든 결론의 토대는 무엇인가? 모두가 인정하듯, 그것들은 추론이나 이성의 어떤 과정에 근거하지 않는다. 관습(custom), 혹은 습관(habit)이 인간 삶의 위대한 안내자이다. 오직 이 원리만이 우리의 경험을 우리에게 유용하게 만들고, 과거에 나타난 사건들과 유사한 사건들이 미래에도 이어질 것이라고 기대하게 만든다. 만약 습관의 영향이 없다면, 우리는 기억과 감각에 현재 주어진 사실 너머의 모든 사실에 대해 전적으로 무지할 것이다. 우리는 결코 수단을 목적에 맞추거나, 우리의 자연적 능력을 어떤 효과를 낳는 데 사용할 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어떤 특정한 행위나 작용의 반복이, 이성이나 이해의 어떤 과정에 의해 강제되지 않고, 동일한 행위나 작용을 다시 하도록 기울어지게 만들 때, 우리는 언제나 이 성향을 습관의 효과라고 말한다. 이 단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우리가 그러한 성향의 궁극적인 이유를 제시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단지 보편적으로 인정되고 그 효과로 잘 알려진 인간 본성의 한 원리를 지적할 뿐이다. 어쩌면 우리는 더 이상 탐구를 밀고 나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혹은 이 원인의 원인을 밝힐 수 있다고 가장할 수도 없다. 우리는 그것을 최종 원리로 받아들이고 만족할 수밖에 없다.
[출전] 데이비드 흄,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 제1권 오성의 관하여, 제3부 4절-5절
토론하기
(1) 흄은 “자연은 항상 동일한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가정이 이성적으로 입증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과학적 법칙(예: 물은 100℃에서 끓는다)은 단지 습관의 산물일 뿐일까? 과학적 지식의 확실성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2) 흄은 귀납을 정당화하는 대신, 습관(custom)이라는 심리적 원리에 의존한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인간의 인식은 본질적으로 비이성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면 이는 단지 이성의 한계를 인정하는 겸허한 태도일까?
(3) 흄의 귀납 문제는 칸트의 인식론(선험적 종합판단), 포퍼의 반증주의 등 이후 철학적 전개에 큰 영향을 주었다. 오늘날 빅데이터와 인공지능의 ‘패턴 학습’ 방식도 흄의 습관 개념과 유사한 점이 있는데, 현대 과학·기술의 맥락에서 흄의 통찰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
해설읽기
이 발췌문은 흄의 철학에서 가장 유명한 논점 중 하나인 귀납 문제(the problem of induction)를 잘 보여준다. 흄은 먼저 “사실에 관한 모든 추론은 인과 관계에 의존한다”고 말한다. 우리의 감각과 기억은 직접적으로만 세계를 알려주며, 눈앞에 있지 않은 사실이나 과거·미래에 관한 사실은 오직 인과 추론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내가 지금 친구가 프랑스에 있다고 믿는 것은 직접 보거나 기억해서가 아니라, 그가 보낸 편지나 여행 계획 같은 다른 사실들로부터 추론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흄은 추론이 가능하려면 현재 사실과 결론으로 이끌어내는 사실 사이에 연결(link)이 있다고 가정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만약 그 둘을 이어주는 필연적 고리가 없다면, 우리의 추론은 불안정하고 임의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문제는 바로 이 지점이다. 우리의 감각 경험은 어떤 대상의 “겉으로 드러나는 성질”만을 알려줄 뿐, 그것이 어떤 원인에서 비롯되었는지, 앞으로 어떤 결과를 낳을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물의 유동성을 본다고 해서 그것이 호흡을 막는 성질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없고, 불이 따뜻하고 빛난다고 해서 그것이 살을 태운다는 것을 알아낼 수 없는 것이다. 즉, 원인과 결과는 본질적으로 서로 다른 것이므로, 결과는 원인 속에서 결코 ‘발견’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끊임없이 원인으로부터 결과를 추론하는가? 흄은 그 배후에 있는 전제를 지적한다. 그것은 바로 자연의 일양성(uniformity of nature), 즉 “자연은 항상 같은 방식으로 작동할 것”이라는 가정이다. 우리는 같은 원인이 같은 상황에서는 언제나 같은 결과를 낳는다고 믿는다. 어제 빵이 나를 먹여 살렸다면, 오늘도 빵이 나를 먹여 살릴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기대는 논증이나 논리적 증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감각은 현재만 알려줄 뿐 미래를 보장하지 못하고, 기억은 과거만 소급할 뿐 미래로 확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연이 항상 동일할 것”이라는 가정은 그 자체로 이성적으로 입증될 수 없다.
이 지점에서 흄은 혁신적인 해석을 내놓는다. 그는 우리가 귀납적 추론을 수행하는 것은 습관(custom) 혹은 관습(habit) 때문이라고 말한다. 반복된 경험은 마음에 일정한 성향을 만들어서, 앞으로도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하게 만든다. 불꽃을 여러 번 보면서 따뜻함과 화상을 경험하면, 다음에 불을 볼 때도 자연스럽게 같은 결과를 예상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논증의 결과가 아니라, 단순히 정신이 과거의 반복에 반응하는 방식일 뿐이다.
여기서 흄은 중요한 전환을 제시한다. 인간은 본성상 필연적 인과관계를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경험을 통해 습관을 형성하고, 그것이 삶을 가능하게 한다. 만약 습관이 없다면 우리는 어떤 사실도 예측할 수 없고, 수단과 목적을 연결해 행동할 수도 없다. 따라서 흄에게 습관은 비이성적이지만 불가피한 원리, 인간 인식의 최종적 토대가 된다.
이 해석은 두 가지 함의를 가진다. 첫째, 과학적 지식도 결국 귀납에 의존하기 때문에, 그것은 논리적으로 확실한 토대가 아니라 심리적 습관 위에 세워진 것이라는 점이다. 둘째, 이는 인간 이성의 한계를 인정하고, 대신 심리학적·경험적 토대 위에서 지식을 이해해야 한다는 흄의 경험주의적 전환을 보여준다. 흄은 이로써 근대 철학에서 이성과 논리의 절대성을 해체하고, 인간의 인식 능력을 보다 겸허하게 자리매김한다.
결국 이 발췌문은 “인간은 인과관계를 ‘이성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습관적으로 기대하는 것’”이라는 흄의 통찰을 압축한다. 이는 근대 이후 과학철학과 인식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칸트의 ‘선험적 종합판단’ 논증이나 포퍼의 ‘반증주의’가 모두 흄의 귀납 문제에 대한 대응으로 등장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키워드
귀납, 인과관계, 습관, 경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