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격문의(상세정보 참조)

1927년에 발표된 염상섭의 「밥」에는 관념적 사회주의자를 비판하고자 하는 작가 의식이 깃들어 있다. 작품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나’는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와 ‘창수’의 집에서 하숙을 한다. 창수는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로서 신문에 날 정도로 유명세가 있지만 일본 경찰의 삼엄한 감시 속에서 이런 활동이 제대로 이루어질 리는 만무하다. 이리저리 분주하게 돌아다니기는 하지만 돈을 못 버는 것은 물론이고 독립운동과 관련된 사업조차 변변히 이뤄지는 게 아닌 상황을 지켜보면서, 하숙을 하고 있는 ‘나’는 창수에게 차라리 고향인 시골로 내려가서 마름 노릇이라도 하며 잘 살아보라고 조언한다. 그러나 창수는 이러한 생각에 동의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자신만의 근거를 댄다. 이때, 안 그래도 먹을 것이 없는 창수네 집에 자주 찾아와 밥을 얻어먹고 가는 ‘원삼’이가 등장한다. 세계공황이 찾아와 일자리를 잃는 사람이 많았던 당대의 현실에서 원삼이 역시 실직을 하게 되어 친구 집을 전전하고 있는 것이었다. 창수는 원삼에게 이렇게 사느니 시골에라도 내려가서 살라고 조언하지만, 옆에서 이 말을 듣던 ‘나’는 창수나 원삼이나 시골로 내려가서 먹고 사는 편이 나은 건 똑같다고 생각한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식민지 조선에서도 사회주의 담론이 크게 유행하여 당대의 지식인들 중 많은 이들이 스스로를 사회주의자로 인식했다. 당대 지식계급의 또 다른 중요한 부류였던 민족주의자들과 달리, 사회주의자들은 제국주의 일본의 침략 행위의 근본에 자본주의의 문제가 놓여 있다고 생각했다. 사회주의자들의 관점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제국주의로 발전하게 되어 있는 것이므로 제국주의에 대항한 저항은 자본주의 비판의 문제를 반드시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식민지 지배를 문제 삼는 조선인 사회주의자들 역시 일제 강점기의 현실을 자본주의 비판과 결부지어 생각하려 했다. 사회주의는 당대의 최신 이론의 지위를 부여받고 있었기 때문에 사회주의에 동의하지 않는 지식인들(예를 들면 민족주의적 입장을 강조하는 지식인들)이라도 어느 정도는 사회주의자들의 시각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처럼 사회주의적 담론의 영향력은 대단히 강했다.

하지만 막상 사회주의에 기반한 저항 운동의 길을 모색하던 사람들의 실제 생활상은 녹록지 않았다. 일제의 식민지라는 엄혹한 조건에서는 조금만 일제에 비판적인 활동을 해도 곧장 잡혀들어가 탄압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사회주의 이론에 따르면 자본주의 체제를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민중들의 봉기와 혁명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일제의 탄압은 대단했다. 탄압을 받으면 자신의 안전은 물론이고 가족의 생계조차 위협받을 수 있었기에 특히 국내에 머물던 많은 사회주의자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발이 묶여 있는 경우가 많았다. 나가서 돈을 벌자니 자본주의적 세계에 투항하는 것 같고, 그렇다고 대놓고 민중 봉기와 혁명을 조직하자니 일제의 탄압이 너무 심했다.

염상섭은 이러한 사회주의자들의 모습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사회주의가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서 고통받는 노동자, 농민 등을 대변하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면 이도저도 아닌 채로 서울에서 어려운 생활을 이어가는 것보다 공장으로, 농촌의 현장으로 가서 노동자, 농민의 삶을 실질적으로 개선하는 활동을 벌여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당장에 저항부터 시작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라면 식민지 자본주의의 체제를 거부하지 말고 그 안에 들어가 현실을 개혁하는 방법도 있지 않냐는 거였다. 염상섭이 ‘관념적 사회주의자를 비판했다’는 말은 이러한 염상섭의 생각을 두고 하는 말이다.

하지만 염상섭이 사회주의자를 비판하는 문학작품, 평론 등을 다수 남겼다고 해서 염상섭이 사회주의자들을 무조건 나쁘다고 생각했던 것은 결코 아니다. 민족주의적인 시각을 대단히 강조하는 작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염상섭은 자신의 작품에서 사회주의자들의 모습을 누구보다도 많이 그려낸 작가이기도 하다. 그가 쓴 문학평론을 통해서도 염상섭은 누구보다도 사회주의자들과 진지하게 대화하려 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는 염상섭의 문학적 활동을 통해 진보와 보수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는 자세에 관해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

염상섭

관련 콘텐츠가 없습니다.

고전 매트릭스

(08826) 서울시 관악구 관악로 1 대림국제관(137-2동) 5층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E-mail. lhkwon75@snu.ac.kr  Tel. 010-3330-5032

고전 매트릭스

(08826) 서울시 관악구 관악로 1 대림국제관(137-2동) 5층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E-mail. lhkwon75@snu.ac.kr  l Tel. 010-3330-5032

Copyright 2025 Institute of Humanities, Seoul National Universi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