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맥락
네스는 생태철학에서 일반론보다 개개인의 결정과 행동이 더욱 중요하다고 여긴다. 현실 속에서 실질적인 행동과 변화를 위해서는, 일반적인 선언에 그치지 않고 개별적 수준에서 구체적 변화를 추동하는 동력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개인을 행동하게 만드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변화를 위한 힘은 좀 더 완전한 지식이나 정보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네스가 지적하듯이, “모든 사실이 모일 때까지 결정을 기다릴 수 없다. 결코 그것들 모두를 이용할 수는 없다.” 우리는 불확실하고, 위험하며, 잠재적으로 비가역적이고, 완전한 정보가 결여된 상황에 놓여 있다. 그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생명을 긍정하는 방식으로 행동할 수 있을까?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생명파괴적인 경향을 생명을 긍정하는 경향으로 바꿀 수 있을까? 이를 위해 네스는 개인이 저마다 자연세계를 직접 경험하는 가운데 생겨나는 느낌, 감정, 직관을 무엇보다도 중요시한다. 네스에게서 느낌과 감정은 ‘사실’과 ‘가치’를 결합시키는 접착제의 역할을 한다. 그는 “자연에 대해 다르게 생각할 뿐 아니라, 다르게 행동하고 느낄 필요가 있다”면서, “정치적 변화는 우리 안에서 감정적 변화를 요구한다.”고 말한다. 나아가 그는 우리가 심층생태학이 제안하는 방향으로 변화를 위한 동기를 만들어내려 한다면, “우리 삶에서 ‘느낌’을 발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특히 자연 속에서 그 창조적 힘을 경험하고 생명에 대한 느낌과 장소에 대한 느낌을 갖게 될 경우에 변화를 위한 동력이 가장 쉽게 생겨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래 본문에서 네스는 자신이 트베르가스타인에서 경험한 생명에 대한 느낌, 장소에 대한 느낌을 소개한다. 트베르가스타인은 네스가 스스로의 생태지혜(생태지혜T)를 발전시킨 장소이다. 여기서 T는 네스가 산위에 지은 작은 집, 트베르가스타인의 첫 글자이다.
고전본문
어떤 사람이 방금 편지를 들고 방문했다. 나는 친구가 쓴 카드에 다음의 글귀가 적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당신은 당신 자신과 세계를 어떻게 느낍니까?”
그 물음은 적절했다. 오늘날 사람들은 세계를 느끼는 것에 좀 더 집중할 필요가 있다. 내 친구가 던진 물음을 묻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되어야 한다. 왜 아니겠는가! 감정은 우리 사회에서 너무나 낮은 지위를 차지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나는 세계를 이렇게 본다.”라거나 “나는 세계를 이렇게 이해한다.”라고 말한다. 그들은 “나는 나 자신과 나의 상황을 이렇게 느낀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감정은 우리가 삶을 다룰 때 -실제로 모든 사회적인 그리고 사적인 맥락에서 핵심적 역할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소평가된다. 그러한 상황에 대해 뭔가 조치를 취할 수 있을까? 나는 그렇다고 믿는다.
나는 나의 고립된 산속 오두막, 트베르가스타인의 거실 창가에 앉아있기를 좋아하는데, 거기서 보이는 전망은 하르당에르비다 고원의 매우 노르웨이적 경치이다. 내 생각이 멀리 날아오르게 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여기서는 라디오와 텔레비전처럼 집중을 방해하는 것도 없고 바람소리 외에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나는 남서쪽 모퉁이에 내가 지은 작업 공간을 가지고 있는데, 그곳에서는 탁 트인 공간이, 나의 가장 가까운 이웃인 장엄한 할링스카르베트 마시프의 벼랑과 50,000평방마일 이상의 경관이 내다보인다.
여기 위쪽에서는 크게 생각하지 않기가 어렵다. 논쟁과 험담은 불가능하다. 여기서 우리는 장소와 생각 모두의 풍경 속에서 조심스럽게 걷는다. [...]
트베르가스타인에서 나는 내 안의 평온함을 발견하는데, 할링스카르베트 마시프 역시 그러한 평온함을 가진 것 같다. 격렬한 바람이든 허리케인이든, 눈이든 비든, 그 무엇도 그 평온함을 방해할 수 없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철학자 스피노자의 한 구절을 떠올린다. acquiescentia in se ipso, “자기 안의 평온함.” 그러한 종류의 평온함은 삶에서 바람이 강하게 부는 것을 막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일종의 내적인 공고화이며, 자신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온전한 인간임을 느낄 수 있는 태도이다. 나는 그러한 종류의 평온함을 트베르가스타인의 삶의 방식에서만 느낀다. 자연은 우리가 그러한 종류의 고요함을 발견하도록 돕는 듯하다. 어떤 이들은 산을, 다른 이들은 바다를, 또 다른 이들은 숲을 찾는다.
나는 여기 위쪽에서 작은 동물들에게 특별한 친밀감을 느낀다. 나는 세 살 때, 그리고 그 이후에 서부 노르웨이의 노르헤임순의 해변에서 작은 새우들 및 도다리들과 시간을 보냈다. 나는 그들보다 훨씬 더 컸지만, 내가 가만히 서있으면 그들은 달아나다가 갑자기 되돌아와서 나를 시시콜콜히 조사했다. 도다리들은 내 발바닥 밑에서 쉴 곳을 찾았다. 나는 그것을 자신감의 신호로 여겼다. 나는 그때 그곳에서 의심할 여지없이 내가 살아있는 존재들로 구성된 광대한 세계의 일부라는 감각을 발달시켰다. [...].
내 친구가 내게 세계를 어떻게 느끼는지 물었는데, 사실 그것은 복잡한 물음이다. 그가 말한 것이 나의 세계일까 아니면 더 큰 세계일까? 나는 그 둘의 조합이라고 가정한다. 짧게 대답하면, 세계는 내가 느끼는 바에 참여하고, 반대로도 그렇다. 세계와 나는 동떨어져 있지 않으며, 아마도 1밀리미터만큼도 떨어져있지 않다. 나는 자아의 한계가 무엇인지 명확히 알지 못한다. 아마도 자아는 흘러넘치고 확장하거나, 혹은 안에서 수축한다. 그것은 결코 똑같지 않다. 자아는 견고한 어떤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흐름인 것 같다. 내가 기록한 다양한 느낌들은 마치 일종의 상자 안에 담겨 있는 것처럼 단지 내 안에만 있는 것일까? 의식은 외부 사물들의 사진이 담긴 일종의 그릇일까? 그러한 생각은 내게 마치 세계를 저 멀리로 소외시키고 의식의 거대한 흐름을 비하하는 터무니없는 말처럼 들린다.
이러한 일은 너무 오랫동안 계속되어 왔다. 그렇지만 우리가 사는 동안 음미할 시간을 가진다면 아마도 무한히 다양한 감정들을 보게 될 것이며, 우리는 트베르가스타인에서 무한히 다양한 감정들이 방해받지 않고 꼬이고 풀리고 위장하고 유쾌한 공상에 빠지도록 놓아둘 수 있을 것이다.
[출전] 아르네 네스,『삶의 철학: 더 깊은 세계에서의 이성과 느낌 (Life's Philosophy: Reason and Feeling in a Deeper World)』
토론하기
(1) 네스가 트베르가스타인에서 느낀 것은 그가 생태철학 논의를 전개하고 심층생태운동에 헌신하는 데 어떠한 영향을 미쳤을까요?
(2) 어떤 자연의 장소에서 장소에 대한, 혹은 생명에 대한 강렬한 느낌을 느낀 적이 있나요? 그때의 경험을 떠올려 보세요,
(3) 지금 이 세계에 대해, 그리고 이 세계에서 살아가는 자기 자신에 대해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솔직하게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나요? 교실에서, 강의실에서 그러한 이야기들을 나누게 되면 무슨 일이 생길까요?
해설읽기
네스는 우리가 자기 자신과 세계를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를 좀 더 자주 물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물론 스스로에게 그런 물음을 던지는 것도, 다른 사람에게 그런 질문을 하는 것도 어색하고 번거롭습니다. 사람들은 느낌이나 감정보다는 자신의 생각이나 이해를 이야기하는 것을 더 편안해 합니다. 하지만 네스는 느낌을 숨기면 거의 아무런 결실도 맺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감정이 우리 삶에서, 나아가 우리 사회에서 그토록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에도 그렇게 과소평가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네스는 인적 없는 산위에 작은 집을 짓고 거기서 소박한 삶을 영위했습니다. 네스는 그 작은 집을 트베르가스타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곳에는 전기도 없고 라디오나 텔레비전도 당연히 없었습니다. 네스는 그곳에서 자신이 느낀 바를 소개합니다. 노르웨이의 대자연 속에서 네스는 조심스럽게 걷습니다. 네스는 단지 물리적 장소만이 아니라 자기 생각의 풍경 속에서도 조심스럽게 걷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곳에서 네스는 자기 안의 평온함을 발견하는데, 할링스카르베트 마시프에서도 그러한 평온함을 느낍니다. 산위의 작은 집에서 네스의 내면과 노르웨이의 산은 조응합니다. 사람들은 자연에서 그러한 종류의 고요함, 평온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자연에서 우리는 네스가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감각, 곧 “내가 살아있는 존재들로 구성된 광대한 세계의 일부라는 감각”을 발달시킬 수 있습니다. 네스는 “나는 좀 더 주위 환경의 일부가 되고 주위 환경은 좀 더 나의 일부가 된다.”고 표현합니다. 이러한 느낌을 현대인들은 많이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자연 속에서 충분한 시간을 가지면서 그러한 느낌을 갖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개인적으로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나아가 생태적으로도 말입니다.
키워드
감각, 감정, 느낌, 트베르가스타인
전후맥락
네스는 생태철학에서 일반론보다 개개인의 결정과 행동이 더욱 중요하다고 여긴다. 현실 속에서 실질적인 행동과 변화를 위해서는, 일반적인 선언에 그치지 않고 개별적 수준에서 구체적 변화를 추동하는 동력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개인을 행동하게 만드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변화를 위한 힘은 좀 더 완전한 지식이나 정보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네스가 지적하듯이, “모든 사실이 모일 때까지 결정을 기다릴 수 없다. 결코 그것들 모두를 이용할 수는 없다.” 우리는 불확실하고, 위험하며, 잠재적으로 비가역적이고, 완전한 정보가 결여된 상황에 놓여 있다. 그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생명을 긍정하는 방식으로 행동할 수 있을까?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생명파괴적인 경향을 생명을 긍정하는 경향으로 바꿀 수 있을까? 이를 위해 네스는 개인이 저마다 자연세계를 직접 경험하는 가운데 생겨나는 느낌, 감정, 직관을 무엇보다도 중요시한다. 네스에게서 느낌과 감정은 ‘사실’과 ‘가치’를 결합시키는 접착제의 역할을 한다. 그는 “자연에 대해 다르게 생각할 뿐 아니라, 다르게 행동하고 느낄 필요가 있다”면서, “정치적 변화는 우리 안에서 감정적 변화를 요구한다.”고 말한다. 나아가 그는 우리가 심층생태학이 제안하는 방향으로 변화를 위한 동기를 만들어내려 한다면, “우리 삶에서 ‘느낌’을 발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특히 자연 속에서 그 창조적 힘을 경험하고 생명에 대한 느낌과 장소에 대한 느낌을 갖게 될 경우에 변화를 위한 동력이 가장 쉽게 생겨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래 본문에서 네스는 자신이 트베르가스타인에서 경험한 생명에 대한 느낌, 장소에 대한 느낌을 소개한다. 트베르가스타인은 네스가 스스로의 생태지혜(생태지혜T)를 발전시킨 장소이다. 여기서 T는 네스가 산위에 지은 작은 집, 트베르가스타인의 첫 글자이다.
고전본문
어떤 사람이 방금 편지를 들고 방문했다. 나는 친구가 쓴 카드에 다음의 글귀가 적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당신은 당신 자신과 세계를 어떻게 느낍니까?”
그 물음은 적절했다. 오늘날 사람들은 세계를 느끼는 것에 좀 더 집중할 필요가 있다. 내 친구가 던진 물음을 묻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되어야 한다. 왜 아니겠는가! 감정은 우리 사회에서 너무나 낮은 지위를 차지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나는 세계를 이렇게 본다.”라거나 “나는 세계를 이렇게 이해한다.”라고 말한다. 그들은 “나는 나 자신과 나의 상황을 이렇게 느낀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감정은 우리가 삶을 다룰 때 -실제로 모든 사회적인 그리고 사적인 맥락에서 핵심적 역할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소평가된다. 그러한 상황에 대해 뭔가 조치를 취할 수 있을까? 나는 그렇다고 믿는다.
나는 나의 고립된 산속 오두막, 트베르가스타인의 거실 창가에 앉아있기를 좋아하는데, 거기서 보이는 전망은 하르당에르비다 고원의 매우 노르웨이적 경치이다. 내 생각이 멀리 날아오르게 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여기서는 라디오와 텔레비전처럼 집중을 방해하는 것도 없고 바람소리 외에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나는 남서쪽 모퉁이에 내가 지은 작업 공간을 가지고 있는데, 그곳에서는 탁 트인 공간이, 나의 가장 가까운 이웃인 장엄한 할링스카르베트 마시프의 벼랑과 50,000평방마일 이상의 경관이 내다보인다.
여기 위쪽에서는 크게 생각하지 않기가 어렵다. 논쟁과 험담은 불가능하다. 여기서 우리는 장소와 생각 모두의 풍경 속에서 조심스럽게 걷는다. [...]
트베르가스타인에서 나는 내 안의 평온함을 발견하는데, 할링스카르베트 마시프 역시 그러한 평온함을 가진 것 같다. 격렬한 바람이든 허리케인이든, 눈이든 비든, 그 무엇도 그 평온함을 방해할 수 없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철학자 스피노자의 한 구절을 떠올린다. acquiescentia in se ipso, “자기 안의 평온함.” 그러한 종류의 평온함은 삶에서 바람이 강하게 부는 것을 막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일종의 내적인 공고화이며, 자신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온전한 인간임을 느낄 수 있는 태도이다. 나는 그러한 종류의 평온함을 트베르가스타인의 삶의 방식에서만 느낀다. 자연은 우리가 그러한 종류의 고요함을 발견하도록 돕는 듯하다. 어떤 이들은 산을, 다른 이들은 바다를, 또 다른 이들은 숲을 찾는다.
나는 여기 위쪽에서 작은 동물들에게 특별한 친밀감을 느낀다. 나는 세 살 때, 그리고 그 이후에 서부 노르웨이의 노르헤임순의 해변에서 작은 새우들 및 도다리들과 시간을 보냈다. 나는 그들보다 훨씬 더 컸지만, 내가 가만히 서있으면 그들은 달아나다가 갑자기 되돌아와서 나를 시시콜콜히 조사했다. 도다리들은 내 발바닥 밑에서 쉴 곳을 찾았다. 나는 그것을 자신감의 신호로 여겼다. 나는 그때 그곳에서 의심할 여지없이 내가 살아있는 존재들로 구성된 광대한 세계의 일부라는 감각을 발달시켰다. [...].
내 친구가 내게 세계를 어떻게 느끼는지 물었는데, 사실 그것은 복잡한 물음이다. 그가 말한 것이 나의 세계일까 아니면 더 큰 세계일까? 나는 그 둘의 조합이라고 가정한다. 짧게 대답하면, 세계는 내가 느끼는 바에 참여하고, 반대로도 그렇다. 세계와 나는 동떨어져 있지 않으며, 아마도 1밀리미터만큼도 떨어져있지 않다. 나는 자아의 한계가 무엇인지 명확히 알지 못한다. 아마도 자아는 흘러넘치고 확장하거나, 혹은 안에서 수축한다. 그것은 결코 똑같지 않다. 자아는 견고한 어떤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흐름인 것 같다. 내가 기록한 다양한 느낌들은 마치 일종의 상자 안에 담겨 있는 것처럼 단지 내 안에만 있는 것일까? 의식은 외부 사물들의 사진이 담긴 일종의 그릇일까? 그러한 생각은 내게 마치 세계를 저 멀리로 소외시키고 의식의 거대한 흐름을 비하하는 터무니없는 말처럼 들린다.
이러한 일은 너무 오랫동안 계속되어 왔다. 그렇지만 우리가 사는 동안 음미할 시간을 가진다면 아마도 무한히 다양한 감정들을 보게 될 것이며, 우리는 트베르가스타인에서 무한히 다양한 감정들이 방해받지 않고 꼬이고 풀리고 위장하고 유쾌한 공상에 빠지도록 놓아둘 수 있을 것이다.
[출전] 아르네 네스,『삶의 철학: 더 깊은 세계에서의 이성과 느낌 (Life's Philosophy: Reason and Feeling in a Deeper World)』
토론하기
(1) 네스가 트베르가스타인에서 느낀 것은 그가 생태철학 논의를 전개하고 심층생태운동에 헌신하는 데 어떠한 영향을 미쳤을까요?
(2) 어떤 자연의 장소에서 장소에 대한, 혹은 생명에 대한 강렬한 느낌을 느낀 적이 있나요? 그때의 경험을 떠올려 보세요,
(3) 지금 이 세계에 대해, 그리고 이 세계에서 살아가는 자기 자신에 대해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솔직하게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나요? 교실에서, 강의실에서 그러한 이야기들을 나누게 되면 무슨 일이 생길까요?
해설읽기
네스는 우리가 자기 자신과 세계를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를 좀 더 자주 물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물론 스스로에게 그런 물음을 던지는 것도, 다른 사람에게 그런 질문을 하는 것도 어색하고 번거롭습니다. 사람들은 느낌이나 감정보다는 자신의 생각이나 이해를 이야기하는 것을 더 편안해 합니다. 하지만 네스는 느낌을 숨기면 거의 아무런 결실도 맺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감정이 우리 삶에서, 나아가 우리 사회에서 그토록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에도 그렇게 과소평가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네스는 인적 없는 산위에 작은 집을 짓고 거기서 소박한 삶을 영위했습니다. 네스는 그 작은 집을 트베르가스타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곳에는 전기도 없고 라디오나 텔레비전도 당연히 없었습니다. 네스는 그곳에서 자신이 느낀 바를 소개합니다. 노르웨이의 대자연 속에서 네스는 조심스럽게 걷습니다. 네스는 단지 물리적 장소만이 아니라 자기 생각의 풍경 속에서도 조심스럽게 걷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곳에서 네스는 자기 안의 평온함을 발견하는데, 할링스카르베트 마시프에서도 그러한 평온함을 느낍니다. 산위의 작은 집에서 네스의 내면과 노르웨이의 산은 조응합니다. 사람들은 자연에서 그러한 종류의 고요함, 평온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자연에서 우리는 네스가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감각, 곧 “내가 살아있는 존재들로 구성된 광대한 세계의 일부라는 감각”을 발달시킬 수 있습니다. 네스는 “나는 좀 더 주위 환경의 일부가 되고 주위 환경은 좀 더 나의 일부가 된다.”고 표현합니다. 이러한 느낌을 현대인들은 많이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자연 속에서 충분한 시간을 가지면서 그러한 느낌을 갖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개인적으로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나아가 생태적으로도 말입니다.
키워드
감각, 감정, 느낌, 트베르가스타인